이 영화에는 약물을 이용해 환각상태로 들어가는 장면들이 많은데, 대단히 예리하고 흥미롭다. 약물이 주입된 피험자는 곧바로 '현실같은' 환영 속에 놓이게 되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위험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에 나타나는 환영은 이 '테스트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설정했겠지만, 피험자의 반응에 따라 환영은 변화한다. 피험자마다 각기 다른 임기응변을 발휘할테니 환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주인공 베아트리스(트리스)는 자신의 성향 또는 적성을 검사하기 위해 약물을 마시고, 순식간에 환각상태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곳에는 거울이 있고,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이 있다. 거울상은 이리저리 분화하면서 트리스는 자신의 분신들에 둘러쌓인다. 그 분신들은 자신과 똑같으면서도 똑같지 않다. 어깨를 만지고, 말을 걸고, 선택을 재촉한다. 나에게는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구체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 뜻을 '천지간에 자기가 가장 존귀함'으로 의역하지 않고, '온세상에 오직 나만 홀로 높음'으로 직역한다면 말이다. 즉 '보이는 모든 것이 나의 반영', '나의 내면이 외부에 투사된 것이 이 세상'이고, 그러므로 온세상이 나의 통제 안에 있음을 뜻한다면!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그들의 도시는 거대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다. 두 번째 환각에서 트리스는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그 울타리 밖에 혼자 서 있다. 한쪽에서는 들불이 번지고, 하늘에서는 까마귀가 떼지어 달려들고, 달아나려는데 발이 진창에 빠져서 걸을 수도 없다. 공포에 질려 넘어졌을 때 트리스는 작은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나르키소스 같다. 주인공답게 트리스는 그 상황이 실제가 아닌 환영임을 깨닫고 완전히 다른(헤르메스적)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어난다.
이 세 번째 환영은 '소외'와 '익사'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역시 현실이 아닌 환각임을 인식한 시점에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운 상황을 인간적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보다 몇 배는 효율적이다.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제가 아님'을 깨닫고 발버둥을 멈추는 것이다.
이건 드물게 꾸는 '꿈 속의 꿈'을 연상시킨다. 꿈 속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여전히 꿈이다. 한 번 깨었기 때문에 '현실'에 있다고 믿지만 여전히 꿈 속이다. 잠든 상태에서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 다행히 트리스는 구분해 내고 최종 테스트를 통과한다.
이 영화에서의 환각체험들은 단지 몇 분 안에 끝나버리지만, 만일 80년쯤 지속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트리스처럼 초창기에는 문득문득 자신이 '실재가 아닌' 내면적 환각계에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겠지만, 점차 환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늙어 죽는다 해도 진짜!로 죽을 수는 없다. 어떻게 꿈 속에서 죽을 수 있겠나. 꿈 속에서 아기로 태어나든 노인으로 죽든 그저 꿈 속의 시간, 꿈 속의 변화일 뿐인데.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샘에 비친 자기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서, 에코의 절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샘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말이 안된다. 어떤 바보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타인으로 보겠으며, 어떤 멍청이가 실체가 아닌 제 거울상에 홀려서 죽음을 택하겠나. 이 이야기는 아주 섬세하게 구성된 영지주의 우화다.
처음엔 이렇게 구경하듯 바라보았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다가 이렇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다가, 자신이 '바라보는 자'임을 잊고 물에 비친 허상을 자신이라고 믿게 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 허상에 코를 대고 들여다보는 지점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잊고 물 속 깊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그 새로운 세계 속에서 걷고 놀고 탐험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 티켓이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누구나 한 번쯤 거기에 입장하려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놀이동산은 한 번 입장하면 여간해서는 퇴장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다. 들어서면서부터 '떠나온 곳'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세계다. '어디서 왔더라?' 하는 질문 자체를 할 수 없으니, '이제 그만 놀고 나가고 싶다'는 바람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처럼, 혼미한 경험에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면서, 두려움과 싸우고, 싸우면서 점점 약해지고 악惡해져 간다. 진짜처럼 보이는 그 세계 자체가 '가짜'라고 에코가 아무리 외쳐도 그는 듣지 못한다. 그리고 그 놀이동산에서 '놀이'보다는 '일'을 하면서 대하드라마를 만들어 간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을 지칭하여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듯이, 나르키소스는 그 곳에서 살고 죽고 또 살고 죽는다. 나르키소스는 익사한 바보가 아니라 잠들어버린 '우리'에 대한 은유다.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운 이미지들 중 최근 작품: 방탄소년단의 'Singularity' 뮤직비디오. 온세상이 나의 반영이라면, 삶이란 나자신과 추는 춤이고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의 분신일 수 있다. 그러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온세상에 투영되어 있는 동시에 세상 밖에 있겠지. 하나를 둘로 분리시킨 '얼어붙은 호수'의 두꺼운 얼음이 깨지고 녹아 흐르면서 언젠가는 봄이 온다는 가사. 아,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밖을 보는 이는 꿈을 꾸지만, 안을 보는 이는 깨어난다" - Carl Jung
"그대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은, 그대 안에 존재하는 것. 인생이 메아리임을 기억하라. 언제나 그대에게로 돌아온다." - Zig Zigler
What you see in others, exists in you. remember, life is echo. it always gets back to you.
원문은 [Whole Earth Review]의 1994년 겨울호에 실린, 90세를 맞이한 헬렌과 Tami Simon의 인터뷰 중 일부라고 함.
<성장과정에 대해>
나는 아주 운이 좋았어요. 나는 좀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족은 지식인이었고 음악적이고 예술적이었어요. 뉴욕 교외에 살았는데, 그들을 만나러 오는 유럽사람들과 많은 접촉이 었었어요. 채식주의자였고(1800년대 말에!) 동양의 종교에 관심이 있었고 시민단체들의 회원이었고 대단히 박애주의적이었어요. 나는 내가 그 집안에 태어날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들을 골라냈다는 거지요. 어려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얼마간 재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어요. 대학에 가는 것과 바이올린을 공부하러 유럽에 가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 됐는데 유럽을 선택했어요. 17세에 집을 떠나서 여러해 동안 외국에서 살았어요.
<스코트 니어링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를 소개한다면?>
외부인들에게 그는 자기의 지적, 육체적 일에만 관심이 있는 엄격한 사람으로 보일 거에요. 그러나 그는 아주 드문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특히 이상주의자였고 돈이나 출세나 지위에 관심이 없었어요. 배우고 기여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세상이 살 만한 좋은 세상이 되도록 돕는 데 관심이 있었어요.
<버몬트로 이사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스코트는 너무나 급진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여러 대학에서 쫓겨났어요. 펜실베니아대학에서는 9년간 재직했는데 공장과 광산에서의 어린이 노동에 반대한 것 때문에 쫓겨났고, 오하이오의 톨레도대학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했기 때문에 해고되었어요. 그는 그것이 이상주의적인 전쟁이 아니라 상업적인 전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스워스모어대학에서도 해고되었어요. 내가 그를 만났을 때 스코트는 아무 일자리도 없었어요. 어떤 학교에서도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빈민지역에 살면서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스코트의 책들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음식은 거리의 수레에서 샀어요. 스코트는 우리가 시골에서는 우리자신을 더 잘 보살필 수 있고 더 값싸고 쉽게 살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버몬트주에 가서 잘 돌보지 않아 무너져가는 오래된 농장을 찾아냈어요. 그것을 1100달러(우리 둘의 전재산)에 사서 1932년에 숲속으로 살러 갔지요.
<당신과 스코트가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그런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래요.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었지요. 여행도 해보았고 어느 정도까지 학교교육도 받았지요.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우리자신을 보살피기에 특별히 잘 갖추어져 있었을 거에요. 가난했던 사람들은 사치를 좀 맛보기를 원하고 시골에 가서 힘들게 일하는 데에 관심이 없지요.
<이 집을 지었을 때, 두 분의 나이는?>
나는 70이 넘었고 스코트는 90이 넘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내가 30~40대, 스코트가 60대였을 때 버몬트주에서 9채의 돌집을 지었어요.
<집짓는 노동이 노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맞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사람들의 인식에 거스르기를 좋아해요. 그리고 손님방이나 작업실이나 헛간, 온실 같은 것이 필요하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시키나요. 주위에 돌이 많으니 돌로 집을 짓는 건 자연스런 일이지요. 나는 돌일하는 데 선수가 됐어요. 목수일은 잘 못하지만 바위는 다룰 수 있어요.
<[요리에 반대하는 책]을 쓴 이유>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생각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요. 나는 음식에 그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익히지 않은 채소와 과일들이 더 생명력이 있고 더 건강한 식품이에요. 음식을 익히는 것은 부자연스러워요. 식품은 본래 익어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있는 거죠. 나는 가든클럽 회원들에게 날감자 샌드위치를 대접했어요. 감자를 아주 얇게 저몄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날감자라는 걸 알기 전에는 아주 맛있다고 생각했어요. ...... 나는 세상에 있는 온갖 요리책을 생각하고 거기에 한권을 더 보탤만큼 내가 뻔뻔스러운 것이 이상했어요. 하지만 출판사에서 요청을 했고, 나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요리책을 쓰겠다고 말했지요. 그들의 말이 고객을 모욕할 수는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목을 [좋은 생활을 위한 단순한 음식(한국어판 '소박한 밥상')]으로 하기로 했지요. 그 책의 반 가량이 음식과 식이와 요리에 대한 이야기에요. 요리처방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어요. 나는 되도록 단순하게 만들었고 3×5인치 카드에 써넣을 수 없는 요리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단식에 대해>
글쎄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실컷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뭔가 성글고 내핍을 좋아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에요. 우리는 둘이 한꺼번에 단식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어요. 죽을지 안죽을지! 그래서 내가 물만 마시며 열흘동안 단식을 하고 스코트가 집과 방문객들을 돌보며 계속 식사를 했어요. 내가 그걸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사람도 단식을 하게 되었지요. 그 후에는 함께 했지요. 그건 즐거운 일이에요. 시간이 더 많아지지요. 일하고 놀고 걷고 수영하고 채소를 가꾸고 할 시간이 충분해요.
<의사, 병원, 건강진단에 대해>
우리는 의사에게 자주 가지 않았어요. 지금도 안갑니다. 15년 전에 한 유명한 의사가 우리를 보러와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는 "당신들은 이런 일을 할 때는 지난 나이입니다. 병원에 오시겠습니까? 건강 진단을 하고 잘못된 데가 없는지 알아보도록 해주십시오. 그 나이에 그렇게 건강할 수는 없으니까요" 라고 했어요. 우리는 "좋아요. 주사는 거절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조사를 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는 우리한테서 잘못된 것을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요. 혈압도 좋았고 모든 것이 훌륭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비타민 B12가 부족하다는 걸 알아냈어요(그는 B12 전문가였어요). 스코트는 그에게 "당신의 B12 테스트는 우리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 고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에 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테스트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우리를 진찰한 그 의사는 스코트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갔어요.
<혹시 두통이 있을 때는? 감기나 복통이 있거나 할 때는?>
나는 머리가 아픈 일이 없어요. 사실 두통이 어떤 것인지 몰라요.
몸이 그걸 보살필 기회를 주기 위해서 당장 먹는 것을 중단하지요. 물이나 사과즙, 사과주스를 많이 마시고요. 먹지 않으면 어떤 감기라도 사흘이면 떨어져요.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몸에 아주 좋은 휴식이 됩니다.
<스코트의 죽음은 주목할 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셨는데요.>
그는 쇠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100살이 되기 두어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됐어. 그만 먹고 가야겠어' 그리고 그는 정말로 갔어요. 먹기를 그쳤고 한달 반 동안 액체만 마시다가 마지막에는 물만 마시고 갔어요. 그런데 괴로움도 없었고 통증도 없었고 특별히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맙소사, 스코트를 잃는구나. 내게서 떠나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가졌나요?>
그를 잃어버린 게 아닌 걸요. 그는 여전히 내 의식 속에 많이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성이 있고 그는 다른 일, 다른 관심사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그를 만날 거에요. 혹시 만나지 않아도 그가 잘 있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며 배우고 있다는 걸 알 거에요.
<기분이 어땠나요. 방 안의 느낌은요?>
커다란 정적과 커다란 확신의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그에게 또하나의 기회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것이 '나'를 위한 기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내가 그를 도와서 계속 나아가게 해줄 기회였어요.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기꺼이, 쉽게, 가식없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숨을 조금씩 덜 쉬더니 떠났어요. 떠나가는 좋은 방법이죠. 그는 삶에서나 죽음에서나 나에게 모범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대개 정신적인 충격으로, 비극으로 생각되고 있는데요.>
나는 죽음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흥미로울 거에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대해>
망치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에요. 좋은 일은 가능한 한 많이, 해는 가능한 한 적게 끼치자는 자세가 중요하지요. 그 정도 밖에 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행동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는 거에요. 스코트가 자주 사용한 좋은 말이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라" 에요. 그 말은 살아가는 원칙으로 삼기에 괜챦은 말이지요.
올더스 헉슬리는 60인가, 70이 넘어서 그의 모든 공부와 작품과 연구 모두를 무색케 하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금 더 친절해지는 것임을 깨닫고서 느낀 당황스러움에 대해 썼어요. 버트란드 러셀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도 그 말을 하기를 난처해 했죠. '사랑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기초'라고. 한 사람이 숲 속에서 농부로 살면서 전혀 세상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친절과 단순함의 삶을 살았다면 공헌을 한 거에요. 세상을 더 나쁜 장소로 만든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거지요.
스코트의 100번 째 생일에 이웃사람들이 깃발들을 들고 작은 행렬을 이루고 왔어요. 그 깃발 중의 하나에 이렇게 씌여 있었어요. "스코트 니어링이 100년 동안 살아서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
<당신 삶의 이 마지막 단계에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데에는 모두 목적이 있어요. 우리는 공헌하고, 배우고, 돕고,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또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나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지구의 모든 배열, 나무들, 동물들 그리고 하늘과 석양 등에 대해 큰 경이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항상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적에 따라 일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고 늘 느꼈어요.
우리는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분리되어 있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전체의 부분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 말을 쓴다면 그건 '온전한 전체'를 의미할 거에요. 우리를 통해서 배우고 일하고 존재하는 것, 그래서 나는 혼자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노력하는 거에요.
<저는 우리가 더 사랑하면 우주가 어떤 식으로 확장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아주 훌륭하고 명석한 개념입니다. 나는 다른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인식함으로써 세상의 선善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거나 신체적으로 가까울 필요가 없지요. 지구의 반대편에 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을 보내면,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요.
사랑을 발산하며 세상에서 사는 것은, 늙었거나 쇠약하고 가난하거나 고립되어 있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커다란 일 중의 하나에요. 그래도 사랑을 내보낼 수 있고, 그래도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가 그들이 어디에 있건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들의 육체 속에서나 그들이 관련되어 있는 삶 속에서나, 우리는 모두 방에서 나가지 않고도 우리 몫의 사랑을 보탤 수 있어요.
별이 밝게 빛나는 밤에 하늘을 보면, 밝은 별로 가득차 있지 않은 하늘은 한 조각도 없어요.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우주는 거대해요. 그리고 멋지고 장엄하죠. 나는 그것에 경의를 보내요. 이 조그만 점, 유리창에 붙어있는 이 조그만 파리 한마리가 우주에 갈채를 보내요. 주제 넘게도!
우리가 버몬트 골짜기로 왔을 때는 땅값이 매우 쌌는데, 우리가 떠나기로 작정했을 무렵 한국전쟁 때문에 땅값이 치솟았다. 스코트는 전쟁에서 오는 이익을 원하지 않아서 지역산림 발전을 위해 자기몫의 땅을 윈홀 마을에 기부했다. 마을사람들은 세금을 안 내려고 그러는 줄 판단해서인지 마지못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기부가 선의에서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머지 절반의 땅이 팔리자 우리는 메인에 있는 땅을 살 수 있었다. 한 친구가 내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큰 이익을 보고 팔 수 있었습니다. 스코트는 엄청나게 값이 오른 땅과 산 모두를 포기한 거구요. 당신은 예전에 뉴욕 메시백화점의 근사한 제의를 거절한 일도 있지요(메시가 사탕단풍 캔디를 다량 주문했을 때). 당신과 스코트는 돈을 벌지 않으려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네요."
<165쪽> 나와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는, 나하고 스코트의 관계 때문에 부모님이 얼마동안 한탄하던 때를 빼고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가까웠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나는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분들은 내가 참된 목표와 스코트에게 온마음을 다해 전념하고 헌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갖고있는 정치견해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의지와 불굴의 노력을 존중했다. 그분들은 인간관계에서 원숙해졌으며 스코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예전에 품고있던 선입견과 반대를 마침내 넘어선 것에 나는 진정한 만족감을 느꼈다.
<170쪽>
[월드 투머로우World Tomorrow]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견해야 어떻든간에 변혁운동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코트는 교사로서 자기가 주장하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한결같은 정직성과 애정이 담긴 이타성, 그 사람의 성격을 이루는 얼핏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덕성들의 근원적인 통합으로 계속해서 영감을 줄 것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리는 토르스타인 베블런과 스코트 니어링처럼, 어리석은 동시대인들에 의해 '감금되고 묶인' 대가들의 예를 본다. 한편 사회학과 경제학, 정치학의 좋은자리는 시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스코트의 평생에 걸친 업적은 경제학자, 교육자, 평화운동가, 인권옹호자, 좌파정치인, 국제 사회주의자, 생태주의자, 귀농운동가, 미래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이 모든 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학계에 머물렀던 것 이상으로 사회복지 부분에 더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한 통신원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학계에 남아 가르치는 생활을 포기한 것을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보통 교직에 있으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183쪽>
우리는 자주 늙음과 건강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답장을 썼다.
"...... 우리가 건강과 장수를 위해 실천에 옮긴 몇몇 지침을 소개합니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바깥일과 깊은 호흡, 금연, 커피와 차를 포함해 술이나 마약을 멀리 함, 간소한 식사, 채식주의, 설탕과 소금을 멀리 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이것들은 삶에 활력을 주고 수명을 연장시킬 것입니다. 약, 의사, 병원을 멀리하십시오."
<196쪽>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신god'이라는 말을 쓰는가. 왜 '전체로서의 존재' 또는 '위대한 전체'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다음의 정의가 최선인 듯 싶다. "신의 본질은,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과 같다."
한 의사 친구에게 스코트는 이렇게 써 보냈다.
"내 건강상태를 염려하는 편지 고맙네. 자네 제안을 내가 이해하건데, 자네는 내가 다달이 소변을 받아다 자네에게 갖다주고 비타민B-12 주사를 맞으며 그밖에 필요한 처방이나 치료를 받기를 권하고 있네. 내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내 삶의 남은 기간동안 의사의 감독 아래 수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셈이 되는 걸세. 고맙네만, 나는 그런 과정을 밟느니 차라리 일찍 죽는 편을 택하겠네. 내 방식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보통의 건강과 원기를 유지하면서 적절히 절제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라네. 내가 올바른 식사방식과 절제된 생활로 잘 지낼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는 것이 나와 내가 속해있는 사회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 상각하네."
동물들이나 애완동물에 대한 우리 태도를 묻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동물들은 우리 형제들입니다. 우리 곁에서 성장하는 지구상의 다른 종족입니다. 동물들은 열등하지 않으며, 형태가 다른 자아들입니다. ... 우리는 이 창조물들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약탈하고 우리에 가둡니다. ... 우리는 어떤 동물은 친구로 만들고, 다른 동물들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스코트는 '동물들을 존중하라. 동물들이 자유롭게 달리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가 왜 아이를 갖지 않았는지, 가졌다면 우리의 조화로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지 질문을 받았다.
나는 보통 그 무렵(50년 전)에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남자와 사는 것은 매우 부도덕한 일이었으며, 사생아 신분의 어린 자녀들은 사랑하는 내 부모님을 몹시 괴롭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인습에 어긋나는 내 행동을 묵묵히 참아왔다. 나는 스코트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도 충만한 삶이어서 부족함이나 완전하지 못함이 없었다. 아이가 없어도 흥미로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것을 더욱 완전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우리는 아이를 가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스코트와 약속했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젊은이들로 둘러싸였다. 청년들 수천 명이 해마다 뉴잉글랜드에 있는 농장으로 우리들을 찾아왔다. 어떤이들은 가까운 곳에 살면서 우리와 같이 일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냥 들러서 함께 얘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편지로 자기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고 또 삶이 바뀌었는지 들려주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삶에 관한 우리 책을 읽고 많든 적든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많은 아이들을 가졌던 것이다. 이 밖에,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여, 즉 새로운 인구를 더하지 않음으로써 인구증가를 늦추었을 수도 있다.
<206쪽>
오랫동안 스코트와 나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큰 기대를 가졌는데, 이제 스코트가 삶의 마지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얘기하고 책을 읽었다. ......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 왔다. 그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 스코트는 자신의 죽음이 점쟎고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평온하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이는 궁극적인 경험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롱하거나 의식이 없는 채로 가는 대신 죽음을 음미하고 심지어 즐기고자 했다.
1862년 소로의 누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빠가 오랫동안 앓고 있을 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평이나 우리와 함께 남아있으려고 하는 소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완벽한 만족감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숨이 점점 약해졌고, 아무런 저항없이 오빠는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213쪽>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은 1980년(스코트의 나이 97세), 국제 채식주의자회의에 참석하러 인도에 간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한 번, 메인의 바우뒨대학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 그이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강연을 했다. 한 청중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스코트씨가 나이 아흔여덟에 보여준 힘과 내면의 정열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그이의 강연기술이 마치 절정기에 이른 것처럼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먹을거리들을 기르고 나무를 자르며, 글을 쓰고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계속했다.
<216쪽> 죽음은 병든 사람이 회복하는 것같이, 병을 앓고난 후에 정원으로 나가는 것같이 오늘 내 앞에 있다. 죽음은 여러 해 동안 갇혀있는 사람이 간절히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오늘 내 앞에 있다. 죽음은 칼과 방패로 상처입은 사람에게 의사가 약을 발라 치료하듯이 오늘 내 앞에 있다. - [이집트 사자의 서The Egyptian book of the Dead] 中
탄생과 죽음은 우리 지식의 한계를 표현하려고 지은 말이다. 한 친구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우리에게 썼다. "죽음은 단지 지평선입니다. 지평선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스코트가 새 지평선을 찾기위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느꼈고, 그가 좋아하는 우화를 떠올렸다.
「나는 바닷가에 서 있다. 내쪽에 있는 배가 산들바람에 흰 돛을 펼치고 푸른바다로 나아간다. 그 배는 아름다움과 힘의 상징이다. 나는 서서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배가 마침내 한조각 구름이 될 때까지 바라본다. 저기다. 배가 가버렸다. 그러나 내쪽의 누군가가 말한다. '어디로 갔지?'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이다. 배는 우리쪽을 떠나갔을 때의 돛대, 선체, 크기 그대로이다. 목적지까지 온전하게 짐을 싣고 항해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가 작아진 것은 우리 때문이지, 배가 그런 것이 아니다. '저기 봐! 배가 사라졌다!'고 당신이 외치는 바로 그 순간, '저기 봐! 배가 나타났다!' 하며 다른 쪽에서는 기쁜 탄성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삶에 있었던 큰 사랑과 떠남을 생각했다. 두 번의 빛나는 순간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플로리다의 병원에서 운명하고 있을 때, 어머니와 내가 같이 병실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돌아와, 문간에 서 있는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 이라며 행복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우리 모녀에게 두고두고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스코트가 메인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동안 집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한 마디 말이 내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그 사람이 숭배해 온 톨스토이와 간디 말고,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헬렌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은 이렇게 썼다. "헬렌은 젊은 처녀처럼 행복한 탄성을 지르며 방을 가로질러 달려와 그 극적인 찬사에 대해 그를 껴안고 키스했다. 스코트는 흐뭇한 얼굴로 헬렌에게 잔잔한 웃음을 보냈다."
<224쪽> "죽음을 슬퍼하고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사람이 불멸이라는 생생한 사실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육체가 영혼을 가졌는가. 아니다. 영혼이 육체를 가진 것이다. 영혼은 육체가 제 할일을 다 했음을 잘 알고, 아주 엄격하게 그것을 한쪽으로 비껴놓은 뒤 얼룩이 묻은 옷처럼 벗어버린다." - 루시엔 프라이스 '영혼의 기도' 1924
<228쪽>
그이의 100세 생일 한달 전 어느날, 테이블에 여러사람과 앉아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한 달 동안 그가 뭔가 마실 것을 원할 때 사과, 오렌지, 바나나, 포도같이 그가 삼킬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주스를 만들어 먹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물만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병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이 말짱했고, 나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몸은 수분이 빠져나가 이제 시들어가고 있었고,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나는 침상에 같이 있으면서 조용히 그이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반쯤 소리내어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구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이 당신과 함께 가요.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잘 있어요."
천천히 천천히 그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나무의 마른잎이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좋~아" 하며 숨을 쉬고나서 갔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238쪽> ......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진실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사는 데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일에서도 그렇게 진실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 그는 이상주의자였으나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 어떤 종교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 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은둔자로서 행복해 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의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음악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데는 무디었지만, 언제나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내 뒤에 있었다. 학문적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감각을 가졌다.
그는 위대하고 포용력이 있는 영혼이었다. 그런 사람과 반세기동안 함께 산 것은 참으로 좋은 삶이었다. 우리는 경험과 느낌의 풍요로움을 공유했으며, 그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단순한 삶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해갔다. 나는 하늘에 있는 우체통에 부치게 될, 그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그이가 죽은 뒤에 썼다.
스코트 니어링만큼 복 많은 남자도 드물 것이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남편자랑'을 들어봤지만, 그 중에 헬렌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ㅋ 세상에 자기 자서전을 남편의 평전으로 대신하는 사람, 자기 남편에 대해 이렇게나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찬사로 책 한권을 채울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스코트 니어링의 자서전에는 헬렌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 쥐꼬리만큼 나온다. 에휴~). 스코트가 너무나 좋아서, 그가 하려는 일이 너무 가치있다고 확신하여 자신의 삶을 몽땅 투자?한 사람, 홀로 외로이 남겨진 노년에 '아이는 다음 생에 만나서 낳기로 했다'고 말하는 사랑스러운 분...의 책을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이 책을 읽던 당시의 나는, 헬렌이 환생, 신지학회, 애니 베산트, 수맥찾기, 강신술, 위저보드...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는데, 좀 자만했던 것 같다.ㅋ 오늘 이 책에 리처드 바크의 [Reluctant Messiah]가 인용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책을 몇년 전에[기계공 시모다]라는 제목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