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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7. 22:19 책에서 발췌

원제: M. K. Gandhi Interprets THE BHAGAVADGITA /1991

 

 

제1장과 제2장 中

<5쪽>

[기타]는 사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두 본성,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세대에 걸쳐 [기타]의 중요한 언어들은 새롭고 더욱 깊은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10쪽>  
나는 도움을 받지않고 [기타]를 읽어낼 만큼 산스크리트Sanskrit에 능통하지 못했다. 두 영국인 친구는 당연히 산스크리트에 까막눈이었다. 그들은 에드윈 아놀드 경의 훌륭한 번역판을 가져왔다. 나는 곧장 전체를 읽어보았고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 줄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열아홉 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있다. 거기에는 최고의 지식이 구현되어 있다. 그 19줄에 담겨있는 원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이 번뜩인다. 아니 그 자체가 높은 목적을 위하여 단련된 지성이다. 그 속에 담겨있는 지식은 경험의 결실이다.  ...중략...   [기타]의 다른 부분에 이 19줄의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15쪽>  
[기타]의 주제는 단순히 브라만Brahman의 체현과 그 방법들이다. 싸움은 다만 그 가르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략... 나는 두료다나와 그의 측근들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적satanic 충동을 드러내 보여주고, 아르주나와 그의 지지자들은 신적Godward 충동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마당은 우리의 몸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경험으로 알고있는 시인-선지자가 우리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투쟁을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 누구든지 남을 두려워하고, 재산을 쌓아두거나, 육체의 쾌락에 빠져든 사람은 틀림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싸울 것이다. ...... 우리의 이성을 훼방하는 이 세상에 폭력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기타]는 우리를 그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달아날 준비가 되어있는 자는 차라리 죽이거나 죽는 게 나을 것이다. 

<24쪽> 
악은 어떤 선이 한편이 되어줄 때 비로소 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대변하는 악한 체제는 선한 민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지탱된다. 만일 그 지지가 철수된다면 악한 체계는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 비협조non-cooperation 투쟁을 밑받침하는 원리였다. 정부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선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듯이 두료다나는 자기쪽에 정의가 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비슈마와 드로나같은 선한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27쪽>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2장 22)" 아르주나는 싸워야 하느냐 여부를 묻고있는 게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싸워도 좋다는 허락을 유디슈티라(판다바家의 맏이)에게 받아내었고 인드라한테서는 튼튼한 무기를 얻었다. 만일 그가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면 싸움이 있기 전날에 그렇다고 크리슈나에게 말했으리라. 그랬을 경우에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두료다나에게 가서 그를 싸워 이기라고 말해줬을 것이다. 그는 비라트왕이 두료다나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싸웠다. 그는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은 누구를 상대로 싸울 것인가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38쪽>  
아르주나가 스리 크리슈나에게 물은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가 아니다. 그의 질문은, 사람이 자기의 친척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였다. 이 질문은 편견의 산물이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자기의 피붙이이자 사람들한테서 존경받고 있는 비슈마와 드로나다. 어떻게 그들을 죽인단 말인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구를 죽일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자에게 우리의 상식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43쪽>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밧줄을 뱀으로 보아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45쪽> 
세월과 함께 판다바도 카우라바도 잊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잊혀진다 해도 지금 우리 가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타]다. 크리슈나는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의 수레를 몰고있는 '아트만'이다. 우리는 수레의 고삐를 그에게 넘겨줄 때만 승리할 수 있다. 신은 꼭두각시 연극의 연출가처럼 우리를 춤추게 한다. 

[기타]는 우리를 편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정신적 문제를 만날 때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러고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 크리슈나가 열여덟 장에 걸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이다. 

<81쪽> 
스리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너는 나의 팔이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다."  

<84쪽> 
우리가 한다는 짓이 기껏해야 샤이크칠리(공상가)처럼 환영幻影에 빠져 헤매는 것이라면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라는 돌들로 포장되어 있다.  

<107쪽> 
[바가바드기타]는 여자들과 바이샤와 수드라와 모든 계급의 사람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건강하고 기름졌든 마르고 야위었든 상관없이, 마음만 강하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단단하게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감각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사티아그라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115쪽>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는 '슈니아타shunyata(無, 空)'를 뜻한다. 그러나 [기타]의 니르바나는 평화를 뜻한다. 그래서 '브라마-니르바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차이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니르바나와 [기타]의 니르바나가 가리키고 있는 상태는 같은 것이다. 상당수의 학식있는 사람들이, 부처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교리를 가르친 바 없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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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예찬하는 19줄(2장 54~72)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오, 크리슈나여, 

안정된 지혜를 지니고 초의식 상태에 잠긴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나이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나이까?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라 부를 수 있도다.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이 나타나든 악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려 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현자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로다.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있는 대상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에게는 밤중이로다. 

갈망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도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오, 파르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하는 자의 상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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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부분(2장 11~30) 

그대는 제법 지혜로운 말을 했으되, 
슬퍼할 것 없는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산 것들을 위해서도 죽은 것들을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느니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란 없으며,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니라. 

 

바로 이 몸에서, 
몸을 입은 이(영혼)가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거치듯이 
그렇게 또 다른 몸으로 들어가거니와, 
그런 까닭에 바탕이 굳은 자는 슬퍼하지 않느니라.  

 

오, 카운테야여,  
감각이 대상에 닿으매 
거기서 차가움과 뜨거움,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고가며 잠깐 머무느니라. 
그것들을 참아 견디어라. 오, 바라타여.  

오, 지극히 고상한 사람이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지럽거나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 
그 사람만이 영생불멸에 이를 수 있느니라.


비존재는 결코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느니,  
진리를 보는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 둘의 비밀은 보여졌도다.

 

불멸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번창하고 있음을 알지어다. 
그 누구도 저 불변하는 존재 자체를 파멸시킬 수 없느니라. 


영원하고 불멸하며  
측량할 수 없는 분의 체현인 이 육신들은 유한(有限) 하도다.  
그런즉, 싸워라, 오, 바라타여. 


이것(아트만)을 살해자로 생각하는 자와  
이것이 살해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둘 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로다.  
이것은 죽이지도 않으며 죽임을 당하지도 않느니라. 

 

이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도다.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니라. 
태어나지 않고 영원하고 영속하며 오랜 것. 
육신이 죽게 될 때도 이것은 죽지 않는도다.  

오, 파르타여,  
멸망하지 않고 영원하며 태어나지도 않았고  
불변하는 이것(아트만)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를 어떻게 죽이거나 죽게끔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몸을 입은 사람도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느니라.  

이것은 무기가 상처입히지 못하고,  
이것은 불이 태우지 못하고,  
이것은 물이 적시지 못하고,  
이것은 바람이 말리지 못하느니라. 

 

모든 자름과 태움과 적심과 말림 그 너머에,  
영원하고 모든 것에 충만하고 안정되고  
움직여지지 않고 영속하는 이것이 있느니라.  

감각으로도 잡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잡을 수 없도다. 
이것을 일컬어 불변한다고 하느니, 
그런즉 이러한 그것을 안다면 그대는 비탄에 빠지지 않으리.  

이것(아트만)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오, 마하바후여, 
그대는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나느니,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을 뉘우쳐서는 안되느니라.

 

모든 존재의  
태어나기 전 상태는 명백하지 않고,  
중간상태는 명백하고,  
죽은 뒤의 상태는 다시 명백하지 않느니라. 
오, 바라타여, 슬퍼하며 울 까닭이 무엇이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신기하다고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신기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신기하다는 말을 듣거니와,  
그러나 이것을 듣는다 해도 
이것을 참으로 아는 자는 아무도 없도다.

 

모든 존재의 몸 안에서 
몸을 입은 이것은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나니,

오, 바라타여, 
그러한 즉 그대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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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의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게는 이 책에 부록으로 실린 게 제일 좋았다. 용비어천가 같은 옛스러운 말투에, 원문에 충실한 듯한 긴 문장이 마음에 든다.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근사한 전차에 아르주나가 신과 함께 올라타 있는 수많은 미술작품의 위용과는 달리, [바가바드기타]에 실제 전투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제1장 첫줄부터 곧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고하며 독자를 긴장시키지만, 제18편 막줄에 이르러도 전쟁은 시작되지 않는다. 크리슈나 신은, 절망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아르주나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는다. 전쟁을 말리지도 않고, 승리를 위해 힘을 보태지도 않고, 싸움을 회피할 요령도 일러주지 않는다. 콜로세움의 관객처럼 임전무퇴를 종용할 뿐이다. 다만 아르주나를 위해 개인지도(간디는 '토론'이라고 말하는)를 시작한다.

 

크리슈나는 '전쟁같은 삶'에서 좌절한 한 인간에게 '선택을 했으면 피하지 말고 뛰어들라'고 격려하면서, 귀중한 [요가 매뉴얼]을 손에 쥐어주는 것 같다. 그것도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일개 '마부'로 현신現身하여, 야훼보다 열 배는 자상한 방식으로!

 

 

"참자아를 기수로, 육체를 마차로, 지성을 마부로, 마음을 고삐로, 감각을 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말이 잘 훈련되어 있고, 고삐가 튼튼하고, 마부의 손에 잘 맞으면, 그는 본연의 상태라는 목적지, 곧 온 우주에 편만한 신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 스와미 비베카난다

 

posted by mooncle
2020. 2. 25. 23:04 책에서 발췌

BIOCENTRISM/2009

 

 

 

 

<36쪽>

제3장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실제 세계가 어떤 지각 행위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는 물리학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제가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아인슈타인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아무도 없어도 소리는 나는 것일까?”
여러분은 아마도 이 오래된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거나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친구나 가족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단호한 대답을 듣게 된다.
"당연히 소리가 나죠.”
얼마 전 한 사람은 고민해볼 가치도 없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며 불쾌한 표정을 내게 보였다.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현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우리와 무관하게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물인 나는 우주 속에서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성서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서구 세계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사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발생하는 소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또는 고민하기 위한 충분한 과학적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소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되는 것일까? 초등학교 고학년 과학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기 힘든 독자를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리는 매질의 교란에 의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매질은 공기다. 또는 물이나 쇠처럼 공기보나 밀도가 높은 물질이 매질일 경우, 소리는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공기는 빠르게 진동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공기가 초당 5~30회로 진동할 때, 그늘의 민감한 피부는 분명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나무가 쓰러질 때 우리가 실질적으로 감지하는 대상은 공기의 진동이다. 이는 시속 1,200킬로미터의 속도로 주변 공기를 매질삼아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기의 균일한 밀도가 깨졌다가 복원된다. 과학적 설명에 따르면, 크고 작은 공기압의 변화는 두뇌와 귀로 이뤄진 청각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지속된다. 이 변화는 작은 바람이 빠르게 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소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무가 쓰러지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누군가 근처에 있다면 공기 파동이 물리적으로 고막을 진동시킨다. 그런데 두뇌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초당 20~20,000회 진동해야 한다(나이가 마흔이 넘을 경우, 상한선은 10,000회 정도로 낮아지며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러운 콘서트 장에서 젊음을 보낸 경우는 더 낮아진다). 물론 초당 15회 진동하는 파동과 30회 진동하는 파동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후자는 들을 수 있지만 전자는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뇌 신경계가 설계된 방식 때문이다. 고막의 진동으로부터 자극을 얻은 뉴런은 전기 신호를 두뇌로 송출하고, 그러면 두뇌는 그 신호를 소리로 해석한다. 이 전체 과정은 분명하게도 공생적(symbiotic) 경험이다.

공기 파동은 그 자체로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1초에 15회 진동하는 파동은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듣지 못하고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청각시스템은 특정 범위의 주파수만 인식하도록 설계됐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청각적 경험에서 관찰자의 귀와 두뇌는 공기 파동만큼 필수적인 요소다. 바로 이러한 형태로 우리의 의식은 외부 세상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것은 적막한 공기의 파동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아무도 없어도 나무는 쓰러지면서 소리를 내지."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무도 없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는 자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도 없는 숲 한가운데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촛불이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비록 권장할 만한 실험 조건은 아니지만, 스모키 베어(Smokey the Bear, 미국 산림청의 산불방지 홍보용 회색 곰-옮긴이)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화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고 해두자, 여기서 아무도 촛불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도 불꽃은 여전히 밝은 주황색을 발하는 것일까?

양자 실험의 결과를 부인하고 관찰자가 없어도 전자를 비롯한 모든 입자가 구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가정해도(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자), 촛불의 실체는 결국 뜨거운 가스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광원과 마찬가지로 광자 또는 전자기 에너지 파동을 방출한다. 이들 모두 전기적 자기적 파동으로 이뤄져 있다. 전기와 자기의 순간적인 출현이야말로 빛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전기파나 자기파 자체로 어떤 시각적 특성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촛불 그 자체로 주황색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촛불이 방출한 전자파가 우리의 망막에 도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때 400~700나노미터(nanometer, 10억분의 1미터)에 해당하는 파장이 망막에 분포한 800만 개의 원추세포에 자극을 전달한다. 그러면 원추세포는 다시 이웃한 뉴런에 신호를 전하고, 그 신호는 시속 400킬로미터 속도로 따뜻하고 축축한 후두부에 도달한다. 그곳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뉴런들이 자극을 받아 발화하고,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친숙한 '외부 세상' 속에서 주황색 불꽃을 경험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동일한 자극에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가령 다른 생명체는 같은 촛불을 회색, 불꽃으로 본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황색이 애초에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적 자기적 파동의 흐름이다. 주황색 불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시각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인식과 사물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는다.

무엇인가 만질 때는 어떨까? 쓰러진 나무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면 딱딱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딱딱함 역시 두뇌 속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에 투영된 감각이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딱딱함이라는 감촉은 실제로 딱딱한 물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모든 원자의 외부 껍질에 존재하는 음전하를 띤 전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동일한 극성을 띤 전하는 서로 밀어낸다. 나무껍질을 이루는 원자의 전자는 손가락을 이루는 원자의 전자를 밀어내고, 이러한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우리는 나무껍질이 딱딱하다고 느낀다. 엄밀하게 말해서 손가락이 나무껍질과 접촉함으로써 딱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을 이루는 원자의 대부분은 거대한 미식축구 경기장 50야드 라인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텅 비어 있다. 딱딱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에너지장이 아니라 정말로 딱딱한 물질이라면, 우리의 손가락은 안개를 휘젓듯 나무 속을 쉽게 관통할 것이다.

 

좀 더 직관적인 사례로 무지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산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무지개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식 주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

 

여기서도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무지개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무지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태양과 물방울 그리고 적절한 위치에 있는 관찰자의 눈(또는 대체물인 카메라)이 그것이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 빛은 40~42도의 각도로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개를 보려면 굴절된 빛이 도달하는 범위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또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사람은 서로 다른 무지개를 본다. 다른 사람이 보는 무지개는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리고 반사하는 물방울의 크기가 클수록 색상은 선명해지고 파란색 띠는 좁아진다.

잔디밭 스프링클러처럼 물방울이 아주 가까이 있을 때에는 무지개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무지개는 오직 우리 자신만이 볼 수 있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관찰자가 없다면? 당연히 무지개도 없다. 무지개의 기하학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눈과 두뇌로 이뤄진 시각 시스템(또는 카메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지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과 물방울만큼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찰자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관찰자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면 무지개 역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우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지개의 이와 같은 주관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동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동화 속 무지개는 뚜렷하게 존재하는 실체다. 이와 똑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고층빌딩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관찰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생물중심주의의 첫 번째 원칙에 도달했다.
생물중심주의 제1원칙 ▶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의식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posted by mooncle
2020. 1. 5. 16:01 책에서 발췌

(My Stroke of Insight, 2006)

한국어판은 2018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

 

 

 

<8쪽>

뇌해부학자로서 하는 말인데, 나는 뇌졸중을 겪으면서 뇌와 그 작용에 대해 대학에서 배운 것 만큼이나 많이 배웠다. 그날 아침, 나는 내가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나는 인간이 어떻게 '신비한' 혹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지를 뇌의 해부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4쪽>

내가 나의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그저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 듯 했다. 기억의 테이프를 되돌리듯 나자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난간을 부여잡은 손가락들이 원시동물의 발톱처럼 보였다.  ...중략...  기분이 묘했다. 마치 내 의식이 현실과 비밀스러운 공간 사이의 어딘가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이날 아침 세타빌Thetaville(저자가 만든 단어. 잠들기 직전 또는 잠깨기 직전의 얕은 꿈을 뜻하는 것 같음) 상태에 있을 때와도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깨어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몽롱한 의식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26쪽>

다리를 들어올려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벽을 짚었다. 혹시라도 넘어질까봐 뇌 스스로 맨아래 서로 반대되는 근육들을 세밀하게 조정하고 있는 몸속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신체의 이런 자동반응은 어떤 지적인 능력으로 파악한 게 아니었다. 뇌와 몸에 있는 50조 개에 달하는 세포들이 내 신체를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호흡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순간적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오묘하게 설계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관절 하나하나의 각도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는 신경계의 자율기능을 경외에 차서 바라보았다...중략...  주변에 대해 정보를 주던 뇌의 쉼없는 재잘거림도 더이상 예측가능하고 친숙한 흐름이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우리의 뇌는 좌뇌의 언어중추를 통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나는 이런 현상을 '뇌의 재잘거림brain chatter'이라 부른다.) 이제 내 언어적 사고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침묵에 의해 수시로 뚝뚝 끊겼다.

 

아파트 창문 너머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도시의 소음을 포함하여 내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자극에 대한 감각들이 희미해졌다. 정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진 것이다. 뇌의 재잘거림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낯선 고립감이 밀려왔다.  ...중략...  집중하려고 애쓸수록 생각들이 휙휙 지나가 버렸다. 내게 필요한 대답과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서서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내 삶과 나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끊임없는 뇌의 재잘거림이 잦아들자 그 자리에 평온한 행복감이 밀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고차원적인 인지능력과 일상과 관련된 세세한 부분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자 내 의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전지의 수준으로 도약한 것 같았다. 마치 우주와 '하나가 된' 듯 했다.

 

이 무렵 나는 주위를 둘러싼 3차원의 물리적 현실과 거의 연결이 끊긴 상태였다. 욕실 벽에 몸을 기대고 섰는데, 내 몸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경계를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의 구성성분이 고형의 덩어리가 아니라 액체인 듯 했다. 더이상 나를 독자적인 대상으로 지각할 수 없었다. 손가락들을 맘대로 섬세하게 조종할 수도 없었다.  ...중략...   

 

외상을 입은 뇌에 구멍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무척이나 매혹적인 경험이었음을 여기서 밝혀두고자 한다. 한때 중요해 보였던 세상사가 이제는 보잘것 없게 여겨졌다. 그 보잘것 없는 세상의 일에 나를 얽어매던 재잘거림이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 신경의 초점을 내부로 돌린 나는 신체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 개의 똑똑한 세포들이 힘을 합쳐서 열심히 일하며 내는 규칙적인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가 뇌 사이로 흘러들자 내 의식이 서서히 속도를 줄여 거대하고 멋진 세상을 품 안에 끌어안으며 차분하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내 물리적 존재를 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작은 세포들이 매순간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느꼈다. 그 사실 자체에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겸허한 마음이 찾아왔다. 

 

살아서 움직이는 조직들로 복잡하게 구성된 내 몸과 처음으로 일체감을 느꼈다. 내가 지성적 능력을 지닌 수많은 세포들로 가득찬 존재임을 깨닫게 되자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사라지지 않는 혹독한 머리 통증은 힘겨웠지만, 나는 정상적인 지각을 넘어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의식이 평온한 상태로 빠져들자 마치 하늘나라에 온 것만 같았다.  ...중략...   

 

연구소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오른쪽 팔이 마비가 되어 옆으로 풀썩 떨어지며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알았다. '맙소사, 뇌졸중이야!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아, 이거 멋진데!' 일시적으로 황홀한 마비상태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 복잡한 뇌의 작용을 예기치 않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실은 다 생리적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의 뇌기능을 연구하고 그것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진 과학자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인간의 뇌가 현실을 인지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놀라운 통찰을 안겨주는 뇌졸중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오른쪽 팔이 마비된 순간 팔다리에 있던 생명력이 빠져나갔다. 팔이 맥없이 떨어지며 몸통을 쳤다. 평생 그렇게 기묘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팔이 털썩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중략...     

 

세포들의 거대한 덩어리인 내 몸은 그저 멋진 임시거처인 셈이었다. 이 놀라운 뇌는 매순간 말그대로 수십, 수백조 개의 엄청난 자료들을 통합해, 매끈하고 사실적이며 안전해 보이는 3차원 지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내 형태를 만들어낸 생물적 모체의 효율성이 나를 감탄시켰고, 설계의 단순함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외부세계에서 흘러드는 잡다한 감각들을 통합할 수 있는 수많은 세포들의 집합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현실을 지각할 수 있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몸, 이 상태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어떻게 지금껏 내가 그저 방문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40쪽>

출혈이 왼쪽 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자 정보를 분류하고 세부문제에 집착하는 나의 지각도 자유로워졌다. 좌뇌를 지배하는 신경섬유들의 기능이 멈추면서 더 이상 우뇌를 억제하지 않았고, 내 의식은 세타빌 상태와 놀랄 정도로 흡사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불교도들이라면 아마도 열반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좌뇌의 분석적 판단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평온과 안락, 축복과 행복, 충만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그러면서 내 일부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신체의 결박에서 완전히 풀려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런 끈질긴 유혹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무언가는 도움을 청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 한순간 또렷하게 생각했다가(나는 이를 '명료한 물결'이라 부른다) 다음 순간 전혀 생각이 나지않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삶과의 연결끈이 끊어지자 불안했지만, 한편으로 인지능력이 체계적으로 무너져내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65쪽>

뇌졸중이 일어났던 날을 되돌리자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좌뇌의 정위연합 영역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자 신체 경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피부 끝까지 미치지 못했다. 마치 호리병에서 풀려난 지니가 된 기분이었다. 나의 정신에너지는 행복이 넘치는 침묵의 바다를 거대한 고래처럼 유유히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신체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몸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67쪽>

나는 37년 평생동안 많은 것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해치우는 데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다가 이 특별한 날에 그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게 된 것이었다. 좌뇌와 언어중추를 잃었을 때, 시간을 연속적인 짧은 순간들로 나누는 시계도 사라졌다. 순간들이 정확하게 매듭지어지는 대신 열린 결말로 다가왔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서둘러 밀어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거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빈둥거리듯, 좌뇌의 '행하는' 의식을, 우뇌의 '존재하는' 의식으로 바꾸었다. 아주 사소하고 늘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던 내가 이제 거대한 존재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어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새로운 관점으로 현재의 일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담당세포들이 망가져서 과거와 미래에 관련된 일들을 숙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이 순간 뿐이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중략... 이런 제약에서 풀려나자 나의 우뇌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eternal flow에 몸을 맡기며 즐거워했다. 내 영혼은 우주만큼이나 거대했고, 드넓은 바다에서 흥겹게 장난치며 놀았다.  ...중략... 꼭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동안 나는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우리와 세상의 관계가 신경회로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더없이 홀가분해졌다. 내가 살아온 시간동안 나는 내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던 것이다!

 

 

<86쪽>

회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쉽지않은 인지적 결단이었다.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더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누군들 안그랬겠는가? 그곳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자유롭고 거대하고 평화롭게 빛났다. 나를 집어삼킨 희열에 빠져 회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했다. 좌뇌가 제대로 기능하게 된다면 분명 이로운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외부세계와 다시 상호작용할 수 있을 터였다... 과연 회복이 그렇게 중요할까? ......솔직히 예전보다 더 좋아진 점도 있었다. 회복이라는 미명 하에 새롭게 얻은 통찰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나자신이 유동체여서 좋았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황홀했다. 에너지의 역동성과 보디랭귀지에 주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존재의 중심으로 흘러드는 깊은 내적 평화의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차분하게 나의 평온한 마음을 존중해주는 세상에 있고 싶었다. 감정을 읽는 능력이 고양되자 다른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극도로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 회복이라는 것이 그들처럼 항상 스트레스를 느끼는 삶을 의미한다면 회복하고 싶지 않았다. 관찰하되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내 일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의 일과 감정으로부터 분리하는 편이 더 쉬운 일로 여겨졌다. 심리치료사 매리앤 윌리엄슨이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내가 또다시 쥐가 되지 않고도 쥐들의 경쟁에 다시 뛰어들 수는 없을까?"

 

 

<91쪽>

늦은 밤 스티브가 찾아와 어머니가 다음날 아침일찍 보스턴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라는 개념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그날 밤 깨어있는 내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라고 반복하며 조각을 짜 맞추려고 노력했다. 기억하기 위해서 단어를 계속 반복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가 온다니 흥분되었다.  ...중략...  

 

 

<129쪽>

의사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뇌졸중이 일어나고 6개월 안에 능력을 되찾지 못하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내 경우에는 뇌졸중 이후로 8년동안 뇌의 학습 및 기능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8년이 지났을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뇌는 외부자극을 기반으로 세포의 연결구조를 바꾸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이런 뇌의 '가소성'이 잃어버린 기능을 되찾게 하는 기본적인 힘이 된다. 

 

나는 뇌가 꼬마들이 여럿 뛰어노는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놀이터를 보면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고, 정글짐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아이들도 보인다. 모래로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다. 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일들을 하고 있다. 뇌의 서로 다른 세포집단처럼 말이다. 정글짐을 없앤다고 거기서 놀던 아이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아이들과 섞여 또다른 놀이를 계속한다. 뉴런도 마찬가지다.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뉴런의 기능을 지우면, 이 세포들은 자극이 없어서 죽거나 다른 할일을 찾는다. 가령 시각의 경우, 한쪽 눈에 안대를 씌워 시각피질세포로 들어오는 자극을 막으면 이 세포들은 인접세포들과 접촉하여 다른 할 일이 없는지 알아본다.

 


<153쪽> 
4년차에 내 뇌는 여러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냈다. 가령 파스타를 끓이면서 전화를 받았다......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능력은 수학적 사고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뇌졸중을 겪고 4년째에 접어들자 뇌가 덧셈에 다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6개월 정도 더 지나자 뺄셈과 곱셈이 가능해졌다. 나눗셈은 5년차가 될 때까지도 힘들었다. 5년차가 끝날 무렵에는 발을 놓을 착지 지점을 보지 않고도 해변의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뛰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항상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했던 나로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6년차의 최고 성과는 한번에 계단 두개를 오르겠다는 꿈을 이룬 것이었다......

2년차부터 파트타임으로 하버드 뇌조직 자원센터의 노래하는 과학자로서 여행을 다녔다. 7년차에는 인디애나 대학의 운동학과에서 겸임교수 자리를 맡았다. 7년차에는 밤 수면시간을 11시간에서 9시간 반까지 줄였다. 이때까지 나는 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 말고 낮잠도 즐겨 잤다...... 8년차에 마침내 내 몸에 대한 자각이 유동체에서 고체로 돌아왔다. 내 몸을 다시 견고한 고체로 자각하게 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 자신이 유동체로 지각되던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던 때를 떠올리자 가슴이 뭉클했다. 


<179쪽>
나는 책임감이란 '특정순간 감각계로 들어오는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영어로 책임감을 뜻하는 responsibility는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다).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변연계(감정)프로그램도 있는데, 하나의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었다가 완전히 멈추는데 90초 정도가 걸린다. 가령 분노라는 감정은 자동적으로 유발되도록 설계된 반응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뇌가 분비한 화학물질이 몸에 차오르고, 우리는 생리적 반응을 겪게 된다. 최초의 자극이 있고 90초 안에 분노를 구성하는 화학성분이 혈류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면, 우리의 자동반응은 끝이 난다. 그런데 90초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면, 그것은 그 회로가 계속해서 돌도록 스스로 의식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신경회로에 다시 접속할지, 아니면 '감정'을 스쳐지나가는 단순한 생리현상으로 사라지게 할지 선택하는 것이다.  ...중략...  요즘 나는 나의 뇌에 매료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에 관해 생각하며 보낸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고통을 안겨주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은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220쪽>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면 스스로 변해야 한다.'   - 간디

 

 

<231쪽> 
변연계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감정을 싣는 역할을 한다. 다른 생물들도 이 구조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연계를 가리켜 '포유류의 뇌' 혹은 '감정의 뇌'라고 부른다. 우리가 갓난아이일 때 이 세포들이 감각자극에 반응하면서 배선이 이루어진다. 변연계가 평생동안 기능은 하지만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감정 '버튼'이 눌릴 때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은 성인이 되어서도 두 살 때와 같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