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바꿔 [능엄경] 속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아난다의 대화를 대중들에게 설하기 시작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아난다는 대답했다.
"종에서 납니다."
"그럼 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종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흠... 그럼, 아무리 종소리가 났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래도 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다가 마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 허공 가운데서 종소리가 나는구나!"
"예, 진짜 빈(空) 가운데서 묘한 작용이 일고 있습니다."
<120쪽>
"나에게 일생은 땅 밑의 뿌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식물처럼 보였다. 우리들이 보고있는 것은 꽃이며,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나의 일생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사건은 불멸의 세계가 순간의 세계 속으로 침입한 일이다" - 칼 구스타프 융
<130쪽>
정신분석을 창시한 사람은 프로이트였고 그래서 청고스님도 처음에는 그의 저술을 즐겨 읽었다. 프로이트는 수면 아래 잠긴 빙산처럼 의식에 가려진 무의식을 발견했고, 그 무의식에 의한 폐해가 크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만으로도 놀라운 학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무의식을 밝혀가는 과정, 정신병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은 너무나 작위적이었다. 청고스님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너무 성적인 부분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봤던 것이다. 세상살이는 성문제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심리적 기제를 사람 간의 권력관계로 파악한 아들러의 이론도 단순명료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허술해 보였다. 다양한 정신분석이론 중 청고스님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어보였던 것은 다름아닌 칼 구스타프 융의 사상이었다. 청고스님은 그의 집단무의식 이론에 매혹되었다. 나중에 출가한 후 불경을 공부하다가 집단무의식이 유식학唯識學과 제법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융의 이론은 어느 부분 불교사상과 상통합니다. 특히 집단무의식의 개념은 심리적 기제를 개체에서만 찾지않고, 계통발생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유식학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융은 원형archetype이 영구히 의식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원형은 본능적인 것으로 항상 의식 아래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죠.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짓는 모든 업業까지 저장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개념보다는 융이 주장한 원형을 둘러싼 콤플렉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식학에서는 삼성三性, 즉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중시합니다. 변계소집성이란 인간은 분별에 의해 사물을 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타기성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원성실성이란 인식과 대상의 구별이 없는 진여眞如의 세계를 말합니다. 유식학의 삼성은 고스란히 융의 이론인 '개성화의 과정'과 일치합니다. 개성화의 과정이란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융의 저서 [아이온aion]에 등장하는 아이온은 서양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융은 아이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미트라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으로서 온갖 것을 창조하고 파괴합니다. 아이온은 뱀의 몸을 하고있지만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자리는 태양을 상징하지만 뱀은 겨울 혹은 우기雨期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아이온은 상반되는 것, 즉 빛과 어둠, 창조와 파괴의 어울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이온이 갖고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열쇠입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산스크리트어 알라야 비즈냐나(आलयविज्ञान ālaya vijñāna)를 음을 따라 표기한 것으로,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또는 간단히 제8식(第八識, eighth consciousness)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마음[心]은 6식(六識: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서는 마음에는 6식 외에 이보다 더 심층의 의식인 제7식인 말나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따라서 마음은 8식(八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위키백과>
위스콘신주 해먼드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월요일 승객들을 몇 명 태워주고 나서,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돈, 이런 삶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할게요. 하지만 아무리 멋진 시간에조차도 내가 결코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뭐냐면, 대관절 우리는 애초에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느냐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얘기 좀 해봐요."
우리는 문이 닫힌 철물점과 [내일을 향해 쏴라]를 상영 중인 영화관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인도에서 휙 돌아섰다.
"현금 갖고 있죠, 그렇죠?"
"현금이야 많죠. 그런데 왜요?"
"그럼 영화나 보죠."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낼 거죠?"
"난 별로 생각 없어요. 돈, 당신이나 보고 와요. 나는 먼저 비행기 있는 데로 돌아가 있을게요, 너무 오래 거기 세워놓는 게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도대체 갑자기 영화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일까?
"비행기는 괜찮아요. 영화나 보자고요."
"벌써 시작했는데요."
"그럼 중간부터 보면 되죠."
그는 벌써 자기 표를 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객석에서도 맨 뒤쪽 부근에 앉았다. 어둠 속 우리 주위에는 50명쯤 되는 관객이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를 잊어버리고, 영화 내용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영화야말로 고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을 것이다. 좋은 영화의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 극장 안에서의 시간은 소용돌이 치고 확장되었다. 나는 한동안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각 장면이 어떻게 고안되고, 그다음 장면과 맞아떨어지는지, 왜 이 장면이 나중에가 아닌 지금 나오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줄곧 그런 식으로 보려고 노력했지만, 점차 이야기에 빨려들면서 애초의 다짐을 잊고 있었다.
부치와 선댄스 두 주인공이 볼리비아 정부군에 안전히 포위된 장면, 그러니까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모다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마음속으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도, 제발 이 영화가 끝난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처드?"
"왜요"
"당신 왜 여기 들어와 있어요?"
"좋은 영화잖아요. 돈. 쉬잇"
부치와 선댄스는 온몸에 피를 흘리며 왜 자신들이 다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게 왜 좋은 영화에요?" 그가 물었다.
"재미 있잖아요. 쉬잇.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정신차려요. 깨어나라고요. 이건 모두 환상이에요."
나는 짜증이 일었다.
"돈, 이제 몇 분만 기다리면 영화도 끝나니까 그때 가서 얼마든지 더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은 영화 좀 보게 나 좀 내버려둬요. 알았어요?"
그는 열성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내게 속삭였다.
"리처드, 당신 여기 왜 들어와 있냐고요"
"이것 봐요. 내가 여기 들어와 있는 이유는 당신이 먼저 나한테 영화 보자고 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영화를 끝까지 보려고 했다.
"당신이 반드시 들어와야 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냥 됐다고만 하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고요."
"그거야 이 영화가 좋으니까 그랬죠......"
우리 앞줄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영화가 좋으니까 그랬다고요. 돈, 그래서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요?"
"잘못된 건 전혀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중고 트랙터 판매점을 지나서, 비행기들이 있는 들판 쪽을 향해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머지않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나는 극장에서 그가 한 이상한 행동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럼 당신은 뭐든지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그렇게 하나요, 돈?"
"가끔은요."
"그럼 왜 하필 영화였죠? 왜 난데없이 저 영화를 보자고 했던 거냐고요?"
"당신이 나한테 먼저 질문을 했잖아요."
"그랬죠. 하지만 당신은 대답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게 바로 내 대답이었어요.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간 건 당신이 질문을 했기 때문이었어요. 그 영화가 바로 당신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고요."
그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질문이 뭐였는데요?"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뒤따랐다.
"당신의 질문은 뭐냐면 말이죠, 리처드, 그건 바로 당신이 비록 아주 멋진 시간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를 알 수가 없더라는 거였어요."
나는 비로소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영화가 바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는 거죠?"
"맞아요"
"아."
"당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죠." 그가 말했다.
"그러네요."
"물론 좋은 영화이긴 했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영화들 역시 환상이에요. 안 그래요? 저 사진들은 심지어 움직이는 것조차도 아니에요. 그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불빛이 바뀜으로 해서 저 건너 어둠 속에 세워진 평평한 스크린에 비친 사진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요."
"음, 맞아요." 나는 그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보러 가는 어떤 곳의 어떤 사람들은 왜 거기에 가 있는 걸까요? 그건 모두 환상에 불과한데요?"
"음, 오락거리니까 그렇죠." 내가 말했다.
"재미있어서 그렇다. 맞는 말이에요. 첫 번째 이유네요."
"어쩌면 교육적 효과도 있을 수 있죠."
"좋아요. 그런 핑계는 항상 나오죠. 학습, 두 번째 이유네요."
"공상과 도피."
"그건 결국 재미죠. 결국 첫 번째 이유랑 똑같아요."
"기술적 이유도 있죠.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나보려고요"
"그건 학습이죠. 두 번째 이유요."
"지루함으로부터의 도피......"
"도피, 그건 아까 나왔잖아요."
"사교 목적이요, 친구랑 같이 간다든지," 내가 말했다.
"극장에 가는 이유이긴 해도 영화를 보는 이유는 아니네요. 어쨌거나 그것도 결국 재미예요. 첫 번째 이유요."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모조리 그가 지적한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에 속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재미로, 또는 학습 효과를 위해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는 마치 한 사람의 생애와도 같죠. 돈, 이 말이 맞나요?"
"맞아요."
"그러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굳이 나쁜 인생을, 그러니까 공포영화를 선택하는 걸까요?"
"그런 사람들은 단순히 공포영화를 보러 오는 것뿐만 아니라, 극장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게 공포영화일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왜 하필......?"
"당신도 공포영화를 좋아하나요?"
"아뇨."
"그럼 언제 한 번 본 적이라도 있나요?"
"아뇨."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당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공포영화나, 또는 멜로영화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감각이 무디고 지루해 보이는 것을 보지 않던가요......?" 그는 내가 대답할 수 있도록 질문에 약간의 여지를 남겨주었다.
"맞아요."
"당신은 그 사람들이 보는 영화를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 역시 당신이 보는 영화를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걸 가리켜서 '자유'라고들 하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공포나 지루함을 느끼려고 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또 다른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아니면 그들이 오싹하게 하는 전율을 좋아하든가요.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지루함이야말로 영화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목표이기 때문이거나요.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게, 무슨 그럴만한 건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뇨, 전혀 그럴 리 없죠."
"맞아요, 그럴 리는 없죠." 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걸 이해하기 전까지, 당신은 왜 다른 사람들이 불행한지에 대해 의아해할 거예요. 그 사람들이 불행한 까닭은 바로 그 사람들이 불행해지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리처드,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그게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라고요!"
"음."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재미를 누리는 생물이에요. 우리는 우주의 수달이에요. 우리는 죽을 수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다치게 할 수도 없어요. 이건 스크린 위의 환상들을 다치게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다친다고 믿을 수가 있어요. 그 세부사항까지 각자가 원하는 만큼 곁들여 가면서요. 우리는 스스로가 희생자라고, 누군가에 의해 죽거나 또는 누군가를 죽이는 거라고, 행운과 불운에 둘러싸여 덜덜 떨고 있다고 믿을 수가 있다고요."
"결국 우리는 여러 생애를 산다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영화를 몇 편이나 봤나요?"
"어~."
"이 지구 상의 생명체에 관한 영화들, 다른 행성의 생명체에 관한 영화들,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영화이며, 모두 다 환상인 거예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한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지식을 배우고, 우리의 환상으로부터 갖가지 재미를 얻게 되는 거죠. 사실 안 그런가요?"
"그나저나 이 영화 얘기 나누는 걸 도대체 얼마나 더 하려는 거에요. 돈?"
"그럼 당신은 어디까지 밀고 갔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오늘 그 영화를 본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내가 그걸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죠. 수많은 사람들은 뭔가를 같이하는 걸 즐기기 때문에 각자의 생애를 선택하는 거라고요. 오늘 밤 그 영화 속의 배우들은 다른 영화들에서도 함께 공연한 적이 있었죠. 당신이 어떤 영화를 먼저 봤는지에 따라, 그 이전일 수도 있고 그 이후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당신은 그 영화들을 서로 다른 스크린에서 틀어놓고 동시에 봤을 수도 있고요.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보러 가기 위해 표를 사죠. 다시 말해 그것이 공간적으로도 현실이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현실이라고 동의함으로써 그 입장료를 지불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 단 하나도 사실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입장료를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 지구 상에, 또는 다른 어떤 시공간 체계 속에도 나타날 수가 없는 거죠."
"그럼 시공간 속에서 아무런 생애도 갖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한 건가요?"
"아니, 이 세상에 영화를 단 한 번도 보러 가지 않는 사람도 있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움을 얻게 된다는 거군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는 내 말에 기쁜 듯 대답했다. "시공간이라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수준의 학교예요.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여전히 환상에만 머물러 있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도 객석에 불이 금방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거예요."
"그나저나 그런 영화들의 각본은 누가 쓰는 거예요. 돈?"
"그런 건 사실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도 충분히 잘 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이런 영화들의 각본은 누가 쓰는 건데요, 리처드?"
"우리가 쓰는 거죠." 내가 말했다.
"연기는 누가 하는 거죠?"
"그것도 우리죠."
"촬영 기사며, 영사기사며, 극장 지배인이며, 매표원이며, 배급업자며, 또 누가 하는 걸까요, 그걸 보는 사람은 또 누구인 거죠? 그 중간에 척 하고 걸어 나와서, 언제든지 간에 플롯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버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또 누구죠? 똑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또 누구고요?"
"어디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누구나 원한다면 할 수 있지 않아요?"
"그게 과연 당신한테는 충분한 자유가 되나요?" 그가 말했다.
"사실 그거야말로 영화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영화가 우리 자신의 삶과 대응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죠...... 아닐 수도 있고요. 그래도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에요, 그렇죠? 그럼 영사기는 뭐죠?"
"마음이죠." 내가 말했다. "아니, 상상력이요, 그건 바로 우리 상상력이에요. 물론 당신은 그걸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 몰라도 말이에요."
"그럼 영화는 뭐죠?" 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우리의 상상력 안에 넣어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무조건 거기에 동의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돈"
"당신은 어떤 영화의 필름을 당신 손에 들 수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건 모두 끝나고 완결된 거죠. 처음, 중간, 끝 모두가 거기에, 똑같은 1초 동안 똑같은 백만 분의 1초 동안 거기에 있는 거예요. 영화는 그걸 기록한 시간을 넘어서까지 존재하죠. 그 영화가 도대체 무엇인지 만약 당신이 알기만 하면, 당신은 영화관에 걸어 들어가기도 전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지를 대략적으로 알게 되죠. 그 안에서는 전투와 흥분이, 승자와 패자가, 로맨스와 재난이 벌어지게 될 거예요. 당신은 그게 모두 거기서 벌어질 것임을 알죠. 하지만 거기 매료되어 홀딱 빨려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걸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당신은 우선 그 필름을 영사기에 걸고, 매 분 필름이 렌즈 사이를 지나가게 해야만 해요...... 모든 환상은 그걸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니까요. 그러니 당신은 돈을 건네고, 표를 받은 다음, 의자에 앉아서 극장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잊어버리고, 그러고 나면 당신을 위한 영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도 실제로는 다치지 않는다는 건가요? 기껏해야 토마토 소스로 만든 가짜 피라는 거예요?"
"아뇨, 그것도 피는 피예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실제 삶에 끼치는 영향으로 말하자면 토마토 소스 정도일 거라는......"
"그러면 현실reality은요?"
"현실은 신처럼 무관심하죠. 리처드, 어떤 어머니라도 자기 아이가 무슨 역할을 하고 노는지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요. 하루는 악당이 되었다가, 또 다음 날은 정의의 사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있음'은 심지어 우리의 환상이며 놀이에 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오로지 그 자체만을 알고 있고, 자기와 유사하게 완벽하고도 완전한 우리만을 알고 있는 거죠."
<22쪽> 1970년 겨울에 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처럼 강렬하거나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하고 너무나 희미해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그지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커다란 외침도 아닌 작은 속삭임만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혼돈과 변신의 길로 내던져졌다. 이제는 40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그 순간은 마치 어제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그때 플로리다 게인즈빌에 있던 우리 집 마루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나는 셀리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우리 두 사람 모두 플로리다 대학 학생이었고 그 중에서도 나는 대학원에 재학 중인 경제학도였다. 나는 경제학부 학장님이 차세대 대학교수로 점찍어 키울 만큼 빈틈 하나 없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셀리에게는 시카고에서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로 활동 중인 로니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영향력 있고 돈 좀 만지는 대도시 변호사와 60년대 전형적 스타일의 대학물 먹은 히피 간의 만남. 이 쯤에서 당시 내가 얼마나 분석적인 인간이었는지를 언급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철학이나 심리학, 종교학 따위의 과목은 수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기호논리학, 고등미적분, 이론통계학이 내 선택과목이었다. 이러니 내게 일어났던 일은 더더욱 놀라운 뿐이다.
가끔씩 로니가 집에 놀러오면 나는 하릴없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바로 그날, 1970년에 있었던 그 운명의 날에도 로니는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때 우리가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평소처럼 느긋하게 잡담을 나누던 중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침묵이 불편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에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왠지 상당히 달랐다. 예전처럼 어색해하면서 할 말을 찾는 대신 나는 내가 불편함을 느끼며 할 말을 찾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과 감정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을 지켜본 것이다.
이 상황을 말로 잘 표현해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가능한 대화 주제들을 닥치는 대로 뱉어내고 있는 나의 불안한 마음과, 그런 마음을 그저 지켜보고 있던 나 사이에는 완벽한 분리감이 존재했다. 돌연 마음 위에 떠서 머물면서 어떤 생각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조용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믿거나 말거나, 미묘하게 달라진 그 의식의 자리는 회오리바람이 되어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몇 분 간 나는 그 어색한 침묵을 메꿔보려고 애쓰는 나를 지켜보며 그저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메꿔보려고 애쓰고 있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침묵을 메꾸려고 애쓰는 마음의 활동을 조용하게 지켜보는 자였다. '나'와 '내가 지켜보는 것' 사이의 틈은 처음에는 아주 미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틈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앞을 지나가는 신경증적이고 습관적인 생각들이 '나'라는 느낌에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 깨어남의 전 과정이 실은 한 순간에 일어났다.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숨어있던 그림이 홀연히 나타나 보이는 책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특정한 이미지도 없는 어지러운 패턴으로만 보이지만 그것을 응시하다보면 카오스처럼 보이기만 했던 배경 속에서 선명한 3D 이미지가 홀연히 떠오르는 그림('매직아이') 말이다. 일단 그 이미지를 발견하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걸 못 봤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거기에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전환이 내 내면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나는 줄곧 내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언제나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자각능력이 떨어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생각과 감정의 시시콜콜한 내용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것이 그저 생각과 감정일 뿐이라는 사실 자체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침묵을 깨어줄 좋은 방법처럼 보였던 그것이 머릿속에서 재잘대는 신경증적인 목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해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씨가 참 좋지 않아요?' '닉슨이 요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들었어요?' '뭐 좀 드실래요?'
마침내 내가 입을 열어 말했을 때 내가 내뱉은 말은 이랬다. “머릿속에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적이 혹시 있나요?" 로니는 약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아, 자네가 무슨 얘기 하는지 알겠어. 내 것도 당최 입을 다물지 않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뭐라 뭐라 말하면 어떤 느낌일까요. 운운하며 로니에게 농담을 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우리는 웃었고, 그 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었다 내 인생은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지 않았다. 내 인생은 이전과 같아지지 않았다. 이 자각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그것이 나였다. 나는 끊임없이 마음속을 지나가는 생각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동일한 자각의 자리에서 나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감정의 물살이 가슴을 지나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샤워를 할 때면 몸을 씻고 있을 때 그 '목소리가 기어코 무슨 말을 뱉고야 마는지를 지켜보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상대가 하는 말은 듣지 않고 내 차례에 무슨 말을 할지 궁리하고 있는 그 목소리를 지켜보았다. 수업에 가면 이번 강의의 결론이 무엇인지 맞춰보려는 식으로 교수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는 마음의 게임을 지켜보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새롭게 발견한 머릿속의 목소리에 정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영화관에 앉았는데 바로 옆자리 사람이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는 것과도 같았다.
그 목소리를 관찰하고 있다 보니 내 존재 내면 깊은 곳의 무엇이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싶어했다. 이 목소리가 멈추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내면의 침묵을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다. 저 첫 번째 경험이 있은 지 며칠 만에 내 삶의 패턴은 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놀러와도 더 이상 즐기지 못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마음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집 근처 숲 속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의 공터에 앉아 그 목소리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말했다.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말하는 주제는 바꿀 수 있어도 말 자체를 일정시간 이상 멈추게는 할 수 없었다. 내면의 침묵을 원하는 내 마음은 갈망을 넘어 불같은 열정이 되었다. 나는 목소리를 지켜보는게 이떤 것인지를 알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완전히 멈춘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진짜 상상도 할 수 없있던 것은 내가 곧 떠나게 될 대변혁의 여정이었다.
<57쪽>
겨우 해석을 해보니 "언덕에 사는 미국인에게 주라고 어머니가 이 우유를 주셨어요"라는 말이었다. 나는 크게 감동하여 아이에게 너무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평소에 늘 그러던 것처럼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건만 사실 그것은 멕시코 오지의 이름 모르는 어떤 사람이 베풀어준 친절이었다. 나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날 세뇌해 놓은 것처럼 삶이 그토록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경험해야 할 일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건 스스로 기꺼이 경험하고자 나설 경우에만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기억으로는 삶이 펼쳐내는 사건들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최초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져보면 차를 세워두고 몇 주 동안 홀로 명상할 그 완벽한 장소를 '내가' 미리 찾아 나서서 물색해놓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자아이의 그 친절한 방문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것은 삶이 내게 베풀어준 것이었다. 나는 그저 흐름을 따라갔을 뿐이다. 나는 점차 이 모든 경험을 삶이 주는 선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60쪽>
나는 차츰 안도했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내 안의 겁먹은 자가 더 이상 인생을 주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64쪽>
삶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127쪽>
나는 아무 일에도 나서지 않았는데 삶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는 듯 저절로 펼쳐졌다. 나는 그 힘을 섬겼다. 신, 그리스도, 영...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도 좋다. 그것은 더 이상 그저 신앙할 무엇의 이름이 아니었다. 나를 삶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사건들은 만져질 듯 생생한 현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한 모든 것을 우주의 힘(Universal Force)에 바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한 것은 오직 하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그 아름다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삶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날 거기에 데려다 준다면 따라갈 수밖에.
<172쪽>
40여년이 지난 지금, 가끔씩 이 사원공동체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게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내려놓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게 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대답이다.
<182쪽>
내가 거듭 내맡긴 결과, 우주의 완벽한 흐름은, 있는지조차도 몰랐던 문제를 찾아서 해결해 주었다.
<183쪽>
에너지의 흐름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 혹은 끝났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 사실은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곤 하는 것은 아예 내 인생의 한 패턴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258쪽>
처음에는 대재앙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지금 불어닥치고 있는 폭풍우에 잘 대처하다 보면 결국 그것이 큰 선물을 불쑥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목격한 것이다. 나는 이 폭풍우를 변성의 전조로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변화는 일상의 관성을 넘어설 이유가 충분히 있을 때만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든 상황은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힘을 창조한다. 문제는,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끌어올린 이 모든 에너지를 대개는 변화에 저항하는 데에다 써버리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268쪽>
내맡기기 실험을 통해 그 모든 사건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펼쳐졌는지를 목격한 나는 개인적인 호오好惡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소음을 기꺼이 놓아보내면 보낼수록 주변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동시성 현상들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323쪽>
'이길 수 없으면 함께하라' - 잠언
<396쪽(끝)>
삶이 다 알아서 한다는 사실을 내면 깊은 곳에서 깨달았을 때 오는 그 엄청난 자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밖에 알 수가 없다. 어느 순간이 되면 더이상 고된 몸부림은 없어지고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완벽한 그것에 내맡기는 데서 오는 깊은 평화만이 존재한다. 결국에는 마음조차 저항을 그치고 가슴은 스스로 자신을 닫아거는 습관을 잃는다. 그때의 기쁨과 흥분과 자유란 꿈에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너무나 아름답다. 일단 당신이 스스로를 놓아보낼 준비가 된다면 삶은 당신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은밀한 연인이 된다. 삶의 길이 당신의 길이 될 때, 모든 잡음은 멎고 위대한 평화만이 남는다.
이 책은 몇 달 전에 읽었다. 시간 순으로 진행되면서 스케일이 확대되는 방식이, 마치 오래전에 읽었던 '드리피의 외출'같았다.ㅋ 대부분의 성공스토리가 '세상에 뛰어들어 돈과 명성을 쟁취'하는 구조인 데 반해, 이 '숲 속에서 명상하는 히피'는 그가 서식하는 곳으로 돈과 명성이 찾아온다. 인생은 신기하게도.. 도시로 큰물로 나가돌아다녀도 인연을 못만나는가 하면, 외딴 곳에 살아도 필요한 인연은 어찌어찌 다 굴러들어온다. 저자는 계속 운!에 감탄하지만 그는 분명히 재능이 있고 또한 성실하다.
잘 나가다가 후반부로 가면, 어느날 핵전쟁의 코앞에 서게 되었던 드리피처럼 난데없는 고초가 찾아온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 끝까지 순항하는 인생은 불가능한 걸까. 30년간 명상을 해온 사람도 내일 일어날 일을 예감할 수 없고, 불운을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긴 고초의 터널에서 두 권의 책을 썼다. 이 책과, [상처받지 않는 영혼(The Untethered Soul)].
가끔 '도리'라든가, '(좀 성가시더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이상하게도 기분이 찜찜하거나 추이가 안좋을 때가 꽤 있다. 아마도 '자연스럽게 기꺼이' 한다기보다 어떤 의무감에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날이 갈수록 '뭘 하는 게 아니다'라는 농담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아등바등하든 안하든 결과는 비슷하다. 좀 게을러도 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히 혼자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집을 떠나 바다를 항해하거나 요새를 정복하지 않을 것이다." - 블레즈 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