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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4. 16:37 책에서 발췌

Lucid Living, Timothy Freke, 2005

 

 

<11쪽>

잠시,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상상해 볼까요. 꿈 세계 속의 드라마에 넋이 빠져 있을 때, 그 꿈속에 낯선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가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당신의 귀에다 대고 이상한 말을 속삭입니다.
"이봐요! 깨어나요. 당신은 꿈을 꾸고 있어요. 지금 당신의 귀에는 이 말이 미친놈의 헛소리 정도로 들린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꿈을 꾸고 있다구요." 당신은 심사가 뒤틀립니다. "말도 안 돼요!"

 

"정말 터무니없는 말일까요? 당신이 경험하는 것들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패턴과 기이한 우연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나요? 마치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건 바로 이게 다 꿈이기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란 말이에요? 사람 열받게 만드시는군.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디 그런 소리 한번 해보시지 그래요?'

 

낯선 사람은 참을성 있게 말합니다.

"물론 이 세상은 진짜입니다. 진짜 꿈의 세계지요. 놀라운 것은 정말 놀랍고, 끔찍한 것은 또 정말 끔찍해요. 나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것도 하나의 꿈이라는 사실을 말해드리려는 것뿐이에요. 당신은 지금 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이 이 꿈 속에서 잠시 맡고 있는 배역일 뿐입니다. 진정한 당신은 그 꿈을 꾸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꿈의 세계는 모두가 당신의 마음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은 아찔해집니다. "그럼 내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도 내 상상이라는 겁니까?"
"당신인 것처럼 보이는 그 인물이 지금 나와의 이 대화를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도 이 꿈의 한 부분일 뿐이니까요. 진정한 당신은 이 꿈 속의 모든 사람과 온갖 사물을 상상하고 있는, 꿈꾸는 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둘 다 그 꿈꾸는 자랍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막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거에요. 이건 '깨어나기'라는 이름의 꿈이랍니다. 이 꿈은 갈수록 점점 더 의식이 깨어나고, 결국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계된 꿈이지요." 당신은 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깨어난단 말이죠?" 낯선 사람은 당신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합니다. "깨고 싶을 때 언제든지 깰 수 있습니다. 단지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원해야 해요.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깨어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꿈을 신나게 꿀 수 있는 비결이랍니다."

"이제 어쩌란 말이에요?" 그는 돌아보고 씨익 웃으며 말합니다. "꿈을 신나게 즐기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꿈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는 모두가 당신이니까요."

 


<20쪽>
당신은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문득 의식해본 적이 있나요? 이것을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이라고 하지요.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삶이 꿈과 같은 것임을 인식하는 '자각생lucid living'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초자각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당신을 깨워서 당신이 자각생을 몸소 경험해볼 수 있게 해줄,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삶을 별 의미없는 환상 정도로 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환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멋지고 경이롭습니다. 그 다채로운 화려함과 그 경이로운 광대함과 섬세 미묘함,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정치함과 깊숙이 다가오는 강렬함, 그 가혹한 요구와 풍만한 관능을 자랑하는 이 찬란한 우주보다 더 멋진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삶이라는 이 꿈은 정말 놀랍고 신기한 것입니다.

 

 

<30쪽>  Life is a Mystery  삶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40쪽>  Now is all you know  당신이 아는 것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50쪽>  You are not a person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삶이 꿈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삶이라는 꿈속의 한 인물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진짜 정체는 그보다 훨씬 덜 구체적이고, 훨씬 더 신비로운 것입니다. 당신은 삶이라는 꿈을 목격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잘 살펴보세요. 당신은 바로 지금 뭔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당신은 경험의 경험자입니다. 이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별난 방법이긴 하지만, 실제로 옳은 말 아닌가요? 해보세요. 경험의 경험자가 되세요.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의식이 되세요.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도, '나는 몸을 갖고 있다'고 하지, '나는 몸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을 소유물처럼 '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몸도 마음도 아닌 이 아리송한 '나'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의식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당신의 몸은 나이를 먹고 마음은 성숙해졌지만, 그 어떤 무엇인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본질적인, 진짜 당신은 당신이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요? 

 

변함없이 남아있는 이 본질적인 당신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은 당신의 모든 경험의 변함없는 배경입니다. 의식은 변해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변함없는 목격자입니다. 의식은 언제나 있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경험의 흐름을 지켜보는 의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하고 영원한 정체입니다. 경험의 흐름 속에서는 당신은 어떤 특정 인물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끊임없이 변하는 당신의 외면적 정체는 당신의 본모습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겉모습일 뿐이지요.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을 때는, 현재 당신인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은 의식에서 사라지고 꿈속의 또 다른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의식인 진짜 정체는 영원히 똑같이 남아 있지만, 외면상의 정체는 밤마다 완전히 변신합니다. 사실, 깊은 잠 속에서는 당신의 외면상의 정체는 통째로 사라져버립니다! 의식이 잠들어버리면 당신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상식은, 당신이 몸이며 의식은 그 몸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경험 속에서는 당신은 의식이고, 그 속을 몸이 들락날락합니다! 꿈꾸는 동안에는 꿈속 세계가 매우 현실적이고 놀랍도록 생생해서 당신은 꿈속에서 느껴지는 그 사람을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각상태에서 꿈을 꾸면, 진정한 자신은 그 꿈을 '지켜보는 꿈꾸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57쪽>
자각상태에서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자기인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믿기를 그만두세요. 끝없이 변화해가는 이 순간을 지켜보는 의식이 되세요.

 

 

<62쪽>  The world exists in you  세상은 당신 안에 존재합니다 

꿈을 꿀 때 당신은 자신을 꿈속 세계의 한 인물인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은 의식이고 꿈속 세계가 당신 안에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도 당신은 삶이라는 꿈속의 한 인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신은 의식이고, 이 삶이라는 꿈은 당신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바로 지금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감각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우리는 보통, 생각은 의식 안에 존재하며 세상은 의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당신은 이 세계를 시각적 이미지, 촉감, 배후의 소리들, 주위의 냄새 등의 감각적 느낌으로서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인식되는 모든 것은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의식은 경험 속에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모종의 공간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광활한 공간과도 같은 자기 자신을 의식해 보세요.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활자들은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이 생각들도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보고 듣고 만지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의 몸도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이 세상이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 속에 있는 자신이 하나의 육신인 것처럼 느끼고 있을 테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의식이며 세상은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격적이라면 놀랄 일이 더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 속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스스로 살펴보세요. 시간이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삼라만상의 끝없는 흐름이며, 의식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시간은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의식은 시간 밖에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 속의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 시간 밖의 의식입니다. 어때요!?

 

<71쪽>  All is one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그 드라마 속의 많은 인물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 하나뿐인 의식이 그 모든 사람과 사물을 상상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분리된 개인인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삶을 꿈꾸는, 하나인 그것>이 꾸고 있는 삶이라는 꿈속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꿈꾸고 있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인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여러 인물로 변신하여 등장하는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살펴보세요. 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나와는 다른 정신적, 육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의 외면적 정체는 나의 외면적 정체와 구별됩니다. 하지만 의식인 당신의 진짜 정체와 의식인 나의 진짜 정체도 서로 구별되는가요? 아닙니다. 의식인 당신은, 늘 지켜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의식인 나 또한 그렇습니다. 의식인 당신은 공간 속에도, 시간 속에도 있지 않습니다.그리고 의식인 나 또한 그렇습니다. 의식인 우리는, 서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겉은 달라 보이나 본질은 동일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는 모두가 똑같은 의식입니다. 의식인 우리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인 의식이며, 그 의식이 삶이라는 꿈속에서 여러 다양한 인물들이 되어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 삶이라는 꿈을 경험하고 있는, 하나인 의식입니다. 굉장하지 않나요!

 


<80쪽> You are a paradox  당신은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꿈을 꿀 때, 당신은 그 꿈의 근원인 동시에 꿈속의 한 등장인물입니다. 당신은 삶이라는 꿈의 근원인 동시에 그 속의 한 등장인물입니다. 당신은 삶이라는 꿈속의 한 인물이 되어 있는 꿈을 꾸는 자입니다. 삶 속의 이 인물에만 동화되어 있는 한, 당신은 삶이라는 꿈속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각생은 자신의 모순적인 속성의 양극을 동시에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한번 시험해볼까요?
당신은 세상 속의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제 뒤집어보세요.
당신은 의식이고, 세상은 당신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은 시간 속의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뒤집어보세요.
당신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삼라만상의 흐름을 지켜보는, 영원한 지금입니다.

당신은 분리된 개인인 것 같습니다. 뒤집어보세요.
당신은 하나의 특이한 관점으로부터 존재를 경험하는 삶을 꿈꾸는 의식입니다.

당신은 삶이라는 꿈속의 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뒤집으세요.
당신은 삶이라는 꿈을 꾸는 의식이며, 모두가 당신입니다.

자각생이란, 깨어서 그 모든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인 의식으로 깨어나는 것이 당신의 개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각생이란 당신의 개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꿈을 꾸는 의식은 자신이 한 개인이라고 꿈으로써만 삶의 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각생이란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진실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 에너지가 당신을 당신의 삶 속으로 밀어 넣어주고 있음을 알기에 말입니다. 자각생은 일상적 존재의 기쁨과 드라마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을 새로운 가치와 의미로 가득 채워줍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당신 본성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당신의 본성에 대해 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꿈과 마찬가지로요.

당신은 의식이 더욱 깨어날 기회를 주는 새로운 상황들을 계속 꿈꾸어냅니다. 자각생이란, 깨어남의 장대한 모험인 일상의 삶 속으로 온 맘을 바쳐 뛰어드는 것입니다. 자각생이란 깨달음enlightenment의 초연한 상태 속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 enlivenment의 유쾌한 상태를 즐기는 것입니다.

 

<90쪽>  Being one is loving all  하나라는 것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임을 깨달을 때 느끼는 그것입니다. 자신이 곧 모든 사람이자 모든 사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자신이 만인만물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현자들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유일한 답은 사랑임을 가르쳐왔고, 그들은 옳았습니다. 사랑만이 우리 사이의 분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그저 분리된 개인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해가 미치든 상관하지 않고 한정된 자기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것입니다. 분리라는 착각은 이기심과 고통을 불러옵니다.

 

분리가 착각이라는 이 깨달음은 어마어마한 것들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자에 대한 복수도, 정의롭고 명분있는 전쟁도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뜻합니다.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자초하고 있는 온갖 불필요한 고난들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통해 일으키고 있는 온갖 불필요한 고난들을 생각해보세요. 분리가 착각임을 깨달으면 갈등이란 결코 우리와 그들 사이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일으키는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저 깨어서 모두를 사랑하며 산다면 우리의 집단적 삶의 경험이 얼마나 쉽게, 송두리째 달라질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세요. 그저 깨어나기만 한다면 삶이라는 이 꿈이 얼마나 멋진 것이 될 수 있을지를 잠시 상상해보세요.


자각생은 이 삶이라는 꿈을 분리의 악몽으로부터 우리가 그리는 환희로운 존재의 축제로 바꿔놓는 단순한 비밀입니다. 나는 우리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를 압니다. 당신은 사람이 된 놀이를 하고 있는 무한가능성입니다. 당신은 육화한 삶의 신비입니다. 당신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당신은 나와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둘인 동시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멋지지요!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도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도와 이 멋진 깨어남의 꿈을 즐길 수 있겠지요. 깨어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신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방황하며 외로워할 때 서로를 위로해주고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겠지요.

깨어나세요. Wake up

 

 

 

 

posted by mooncle
2022. 10. 6. 19:47 책에서 발췌

 

 

<156쪽>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노부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뚜렷한 의학적 예후 없이 배우자를 따라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그 원인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이는 어떤 낭만적, 시적 표현이 아닌 의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큰 상심은 심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단명은 흔히 상심증후군broken-heart syndrome이라 말하며, 의학용어로 스트레스 유발성 심근증stress-induced cardiomyopathy이나 타코츠보 심근증takotsubocardiomyopathy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심증후군은 소리없이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베니는 건강했다. 당시 87세였던 그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이며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아내 글로리아가 갑작스러운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는 하루빨리 죽고 싶다는 바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그는 아내가 묻힌 묘지를 매일 찾아갔다. 하루에 세 번이나 찾아갈 때도 있었다. 그는 아내 글로리아의 묘비 앞에서 기도하거나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곤 했다. 딸 모린이 묘비 앞에 엎드려 있는 그를 일으키려 하자, 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둬."라며 꾸짖었다.

글로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두 달 후인 2016년 밸런타인데이에 베니는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묘지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모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죽기라도 하려는 거예요?" 베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구나." 베니는 죽어가는 아내에게 "이제 그만 다 내려놓아도 괜찮아."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모린은 글로리아의 묘비 주위를 서성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결연하고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베니는 글로리아의 묘 주변을 돌며 쌓인 눈 위에 하트 모양을 새기고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증세가 악화돼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 그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베니는 심근경색 진단에 이어 회복 불가능한 심장질환으로 발전했다. 아주 독립적인 존재였던 그는 이틀 만에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더 이상 글로리아의 묘를 찾아갈 수 없었던 베니는 꿈 속에서 그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딸 모린은 "아빠는 지금 꿈 속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밤에 베니가 사랑하는 글로리아에게 폴란드어로 불러주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베니와 글로리아는 폴란드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한때 지나치게 사교적이었던 베니는 식사시간에만 잠깐 깨어 있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자신의 아내를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180쪽>
지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성장 장애는 10년 전에 지니가 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받았던 전뇌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다른 부작용은 바로 뇌종양이었다. 처음에 의사는 진행이 더디고 심각하지 않은 암이라고 오진했다. 뇌종양 판정을 받았을 때 지니는 열네 살이었고, 가족들은 지니의 백혈병 완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지니의 엄마인 미셸에 따르면, 지니는 전뇌 방사선 치료의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인지능력이 손상됐음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한 아이였다. 지니는 여느 10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연예뉴스를 놓치지 않고 섭렵했다. 화려한 색상의 반다나를 머리에 둘러쓰고 부어오른 상처를 자신만의 패션감각으로 커버할 줄 아는 아이였다. 지니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면서 혹시 내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는지 물었을 때, 지니는 밝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 제가 아름답다는 사실이요.”

지니는 밤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 주변을 휙 지나가는 그림자가 가끔 보인다고 했다. 그림자에 놀라곤 했지만, 특별한 꿈을 꾼 뒤로는 그 그림자가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MRI 촬영 중 기계 안에서 잠들어 꿈을 꿨는데, 최근에 세상을 떠난 미미 이모가 성 안에서 한 아기와 함께 창가에 서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태양이 보였다. 안전과 완벽한 보호를 암시하는 건축물에는 따뜻함과 환한 빛이 서려있었다. 미미 이모는 지니를 껴안고 귓속말로 "다시 내려가서 싸워야 해."라고 속삭였다. 

지니는 암에 걸리기 전에는 수영하기를 좋아했고, 꿈속에서 본 그녀의 성에도 수영장이 있었다. 그 성에는 지니가 건강했을 때 즐겼던 활동들을 할 수 있는 여러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니는 또 꿈 속에서 자신이 알고 사랑하고 떠나보냈던 동물들로 가득한 동물원을 볼 수 있었다. 개, 고양이, 새들이 차례로 나타나 건강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MRI 촬영이 끝나고 잠에서 깼을 때 지니는 거의 희열에 들떠 있는 모습으로 엄마 미셸에게 대뜸 "난 괜찮을 거야. 혼자가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지니도 자신이 이 현실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이 진행되면서 지니는 더 많은 꿈을 꿨고, 세상을 떠난 동물들과 반려동물들이 ‘그 성’ 안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도 더 자주 보였다. 죽음이 임박했을 시기에 지니는 거의 15분마다 엄마를 불렀다. 어느 날 미셸이 딸 방에 있다가 다시 주방에 돌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지니가 활기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셸은 다시 딸의 방으로 가서 방금 전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물었다.

"하나님이랑 얘기하고 있었어. 하나님은 나이가 드셨지만 좀 귀엽기도 해." 놀랍게도 지니는 종교 없이 자랐고, 교회에 나간 적도 없었다. 이어 지니는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난 이제 안아플 거야. 내가 어디로 갈 건지 엄마도 잘 알잖아. 그 성으로 갈 거라는 거." 지니는 그 이후로 미셸을 더 이상 반복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지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위안의 원천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니는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185쪽>

6개월 전에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부부의 어린 외동딸 산드라는 골수암이 몸 전체에 전이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왔다. 산드라의 신체적 고통의 정도가 너무 심해 재택간호는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산드라는 호스피스 버펄로에서 안정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계속해서 "진통제를 좀더 놓아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산드라는 통증에 따른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산드라는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다. 산드라는 가족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진정제를 최대한 많이 투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산드라는 아파하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서 "잠만 잘 수 있게 약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산드라는 투병생활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산드라의 통증을 관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투약한 약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산드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제 산드라는 호스피스 버펄로에 계속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산드라의 부모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딸이 진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들은 명랑한 딸이 계속해서 치료 가능성, 기적을 믿기를 원했다. 

산드라는 통증이 줄어들자, 근심걱정이 없던 예전의 어린 소녀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산드라의 생기 넘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산드라가 통증에 시달릴 때는 세상이 어두워 보일 정도였다. 그 아이는 장애가 있는 자기 팔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머리에 반다나를 두른 자신의 창백한 모습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서는 물론 벤치에서, 복도에서,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춤을 췄다.

 

산드라도 꿈을 통해 어른들이 숨기려고 했던 진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산드라는 산기슭을 오르고 있는데 밑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당기며 위에 있는 천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꿨다. 산드라는 십자가가 있는 산 정상에 다다르자 모든 고통이 사라짐을 느꼈다. 산드라는 꿈에 계속 보이는 이 생생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꿈은 고통과 함께 세상에 묶여 있는 산드라에게, 그 속박에서 벗어나 고통없는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산드라는 가족들 모르게 죽기 일주일 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계속 작별인사를 전했다. 그 아이는 시리아 친구들에게 이 글이 '당분간' 자신의 마지막 게시물이 될 것이라고 알렸다. 산드라가 아랍어로 남긴 글은 번역기능을 통해 읽어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애잔한 노래 같았다.

 

"인생을 논하기엔 아직 내가 너무 어리다는 걸 알아. 하지만 투병생활을 하면서 꽤 많이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해. 고통스럽고 불행하더라도 기쁨을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거나, 계획을 세우려 하거나, 나중을 위해 살지 마. 하루하루를 살면 돼. 현재를 즐기는 삶을 살아. 지금 이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고, 결국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될 테니까."

 

 

<194쪽>
"옳고 그름 그 너머에 들판이 있다. 나 그 곳에서 그대를 다시 만나리."   - 루미

 

 

<222쪽>
28세 시에라의 경우, 그 가족은 갑작스러운 슬픔을 받아들여야 했다. 복부 불편감을 호소했던 시에라는 처음에 맹장염이라는 오진을 받았지만 사실은 광범위하게 전이된 결장암이었다. 시에라의 어머니 태미는 그 끔찍한 소식을 받고도 신기하리만큼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시에라를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에라는 화학요법을 받고 있던 병원에서 결혼식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에라에게는 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고, 아이 아빠인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을 오랫동안 꿈꿔 왔다. 암 전문의는 시에라의 어머니를 따로 만나 시에라가 결혼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두 달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결혼식은 치를 수 없었다.

시에라가 호스피스 버펄로에 입원하기까지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결혼이 아닌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입원치료를 받다가 한순간에 완화치료를 받아야 하는 그 상황을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시에라의 통증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그녀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시에라와 그 가족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려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게 급선무였다. 담당의사는 시에라의 동생에게 시에라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시에라의 동생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언니는 자기가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요."


시에라는 자신이 전보다 더 쇠약해졌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코앞에 닥친 죽음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저는 이겨낼 거예요."라고 힘없이 속삭였다. 태미는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억눌렀다. 의사는 시에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엄청난 사랑과 배려가 이 방에 가득하다고 말하면서 시에라에게 물었다. "시에라, 당신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나요?" 닭똥같은 눈물이 시에라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미는 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얼마 있다가 시에라에게 최근에 꿈을 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늘 이상한 건 아니에요. 가끔 잘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고요." 의사는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갔다. "혹시 꿈에 계속 보이거나 꿈 속에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나요?" 한참 정적이 흘렀다. 시에라는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의사의 어깨 너머를 훑어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태미는 울기 시작했다. 시에라가 그녀의 할아버지 하워드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이자 헌신적이고 가정적인 남자였던 하워드는 손녀 시에라와 각별한 사이였다. 하워드 할아버지는 시에라가 암 센터에 있을 당시에도 그녀의 꿈에 나타났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태미가 그 정적을 깨며 물었다. "시에라, 할아버지가 뭐라셔?" 시에라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답했다. "내가 어엿한 숙녀가 되고 엄마가 되어 대견하다고 하셔." 그녀는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통받지 않길 바라셔." 태미는 이제 그만 딸을 보내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가, 할아버지가 너를 데리러 오시면 할아버지랑 함께 가렴,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시에라는 4일 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생을 마감했다. 태미는 자신의 소중한 딸을 조금이라도 더 안아주기 위해 시에라의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고, 시에라는 그렇게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나는 시에라가 첫 숨을 쉴 때 그곳에 있었고, 그 아이가 마지막 숨을 쉴 때에도 그곳에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거예요."

 

<229쪽>
폴 역시 죽음을 앞둔 아내 조이스가 임종몽을 통해 그녀의 어린시절을 지탱해 준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폴은 아내가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놓아줄 수 있었다. 몇 년 후 폴 자신이 우리 호스피스에서 주관하는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환자가 됐을 때, 폴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얻게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죽음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폴이 가장 많이 꿨던 꿈은, 아내 조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그에게 손을 흔드는 꿈이었다. 폴은 조이스가 자신은 잘 있으며, 그도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켜주기 위해 미인대회에서나 볼 법한 '깜찍한 손인사'를 보여줬다고 내게 말했다.

폴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간호사인 그의 딸 다이앤은 아버지의 임종몽 이야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얻었다. 다이앤은 "아빠는 임종몽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셨어요. 아빠는 기분 좋은 꿈들을 기억하고 싶어했고, 우리도 그 꿈 이야기를 즐겁게 듣곤 했죠. 아빠와 함께한 그 마지막 며칠은 우리 남매가 아빠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었어요. "

 


 

이 책이 전해주는 임종몽의 사례들은 세심한 심리치료 과정처럼 보인다. 그 '보이지 않는 치료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한편, 오랫동안 외면해 온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꺼내 치유한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죽어서 비판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한편의 영화라면 임종을 앞둔 사람은 각본, 연출, 주연을 동시에 해낸 예술가가 된다. '보이지 않는 치료사'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작업에 조심스레 관여하여, 초조해하는 예술가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극장에 걸린 후에 자책하지 않도록, 충분히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고, 자신에게 관대하라고...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의 몸으로 죽는 벤자민의 삶을 따라가며 다양한 인생, 다양한 죽음, 여러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임종몽에 대한 글을 읽으려니 이 영화가 계속 생각났다.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죽는 내용인데다가, 병원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데이지가 삶을 회상하는 형식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아름답고 처연하고 가슴 뭉클한 장면들의 향연같은 영화다.

 

영화의 서두에 '눈 먼 시계공'이 나온다. 날 때부터 앞을 못보던 그는 외아들!을 잃은 후, 최고의 시계를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고는 잠적한다. 배냇장님이 시계를 만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가 하는 일'에 대한 비유이겠지만, 신에 대한 비유도 된다. 시계공은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시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신은 시간을 만들어놓고 잠적했다.^^

 

 

"탯줄을 자를 때 곁에 있는 건 쉬워요. 누구에게나 굉장한 경험이고 멋진 일이죠.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보며 임종을 지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도 그 경험을 했어요. 아버지께서 2년째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셨죠. 어느날 밤에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께서 이러시더군요. '아버지가 허리 아프시대.' 부모님 집으로 가서 구급차를 불러야 했어요.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 반년은 이렇게 지내야겠구나.' 

그날 밤 병원에서 병실로 들어가보라고 하더군요. 얼마 안남았다고요. 우리를 병실로 안내하더니 5분 정도 남았대요. 너무 갑작스러웠고 저는 할 말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죠. 들어가서 아버지를 봤어요. 호흡장치를 떼는데, 알아보지는 못해도 이제 끝이란 건 아시는 눈빛이었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귀에 속삭이면서 진정시키려고 애쓰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나? 당신이 살아있을 때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나?' 그건 한마디로 불가능해요. 안겪어보면 설명이 안돼요. 하지만 저는 그게... 사랑의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낳는 것보다 훨씬 심오합니다. 물론 저도 딸이 태어났을 때 아주 행복했지만요."   -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사무실이나 책상 정리해놓은 걸 보고, '나의 강박증은 이 형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구나.' ... 나도 내가 힘들어서 병이 날 지경인데 이 사람 가까이 있다가는 병이 도지겠다 싶었어요.ㅎㅎ"   - 봉준호

 

posted by mooncle
2022. 10. 2. 14:16 책에서 발췌

 

 

 


<76쪽>

임종 전 경험의 또 다른 특징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편집하는 기능을 들 수 있다. 흔히 유년기에 기원을 둔 중요한 순간들이 요약이나 수정을 거쳐 재구성되면서 환자의 가장 절박한 욕구가 해소되거나 보상받게 된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73세의 팀은 임종 전 경험을 통해 가난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팀은 처음에 그의 부모님, 조부모님, 오랜 친구들을 보기 시작했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넌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팀이 숨지기 4일 전, 그는 꿈속에서 10대 초반의 소년으로 돌아갔다. 그는 버펄로 남부의 블루칼라 지역에서 대공황의 비극을 겪으며 자랐다. 그곳에서 그는 삶이 망가져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다. 그의 아버지는 저임금 일용직을 전전하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내야 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팀의 가족은 아등바등 겨우 먹고 살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과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팀은 꿈에서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꿈 속에서 그는 부엌을 지나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장면이 지닌 의미는 명확했다. 팀은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이 그의 가족에게는 힘의 원천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옆집 친구를 만나려고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 친구는 야구 방망이와 공을 들고 서서 팀에게 같이 야구를 하자고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평생 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장차 그의 처남이 될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는 손수레를 끄는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은 고용과 회복된 자존감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상처가 치유되면서 그의 어린 시절의 세계는 이제 안전한 삶이 유지되는 완전한 곳이 되어있었다.

팀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아닌, 어린시절의 사랑을 재발견한 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았다. 3막으로 이뤄진 연극같은 각 장면, 즉 기도하는 어머니, 공놀이하는 친구,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주었다. 팀도 그 꿈이 자신에게 온전함과 평온을 되찾아 준 일등 공신이라고 인정했다. 이러한 현실 재구성에는 훨씬 더 과감한 편집과정이 수반되기도한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말기 판정을 받은 89세의 베벌리는 임종몽을 통해 과거에 사랑을 주지 않았던 사람을 기억에서 지움으로써 과거에 자신을 사랑해 준 아버지와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베벌리는 괜한 집안일을 끝도 없이 시키는 매정하고 폭력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베벌리는 칫솔로 가구를 몇 시간씩이나 문질러 닦아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꾼 꿈은 그녀를 어린시절로 되돌려 놓았지만, 자신이 한없이 하찮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꿈 속에서 아홉 살 소녀로 돌아갔고, 당시 자신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줬던 아버지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우편배달을 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방과 후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벌리는 아버지의 우편배달 경로를 모두 다 꿰고 있었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 끄트머리에 있는 밭을 아버지가 언제 지나갈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베벌리는 신나게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직 남아있는 우편물을 함께 배달했다. 죽음을 앞둔 베벌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따뜻한 기억뿐이었다.

 


<80쪽>
88세의 스콧은 임종 전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 발생했던 때로 되돌아갔다. 스콧은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8남매 중 한 명으로 대공황 시기에 성장했다. 스콧은 열 살 때 친구들과 기차에 뛰어오르다가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 사고로 놀림을 받았고 평생을 장애와 싸워야 했다. 혼자서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기도 쉽지 않았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도 없었다.

일자리가 비장애인에게 한정된 현실에서는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마저 공포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십대소년인 스콧을 위탁가정에 맡기기까지 했다. 그 결정에 스콧은 큰 수치심을 느꼈고, 자신이 앞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랑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스콧은 나중에 정비 일을 하는 안정된 직업을 구하고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계속 시달렸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계속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넘어 그의 정체성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죽음이 임박하자 스콧은 '즐거운 직장생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척척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꿈 속에서 옛 동료들은 번갈아가며 그에게 '훌륭한 일꾼이자 친구'였다고 말해주었다. 임종 전 경험은 종종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기억을 없애거나 새로운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고 그 원인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82쪽>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 존은 말기 심부전 진단을 받았으나, 그 질환 때문에 불면증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용사였다. 그는 똑같은 악몽에 계속 시달렸고,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잠에서 깨곤 했다. 존은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과거의 경험담을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자세히 들려줬다.

 

존이 미해군 전함인 USS 텍사스와 나란히 노르망디 해안에 입항한 증기선 SS 제임스 L. 애커슨의 포병으로 배치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1944년 6월 7일, 존은 오마하 해변에 파견된 보병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해안가에 있는 다른 부대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부상을 당한 레인저 부대원들을 상륙정에 태우고 돌아왔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했지만 존은 오마하 해변에서 봤던 훼손된 시체들과 떠다니는 팔다리를 결코 잊지 못했다. 그 참상은 그의 뇌리에 박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그는 호스피스 병상에 누워 이미 전사한 미군들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죽음뿐이에요. 주위에 온통 전사한 병사들뿐이라고요." 

며칠 뒤, 존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더니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 잠도 잘 자고, 웃음을 지으며 대화도 나눴다. 존은 최근의 꿈 덕분에 증세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존을 기분좋게 해 준 첫번째 꿈에서 그는 군대에서 제대증을 받던 날로 다시 돌아갔다. 두 번째 꿈은 악몽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결코 악몽이 아니었다. 오마하 해변에서 전사했던 한 군인이 그에게 다가와, "조만간 그들이 와서 너를 데려갈 거야."라고 말했다. 존은 '그들'이 전우들을 뜻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전우들과의 재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눈을 감고 쉴 수 있었다. 존의 임종 전 경험은 그가 겪은 전쟁의 참상을 재구성해 보여주었다. 67년간 전쟁의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며 싸워왔던 용감한 영혼은 마침내 그 부당한 고통과 엄청난 의무감,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88쪽>

패트리샤는 호스피스 버펄로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녀는 90세였고, 폐섬유증을 앓고 있었다. 휴대용 산소탱크의 도움을 늘 받고 있음에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패트리샤는 심한 호흡곤란 때문에 병실을 가로질러 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녀의 코에 삽입된 튜브가 장식으로 보일만큼 패트리샤는 지적으로 활기가 넘쳤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를 환자라기보다는 대화상대로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자주 발견하곤 했다. 패트리샤는 죽음을 갈망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숨이 멎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싶어했다.

패트리샤가 아홉 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부터는 폐섬유증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아버지 곁을 지켜야 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어요. 그렇지만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꿈들을 꾸기 전까지는!" 패트리샤는 그 '말도 안 되는 꿈들'을 일기장에 자세히 기록했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우리와 기꺼이 공유했다. "난 준비됐어요. 나도 남미 원주민들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떠났어요"

패트리샤는 신체적으로 계속 쇠약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인생의 마지막 해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체력이 약해질수록 자신을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할 방법을 더 열심히 찾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줄 풍경화 모음집을 제작하기도 했다. 패트리샤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죽음이 곧 구원'이라는 말을 더 자주 했고, 그녀가 그런 소리를 너무 자주 하자 자녀들은 속상해하며 자기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패트리샤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쳐 온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살폈고 전쟁, 배급제, 군복무 중인 약혼자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등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다. 그녀는 '가장 노릇'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평생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왔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읽어 준 일기장 속의 한 구절은 그녀의 그런 성격적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제 나는 쓸모없는 존재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제 도움을 받아야 하고 상황이 더 나빠질 게 뻔하다. 그래도 한번 잘 해 보자고 다짐하고 있다. 여전히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속상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엄마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 척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영원한 석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기 고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엔 늘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눈을 감기 며칠 전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을 테니, 당신은 더 잘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최근 들어서야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패트리샤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어머니의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어요. 크리스마스 9일 전이었죠. 엄마는 폐렴을 앓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고 했어요." 패트리샤가 엄마의 비극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그 일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느껴졌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엄마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오늘 산수 100점 받았어.' 패트리샤는 말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말은 내 안을 계속 맴돌았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그 마지막 말은 내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고, 나는 엄마에게 선물을 준 것만 같았죠. 엄마는 그날 밤 돌아가셨어요."

패트리샤는 꿈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 자식들이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부모들은 그들을 어린시절로 데려가는 꿈에 대해 자식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말기환자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한다. 이게 바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현실이다. 패트리샤는 꿈 속에서 엄마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는 어린 소녀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엄마는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어요. 엄마는 구식 산소텐트 안에 있었죠. 엄마가 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사람들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어요. '엄마한테 인사하렴', 엄마가 '안녕'이라고 했고, 나도 '안녕'하며 인사를 나눴던 게 기억나요."

죽음이 임박한 패트리샤의 병실을 찾았을 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 꿈 속에서 누구를 보고 싶어요?" 그녀가 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예상했던 답이었다. 패트리샤가 숨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러 갔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숙여 어머니를 만났는지 속삭이듯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했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쪽을 가리켰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9쪽>
죽음이 반드시 따뜻한 포옹처럼 다가온다거나, 꿈이 반드시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연구에 참여한 환자들이 꾼 임종몽 중 18%는 사실상 괴로움을 주는 꿈이었다. 예컨대, 살면서 트라우마에 시달려 온 사람들이 임종몽을 통해 그 트라우마를 다시 겪게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심한 죄책감에 빠질 수도 있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