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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7. 01:38 책에서 발췌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지음 / 유승종 옮김 / 어문학사)

 

 

제2부  소중한 것 (The Baby)

 

<225쪽>

영지주의 철학의 핵심에는, 만일 영지의 상태를 체험하게 되면, 삶이 하나의 꿈임을 인정할 것이라는 (터무니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주장이 있다. ...... 이교도 영지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철학의 목적은 꿈의 환상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동일하다.

그들을 만들어낸 의식을, 깨어있는 상태로 소생시키려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 초연하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삶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신비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미몽迷夢의 삶life-dream'에 빠져들면, 삶은 악몽이 된다. 그러나 깨어난다면, 아주 멋진 각양각색의 광채 안에서 삶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지는 자각몽lucid dream에 비견되는 자연스러운 상태다. 자각몽은 자기가 꿈을 꾼다는 것을 의식하는 상태에서 꾸는 꿈이다. 이와 비슷하게 영지는 자기가 살아간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것lucid living이다. 이것은 곧 삶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몽의 상태에서 비록 꿈은 멈추지 않지만,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꿈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삶을 살면, 미몽의 삶은 멈추지 않지만, 당신은 더 이상 미몽의 삶에 무의식적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



<234쪽>
지금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순간의 신비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살아있음'을 진정으로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완전히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이 페이지를 보고 있는 것처럼 확실히 알고있는 것이다. 지금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고, 자신은 항상 지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자신'은 무엇인가? 영지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난 자신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는 것이다. 델피에 있는 이교도의 유명한 신전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영원한 도전 대상이다. 기독교 교사 실바노스Silvanos는 '다른 모든 것을 알기 전에 당신 자신을 알라, 자신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 그러므로 자신 스스로가 경험의 경험자라는 것을 안다. 당신 자신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경험의 흐름을 목격하는 의식!이다.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약속한다. "나는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을, 정신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이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상상하는 것을 목격하는 의식이다. 만일 당신이 실제로 자신을 알게 된다면, 당신 자신이 바로 의식자체라는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영지주의 메시지다. 플라톤은 미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의식과, 항상 변하는 경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펴보라.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한순간에서 다음순간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를 목격하는 의식은 지금-그리고 지금-그리고 지금이다. 이것은 항상 존재하는 현존이다. 항상 지금인 '당신자신'이다.


<238쪽>
밤 사이에 꿈을 꿀 때, 당신의 정체성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당신의 외양적 속성은 꿈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사람이다. 그러나 본질적 속성은 꿈을 꾸고있는 의식이다. 외양적 속성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어떤사람이다. 그러나 본질적 속성은 모든 경험을 목격하는 의식이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꿈을 꿀 때처럼, 어떤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식하는 그 의식자체다. 밤 사이 꿈에 빠져있을 때, 꿈속의 상황이 때때로 '실제'처럼 무서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을 당신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와 똑같이, 삶의 경험에 빠져있을 때, 삶은 매우 '실제'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삶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을 당신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만일 의식이 자신의 본질적 속성임을 깨닫게 된다면, 실재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크게 변화할 것이다. 외양적인 존재는 당신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에이돌론eidolon'이라고 부른 것으로, 상image 혹은 외양appearance이다. 만일 이것을 깨닫는다면, 왜 플로티누스가 이렇게 말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육체와 실재 존재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꿈속에서 나타나는 허구를 실재로 착각하는 꿈꾸는 사람들과 같다.

......

참된 깨어남은 육체의 깨어남이 아니라,

육체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꿈에서 꿈으로 옮겨가는 것일 뿐이다.


<242쪽>
만일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이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자신은 죽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결코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자신은 육체의 탄생과 목격하는 의식이다. 의식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 안에서 미몽의 삶이 일어나고 있는 영원한 존재다. 육체는 시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고,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질적 속성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삶이 꿈과 같다면, 우리 모두가 동일한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우연의 일치인가? ...... 우리는 많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다. 이 말은 기이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모든 문화의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쳐 준 놀라운 메시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공유한 본질적 속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불교도들은 '불성', 힌두교도들은 '우주아Atman'라고 부른다. 당신은 이것을 '나'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입증하는 '나'를 경험한다. ...... '사람person'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인 '가면mask'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다양한 모습을 하고있는 우리는 하나의 의식이 쓰고 있는 다른 가면들이다. 이 하나의 의식은 플로티누스의 설명처럼 '불변하며, 불가분이며, 영원한 존재다'.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알 때, 당신은 신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꿈과 꿈꾸는 자는 개념적으로는 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다. 왜냐하면 꿈꾸는 자 없이 꿈은 없기 때문이다. 경험되는 대상과 바로 그 의식은 개념적으로는 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다. 왜냐하면 의식없이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대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그 자체다. 당신은 삶을 꿈꾸는 자이면서, 삶의 꿈 자체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고, 모든 사물이다. 르네상스의 신비주의자인 쿠사Cusa의 니콜라스Nicholas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우주는 우리가 그 안에 있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사람은 우주다.

 

 

<249쪽>
자각적인 삶은 '한 번에 두 방향'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객관적 관점it-perspective과 주관적 관점I-perspective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현실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 영지주의 철학과 만나면, 우선 비인격적 의식의 관념에 대해 종종 저항감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신을 인격적인 관점 대신 비인격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을 냉담한 것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삶은 꿈 속에 있는 사람 대신에 비인격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꿈꾸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양자, 즉 삶의 꿈속에 있는 사람과 동시에 그 꿈을 꾸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다. 이건 우리가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동정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 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친근해져서 외형적인 분리를 넘어서게 되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럴 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특정한 누구라고 제한할 때, 자신과 관계를 맺는 친구나 가족만을 사랑한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밖의 다른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존재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되면 우리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영지는 추상적인 지적 이해가 아니며, 실제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참으로 이것보다 좋은 건 없다. 

 

모든 것은 전체의 부분이므로, 모든 것을 사랑하라.  - 바실리데스Basilides, 기독교 영지주의자

단지 '우리'만 있을 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심원한 기독교 명령은 우리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실천 가능한 것이다. 의식으로서의 당신은 이미 위대한 사랑 안에서 조건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단지 이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255쪽>

어떻게 모든 사물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아직 제각기 분리되어 있는데.

- 오르페우스의 시The Odes of Orpheus

의식과 외양이라는 양극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의식과 외양의 대립이 일어날  때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칼 융이 말한 것처럼 '양극이 없다면 실재는 없다'. 양극은 역설적이다. 양극의 두 극은 조화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반대다. 그러나 양극은 오직 함께 있을 때만 존재하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일자一者다. 이것이거나 아니면 저것으로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하나다. 존재의 토대를 형성하는 주요 양극은 미몽의 삶을 사는 자와 미몽의 삶이다. 이들은 둘로 나타나지만 그 근본에서는 하나다.

 


<259쪽>
영지주의자들은, 깨달음의 여행은 단지 한 번의 삶에서가 아니라, 많은 삶을 거치면서 일어난다는 것을 깊이 사색하고 설명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양극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였다. 낮과 밤이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개인적 삶은 지속적이지 못하지만, 삶과 죽음은 지속된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윤회라고 불렀으며, 우리는 '재출현'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꿈속에서 자신이 죽는 꿈을 꿔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것이다. 당신은 꿈에서 깨어날 뿐이다! 꿈속에 존재했던 당신은 사라지고, 다른사람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미몽의 삶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죽게되면 다른 꿈속에서 다른사람으로 나타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당신'으로 살았던 경험에 근거하여, 다른 방식과 다른 관계 안에서 다시 '당신'이 등장하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 삶과 죽음의 지속적인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깨어난다. 각각의 윤회 또는 재생은 우리의 진화 정도에 따라 객관적인 한계를 변화시킨다. 한 개인이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순환을 체험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내재하는 불멸의 본질적 속성을 더 잘 알게 된다.

 

환생 또는 재생은 다시 태어났을 때, 살았던 '여기'에 다시 태어난다는 문자 그대로의 개념으로 종종 해석된다. 그러나 돌아올 '여기'는 없다. 우리가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없다. 미몽의 삶이 이 세계 혹은 더 나아가 이 우주의 체험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주는 바로 끝없는 심상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가능성들은 무한하다.


<264쪽>
우리가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을 때, 그 꿈은 꿈이지만 깨어있는 꿈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깨어있는 삶을 살 때, 세상에 개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깨어있는 상태에서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우리의 개성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고, 개성없이 살게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성스럽지만 무기력한 사람처럼 따분한 존재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근원인 일자一者의 의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고, 공포와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깨달음은 자신의 개별성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즉 자아의 축제이지, 자아파괴가 아니다. ...... 깨어있음은 삶을 긍정적이고, 생기있게 만드는 경험이다. 종교적 현실도피자를 위한 피난처가 아니다. 죽기를 바라며 침묵하는 가미카제식 명상가들이 갈망하는 미몽의 삶을 중단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269쪽>
[권위있는 가르침]이라는 영지주의 기독교 텍스트는 '가장 나쁜 악'은 '무지와 무관심'이라고 설명한다. 무지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무관심은 삶으로부터 물러서게 한다. 깨어있는 삶은 무지와 무관심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것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동적으로 포용하는 의식의 일자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세계의 추악하고 부적당하며 잔인한 것을, 아름답고 조화롭고 친절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체험하기 위해 청교도적인 깨끗한 삶을 살 필요는 없으며, 육체를 사원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다. 때때로 당신의 육체를 나이트클럽처럼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다! 당신은 육체의 쾌락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 정반대다. 깨어있는 삶은 미몽의 삶이 우리에게 제공한 모든 쾌락과 매서움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한사람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들과 그것의 즐거움들을 모두 통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왜 깨어나지 않고, 인간됨을 사랑하지 않는가? 나아가라.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275쪽>
기독교에서는, 당신은 죄를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은 예수를 지상에 보냈다. 예수는 당신을 위해 죽었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면 죽어서 하늘에 올라갈 것이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신의 사랑에 의해서! 이것은 섬뜩하고 결함있는 교리다.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옥이 존재하는 한, 천국에서 즐겁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친절함을 가졌다면, 어떻게 다른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면서 천국에서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매우 잔인해 보인다. 만일 죽은 뒤에도 인종차별정책을 시행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괴물같은 존재일 것이다. 

 

아무튼 이 잔인한 문자주의 버전의 기독교 메시지가 본래의 영지주의 가르침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 지옥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지옥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죽었으나 그 사실을 모른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은 육체가 죽어서 가게 될 곳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현실의 삶을 체험하는 두가지 방식이다. 우리가 자신을 분리된 현실의 인격체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본질적 속성이 '죽은 자'이며 삶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악몽이 된다. 그러나 일자를 깨닫는 순간, 지옥은 천국으로 변한다. 천국은 다름아닌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곳이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진리복음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삶이란 '깨달음에 의해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재발견한 사람들에게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는, '천국은 언제 도래합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천국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지상에 도래했으나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278쪽>
기독교의 본래 메시지는, 자신을 분리된 자아와 동일시하면 '죽은 자'이므로 우리는 삶에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번역해 사용하던 그리스어 '부활하다'는, 동시에 '자각하다,각성하다awaken'를 의미한다. 부활은 깨어남과 영지의 체험을 표현한다. 부활은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이 죽은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부활론]이라 불리는 기독교 문헌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은 환상이다. 부활·깨달음은 실재의 드러남이다' 이 문헌은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는 '안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가렸으며, 불멸을 길을 보여줬다'고 가르친다. 부활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 안에 들어있으며, 시간의 한계를 넘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의식의 공성空性emptiness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터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지가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영지주의 교사인 바울은 '자신 안에서 구세주가 드러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참된 메시지다.

 

잠든 자를 깨워라.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라. 구세주가 당신을 깨닫게 하라.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거기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

옛것은 사라지고 새 질서가 시작된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