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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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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9. 10:47 책에서 발췌

 

 

 

<107쪽>

"환생이라는 것은 인류가 태초 이래 지녀온 확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확신이다."   - 칼 융
"육체가 음식과 물로 성장하듯이, 개인의 자아는 야망, 감각적 인식, 시각적 인상, 혹은 미망迷妄을 거름 삼아 자라게 되어있다. 그 행위에 따라 다음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Svetasvatara Upanishad 5장 11절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죽고, 이곳에서 죽으면 또 다른 곳에서 태어나며,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고, 그곳에서 죽으면 또 다른 곳에서 태어나니 이것이 윤회의 수레바퀴다."   - 밀린다王問經,77

"목적지에 이른 자, 그는 모든 두려움과 욕망과 번뇌로부터 해탈하여 윤회의 가시밭길을 끊어버린 사람이니, 이번 생이 그의 마지막 삶이로다."   - 법구경 24장 351게송

"집착이 있기 때문에 타락이 있다. 집착이 없으면 타락이 오지 않는다. 타락이 오지 않는 곳에 평온이 있으며, 평온이 있는 곳에는 욕망이 없다. 욕망이 없는 곳에 오고 감이 없으며, 오고 감이 없는 곳에는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는 곳에는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으며 그 중간 세상도 없으니, 이것이 비극의 끝이다."   - 부처

 

 

<111쪽>

부처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그리고 힌두교에 환생의 교리가 채택되기 전부터 '엘레우시스 제전Eleusinian Mysteries'에서는 환생이 중심주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제전의 명칭은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14마일(2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엘레우시스Eleusis라는 작은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리스인들이 모국에 정착하기도 전인 BC 1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도 환생의식a rebirth ritual에 참여한 신임 사제들은 영혼의 상승현상과 사후의 삶을 얼핏 목격했으리라 여겨진다. ....... 그리스인들에게 영혼이체metempsychosis로 알려졌던 환생은 BC 7세기의 오르페우스 신비교Orphic Mysteries에 다시 나타난다. 그들의 경전에서는 환생을 '눈물나도록 진저리쳐지는 수레바퀴'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시대에 이르러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고대인들은 지구도 환생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이 세상이 주기적으로 큰 재앙에 의해 멸망했다가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고 했다. 필론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은 바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의 힘에 의한 것이며, 이 불은 만물 안에 내재해 있다. 그래서 장구한 시간의 순환 안에서 만물이 그 불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고, 또 그로부터 나온 만물이 새로운 세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BC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제일 먼저 환생을 믿은 민족으로 이집트인들을 꼽았다. 그러나 정작 이집트인들은 환생에 대한 가르침이 까마득한 옛날에 동양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경전에는, 비의적인 지식이 인격화된 오시리스Osiris가 어떻게 얼룩소의 모습을 하고 인도에서 이집트로 쫓겨나게 되었는지 그 경위가 언급되어 있다. 유럽의 드루이드족, 켈트족, 갈리아족의 신화에도 다채로운 환생설화가 들어있지만 그것의 유입경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웨일즈 드루이드족의 [바르다스Barddas]에 묘사되어 있는 '생성의 순환'이라는 표현은, 동양의 윤회사상과 아주 비슷하다. 영혼은 '완성과 지복의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 온갖 형상을 전전하며 이어진다. 불교의 열반nirvana과 빗댈 수 있는데, 열반의 세계란 마침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고대 유럽인들은 환생을 깊이 확신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죽음은 기쁘게 맞이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드루이드족의 확신은 훨씬 강해서, 만일 생전에 빌린 돈을 못갚고 죽으면 다음생으로 그 빚을 지고 간다고 여겼다!

 

정통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는 환생을 부정하지만 그들의 사유체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환생의 가르침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코란에는 분명하게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하여 알라신이 너를 이 세상에 나오게 했다. 저 들의 풀처럼 이 땅을 모체로 해서. 그런 다음 그는 너를 다시 땅 속으로 돌려보낼 것이며, 너에게 또 새로운 생명을 줄 것이다."   - Sura71:17-18

 

유태 신비주의의 원천인 카발라Kabala에는 환생 또는 길굴gilgul(=circuit, rotation)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카발라 철학의 고전[조하르Zohar(모세5경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주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영혼은 절대계에서 생겨났으며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모든 영혼 안에는 완성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 만일 한 번의 생애에 완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다음생, 그 다음생을 계속 살아야 한다. 신과 재결합할 자격이 될 때까지."

 

탈무드에 의하면, 아벨의 영혼은 셋Seth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는 모세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성서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세 명의 동방박사는 아마도 아기예수의 탄생을, 대선지자나 예언자의 환생으로 여겼을 것이다. 마기Magi라고 알려진 이 현자들은 페르시아에서 왔다. 그들은 불의 영혼 또는 영원한 의식이 계속해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믿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다.

 

 

<116쪽>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족은 지금도 조부모가 죽은 직후에 태어난 아이를, '아버지가 돌아오셨다'는 뜻의 바바툰데 또는 '어머니가 돌아오셨다'는 뜻의 예툰데라고 부른다. ......

 

호주의 원주민에게는 천상의 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상징물인 무지개 뱀Rainbow Serpent이 있다. 이 뱀은 전생의 영혼들이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 세상에 되돌아오는 길을 상징한다.

 

때로는 생전에 자신의 환생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이누이트족에게는 흔한 관습으로, 그들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감지하면 이웃의 젊은 부부를 찾아가 그들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하는 노인이 존경할만한 좋은 사람으로 보이면 젊은 부부는 오히려 그를 '첫아이로 갖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고 말하고, 그 노인은 자신의 운명을 알게되었으므로 침착하고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누이트족의 가정에서는 절대로 체벌이 행해지지 않는다. 전생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반대였을 수 있고, 미래에는 또 바뀌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128쪽>

영국왕 찰스2세의 전속사제였던 조셉 글랜빌Joseph Glanvil은 환생을 인정할 것을 교회에 청원했다. 그는 "환생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견해였으며 따라서 예수와 그의 사도들도 받아들였다.(Lux Orientalis,1662)"고 말했다. 또한 그는 "영혼은 다른 생에서 배운 여러 관념에 바탕을 둔 선입견을 가지고 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주장했다. 

 

 

<143쪽>

"(죽은 이에게) 과거는 방금 전에 일어난 것이고,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것이 바로 '바르도'의 체험이다."   - 초감 트룽빠

"남태평양의 뉴 헤브리디즈 제도의 신화를 보면, 육체를 떠난 영혼은 여러 언덕들을 지나 섬의 끝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나서 영혼은 회상의 장소에 들어간다. 그 곳의 이름은 바트도도나vatdodona라고 부르는데 '생각의 돌'이라는 뜻이다. 만일 그가 거기서 자식이나 아내 혹은 그의 소유물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그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살게 된다. 같은 장소에 바위 사이의 깊은 협곡이 있는데, 만일 골짜기를 깨끗이 뛰어넘으면 그는 영원히 죽고, 실패하면 다시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 R.H.코드링턴

 

뉴욕의 영화감독 빅터 소로우Victor Solow는 심장마비로 인하여 23분 동안 임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의료진의 결사적 노력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전에는 사후의 생에 대해 믿지 않았던 그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자신의 바르도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려움과 아픔을 느끼거나 사고할 시간이 없었다. ......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커다란 광명의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 ...... 내가 그 빛에 닿는 순간, 그 진동하는 빛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밝아지더니 나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고, 흡수하고, 동시에 나를 변형시켰다. 거기에 고통은 없었다. 느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으나, 완전히 나를 불태웠다. ...... 그 빛의 그물은 나를 유형에서 무형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 이 새로운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로부터 추출한 정수精髓였다.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의 개인적인 두려움이나 욕구, 희망, 욕망 속에 묻혀 있었으나 내가 항상 알고 있던 것이었다. 이 '나'는 에고와 아무 연관도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 변할 수 없고, 나누어지지 않고, 파괴될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이다. '나'는 손가락의 지문처럼 완전히 고유하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전체Whole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거기에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침내 우리는 왜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단지 살려는 열망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 더 높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론] 10권에서, 전사戰死한 지 12일 만에 다시 살아난 에르Er가 목격한 저승 이야기를 상세히 쓰고 있다. 영혼은 심판을 통과한 후, 다음 생에 태어날 육신의 모습을 선택할 기회를 받는다. 이 결정은 자신의 지혜에 따라 결정된다. 플라톤은 이렇게 썼다. "그 광경이 제일 궁금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영혼의 선택은 전생의 경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서, 영혼은 '잔에 가득 담긴 망각의 물을 마신다'고 했다.

"몸은 정말 레테Lethe의 강이다. 왜냐하면 몸 속에 떨어진 영혼은 모든 것을 잊기 때문이다."   - 플로티누스Plotinus

"나는 환생을 믿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불가능하다면 언젠가 다른 생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감싸안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모한다스 K. 간디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환생에 대한 믿음 중 가장 미개한 형태이다. 카스트는 전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계급을 바꿀 수 없다. 이 제도는 사회 정체停滯, 체념, 냉담, 고통과 우울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현생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다. 단지 내생의 지위만 바뀔 수 있는데 그것도 카스트의 의무와 금지사항을 얼마나 충실히 지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 카발라에 의하면, 바르도의 기간에 밤의 천사인 라엘라가 영혼의 윗입술을 가볍게 누르면서 코를 살짝 비틀 때 기억을 잃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입술 위에 천사의 손가락 자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Seth(Jane Roberts 참고)는 무엇이 바르도의 시간을 결정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대가 결정한다. 만약 그대가 매우 피곤하다면, 그때 그대는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현명하다면 그대는 지식을 소화할 시간을 갖고 다음 생을 계획할 것이다. 작가가 다음 책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거나, 참을성이 없거나, 또는 배움이 미흡하다면, 그대는 아주 빨리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항상 그대에게 달려있다. 예정된 운명은 없다. 지금 모든 해답이 그대 안에 있듯이 그때에도 해답은 그대 자신 안에 있다."

 

 

<159쪽>

바르도는 매혹적인 영역이다. 무디 박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육체로 돌아오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는지를 말한다. 경주용 차를 몰다가 사고를 당한 카레이서의 표현대로라면, '사우나와 마사지보다 천 배나 좋은 이완상태'를 떠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버지니아 타이Virginia Tighe는 모든 영혼은 생과 생 사이의 기다리는 장소에서 충만감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시카고 태생의 브라이언 자메이슨Bryan Jameison은 그가 바르도로 이끌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붕 떠있는 느낌, 부드러운 구름에 둘러싸인 느낌을 받았다고 전한다.

에디스 피오레 박사는 "어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순수한 에너지와 빛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 아름다운 호수와 풍경들, 빛나는 도시들을 보는 사람도 많다"고 말한다. 이렇게 엄청난 달콤함과 빛 이후에, (다시 아기로 태어나기 위해) 육체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지는 성의 소용돌이(독일의 최면치료사인 소왈트 데스레프젠Thorwald Dethlefsen의 피험자는 이것을 큰 진공청소기라고 표현했다)가 쇼크처럼 몰려온다. 그러니 헬렌 웜바크의 피험자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을 '슬프고 혼란스런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바르도에서 보낸 시간이 평균 52년이라고 증언했다.

모리슨 네더튼의 피험자들 역시 바르도에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했지만 그는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르도 상태에서 예상치 않았던 신비와 천국의 계시를 보았다고 해도,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더튼은 이렇게 썼다. "몸 밖에 있든, 몸 안에 있든 다를 게 없다. 우리가 몸 안에 있을 때 겪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몸 밖에서도 똑같을 것이다." 티베트의 성자들은 [사자의 서 死者의 書: Tibetan Book of the Dead. 티벳인들은 흔히 이 책을 '중간계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Bardo thos grol chen mo)'이라고 함]가 임종자를 위한 안내서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기를 원했다. 초감 트룽빠Chogyam Trungpa는 바르도의 체험은 우리의 기본 심리구조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바르도 상태의 비육체적 환희가 단지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의식수준의 현현顯現일 뿐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 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고도의 신비적 의식을 자극하기 위해 아산화질소와 에테르를 사용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의 평상시 깨어있는 의식은 여러 의식들 중 하나일 뿐이며, 다른 의식들은 얇은 막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꿈을 꾸는 때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는 매우 낯설다. 그러나 그 세계는 항상 존재하며 영적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소수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환각제의 도움을 받아 이 세계를 방문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최면이나 가장 깊은 명상 속에 들어감으로써, 또는 정신분열증이나 극도의 질병, 또는 극단적인 고립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세계에 들어간다. 혹은 사고의 희생자로서 죽을 뻔하다가 얼떨결에 바르도의 상태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이승에서의 시간이 끝나기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주적 탐험, 죽음의 한계를 넘어 존재의 심연에 깃든 그 장엄한 세계를 탐사하는 날이 오기를.

 

 

<276쪽>

"만일 아시아 사람이 나에게 유럽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유럽은 '인간이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며, 이 삶이 자신의 첫번째 삶이라는 착각에 빠진 세상'이다.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이는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비육체적인 것이며, 일시적인 것 속의 영원한 것임을 깨닫고 모든 슬픔을 벗어 던진다."   - 카타 우파니샤드 Katha Upanishad

"우리의 영원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면서도 계속 미워할 것이다."   - 유진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환생이라는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서 온다. 설사 만 명의 천사가 환생의 가르침을 전파하려는 다짐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다 해도,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서 환생의 진리가 싹트기 전에는 단 한사람도 개종시킬 수 없을 것이다."   - 시빌 릭Sybil L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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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피셔의 책은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이 책과, 조엘 L. 휘튼과 함께 쓴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둘 다 저작권법을 따른 정식번역본은 아니지만, 둘 다 좋은 책이고, 둘 다 한국어 제목이 낭패이고, 둘 다 일찍이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다. 이 책은 2000년에 [환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고 역시 절판되었다.

 

이 책은 니체를 인용하면서 끝난다. '다시 살고 싶어지도록 살라. - 그것은 의무다 - 어떻게든 그대는 다시 살아있을 터이니. Live so that thou mayest desire to live again - that is thy duty - for in any case thou wilt live again.' 계속해서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해 왔을테지만, 때가 되어 '사람으로 살아보기'를 끝낸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있을 것이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