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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전 경험의 또 다른 특징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편집하는 기능을 들 수 있다. 흔히 유년기에 기원을 둔 중요한 순간들이 요약이나 수정을 거쳐 재구성되면서 환자의 가장 절박한 욕구가 해소되거나 보상받게 된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73세의 팀은 임종 전 경험을 통해 가난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팀은 처음에 그의 부모님, 조부모님, 오랜 친구들을 보기 시작했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넌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팀이 숨지기 4일 전, 그는 꿈속에서 10대 초반의 소년으로 돌아갔다. 그는 버펄로 남부의 블루칼라 지역에서 대공황의 비극을 겪으며 자랐다. 그곳에서 그는 삶이 망가져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다. 그의 아버지는 저임금 일용직을 전전하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내야 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팀의 가족은 아등바등 겨우 먹고 살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과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팀은 꿈에서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꿈 속에서 그는 부엌을 지나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장면이 지닌 의미는 명확했다. 팀은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이 그의 가족에게는 힘의 원천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옆집 친구를 만나려고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 친구는 야구 방망이와 공을 들고 서서 팀에게 같이 야구를 하자고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평생 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장차 그의 처남이 될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는 손수레를 끄는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은 고용과 회복된 자존감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상처가 치유되면서 그의 어린 시절의 세계는 이제 안전한 삶이 유지되는 완전한 곳이 되어있었다.
팀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아닌, 어린시절의 사랑을 재발견한 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았다. 3막으로 이뤄진 연극같은 각 장면, 즉 기도하는 어머니, 공놀이하는 친구,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주었다. 팀도 그 꿈이 자신에게 온전함과 평온을 되찾아 준 일등 공신이라고 인정했다. 이러한 현실 재구성에는 훨씬 더 과감한 편집과정이 수반되기도한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말기 판정을 받은 89세의 베벌리는 임종몽을 통해 과거에 사랑을 주지 않았던 사람을 기억에서 지움으로써 과거에 자신을 사랑해 준 아버지와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베벌리는 괜한 집안일을 끝도 없이 시키는 매정하고 폭력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베벌리는 칫솔로 가구를 몇 시간씩이나 문질러 닦아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꾼 꿈은 그녀를 어린시절로 되돌려 놓았지만, 자신이 한없이 하찮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꿈 속에서 아홉 살 소녀로 돌아갔고, 당시 자신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줬던 아버지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우편배달을 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방과 후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벌리는 아버지의 우편배달 경로를 모두 다 꿰고 있었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 끄트머리에 있는 밭을 아버지가 언제 지나갈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베벌리는 신나게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직 남아있는 우편물을 함께 배달했다. 죽음을 앞둔 베벌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따뜻한 기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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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의 스콧은 임종 전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 발생했던 때로 되돌아갔다. 스콧은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8남매 중 한 명으로 대공황 시기에 성장했다. 스콧은 열 살 때 친구들과 기차에 뛰어오르다가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 사고로 놀림을 받았고 평생을 장애와 싸워야 했다. 혼자서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기도 쉽지 않았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도 없었다.
일자리가 비장애인에게 한정된 현실에서는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마저 공포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십대소년인 스콧을 위탁가정에 맡기기까지 했다. 그 결정에 스콧은 큰 수치심을 느꼈고, 자신이 앞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랑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스콧은 나중에 정비 일을 하는 안정된 직업을 구하고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계속 시달렸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계속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넘어 그의 정체성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죽음이 임박하자 스콧은 '즐거운 직장생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척척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꿈 속에서 옛 동료들은 번갈아가며 그에게 '훌륭한 일꾼이자 친구'였다고 말해주었다. 임종 전 경험은 종종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기억을 없애거나 새로운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고 그 원인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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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을 받은 참전용사 존은 말기 심부전 진단을 받았으나, 그 질환 때문에 불면증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용사였다. 그는 똑같은 악몽에 계속 시달렸고,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잠에서 깨곤 했다. 존은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과거의 경험담을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자세히 들려줬다.
존이 미해군 전함인 USS 텍사스와 나란히 노르망디 해안에 입항한 증기선 SS 제임스 L. 애커슨의 포병으로 배치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1944년 6월 7일, 존은 오마하 해변에 파견된 보병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해안가에 있는 다른 부대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부상을 당한 레인저 부대원들을 상륙정에 태우고 돌아왔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했지만 존은 오마하 해변에서 봤던 훼손된 시체들과 떠다니는 팔다리를 결코 잊지 못했다. 그 참상은 그의 뇌리에 박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그는 호스피스 병상에 누워 이미 전사한 미군들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죽음뿐이에요. 주위에 온통 전사한 병사들뿐이라고요."
며칠 뒤, 존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더니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 잠도 잘 자고, 웃음을 지으며 대화도 나눴다. 존은 최근의 꿈 덕분에 증세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존을 기분좋게 해 준 첫번째 꿈에서 그는 군대에서 제대증을 받던 날로 다시 돌아갔다. 두 번째 꿈은 악몽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결코 악몽이 아니었다. 오마하 해변에서 전사했던 한 군인이 그에게 다가와, "조만간 그들이 와서 너를 데려갈 거야."라고 말했다. 존은 '그들'이 전우들을 뜻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전우들과의 재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눈을 감고 쉴 수 있었다. 존의 임종 전 경험은 그가 겪은 전쟁의 참상을 재구성해 보여주었다. 67년간 전쟁의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며 싸워왔던 용감한 영혼은 마침내 그 부당한 고통과 엄청난 의무감,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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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는 호스피스 버펄로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녀는 90세였고, 폐섬유증을 앓고 있었다. 휴대용 산소탱크의 도움을 늘 받고 있음에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패트리샤는 심한 호흡곤란 때문에 병실을 가로질러 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녀의 코에 삽입된 튜브가 장식으로 보일만큼 패트리샤는 지적으로 활기가 넘쳤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를 환자라기보다는 대화상대로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자주 발견하곤 했다. 패트리샤는 죽음을 갈망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숨이 멎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싶어했다.
패트리샤가 아홉 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부터는 폐섬유증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아버지 곁을 지켜야 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어요. 그렇지만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꿈들을 꾸기 전까지는!" 패트리샤는 그 '말도 안 되는 꿈들'을 일기장에 자세히 기록했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우리와 기꺼이 공유했다. "난 준비됐어요. 나도 남미 원주민들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떠났어요"
패트리샤는 신체적으로 계속 쇠약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인생의 마지막 해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체력이 약해질수록 자신을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할 방법을 더 열심히 찾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줄 풍경화 모음집을 제작하기도 했다. 패트리샤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죽음이 곧 구원'이라는 말을 더 자주 했고, 그녀가 그런 소리를 너무 자주 하자 자녀들은 속상해하며 자기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패트리샤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쳐 온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살폈고 전쟁, 배급제, 군복무 중인 약혼자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등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다. 그녀는 '가장 노릇'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평생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왔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읽어 준 일기장 속의 한 구절은 그녀의 그런 성격적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제 나는 쓸모없는 존재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제 도움을 받아야 하고 상황이 더 나빠질 게 뻔하다. 그래도 한번 잘 해 보자고 다짐하고 있다. 여전히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속상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엄마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 척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영원한 석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기 고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엔 늘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눈을 감기 며칠 전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을 테니, 당신은 더 잘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최근 들어서야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패트리샤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어머니의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어요. 크리스마스 9일 전이었죠. 엄마는 폐렴을 앓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고 했어요." 패트리샤가 엄마의 비극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그 일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느껴졌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엄마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오늘 수학 100점 받았어.' 패트리샤는 말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말은 내 안을 계속 맴돌았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그 마지막 말은 내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고, 나는 엄마에게 선물을 준 것만 같았죠. 엄마는 그날 밤 돌아가셨어요."
패트리샤는 꿈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 자식들이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부모들은 그들을 어린시절로 데려가는 꿈에 대해 자식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말기환자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한다. 이게 바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현실이다. 패트리샤는 꿈 속에서 엄마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는 어린 소녀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엄마는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어요. 엄마는 구식 산소텐트 안에 있었죠. 엄마가 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사람들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어요. '엄마한테 인사하렴', 엄마가 '안녕'이라고 했고, 나도 '안녕'하며 인사를 나눴던 게 기억나요."
죽음이 임박한 패트리샤의 병실을 찾았을 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 꿈 속에서 누구를 보고 싶어요?" 그녀가 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예상했던 답이었다. 패트리샤가 숨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러 갔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숙여 어머니를 만났는지 속삭이듯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했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쪽을 가리켰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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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반드시 따뜻한 포옹처럼 다가온다거나, 꿈이 반드시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연구에 참여한 환자들이 꾼 임종몽 중 18%는 사실상 괴로움을 주는 꿈이었다. 예컨대, 살면서 트라우마에 시달려 온 사람들이 임종몽을 통해 그 트라우마를 다시 겪게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심한 죄책감에 빠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