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쪽>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노부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뚜렷한 의학적 예후 없이 배우자를 따라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그 원인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이는 어떤 낭만적, 시적 표현이 아닌 의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큰 상심은 심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단명은 흔히 상심증후군broken-heart syndrome이라 말하며, 의학용어로 스트레스 유발성 심근증stress-induced cardiomyopathy이나 타코츠보 심근증takotsubo cardiomyopathy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심증후군은 소리없이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베니는 건강했다. 당시 87세였던 그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이며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아내 글로리아가 갑작스러운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는 하루빨리 죽고 싶다는 바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그는 아내가 묻힌 묘지를 매일 찾아갔다. 하루에 세 번이나 찾아갈 때도 있었다. 그는 아내 글로리아의 묘비 앞에서 기도하거나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곤 했다. 딸 모린이 묘비 앞에 엎드려 있는 그를 일으키려 하자, 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둬."라며 꾸짖었다.
글로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두 달 후인 2016년 밸런타인데이에 베니는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묘지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모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죽기라도 하려는 거예요?" 베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구나." 베니는 죽어가는 아내에게 "이제 그만 다 내려놓아도 괜찮아."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모린은 글로리아의 묘비 주위를 서성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결연하고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베니는 글로리아의 묘 주변을 돌며 쌓인 눈 위에 하트 모양을 새기고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증세가 악화돼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 그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베니는 심근경색 진단에 이어 회복 불가능한 심장질환으로 발전했다. 아주 독립적인 존재였던 그는 이틀 만에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더 이상 글로리아의 묘를 찾아갈 수 없었던 베니는 꿈 속에서 그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딸 모린은 "아빠는 지금 꿈 속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밤에 베니가 사랑하는 글로리아에게 폴란드어로 불러주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베니와 글로리아는 폴란드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한때 지나치게 사교적이었던 베니는 식사시간에만 잠깐 깨어 있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자신의 아내를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180쪽>
지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성장 장애는 10년 전에 지니가 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받았던 전뇌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다른 부작용은 바로 뇌종양이었다. 처음에 의사는 진행이 더디고 심각하지 않은 암이라고 오진했다. 뇌종양 판정을 받았을 때 지니는 열네 살이었고, 가족들은 지니의 백혈병 완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지니의 엄마인 미셸에 따르면, 지니는 전뇌 방사선 치료의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인지능력이 손상됐음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한 아이였다. 지니는 여느 10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연예뉴스를 놓치지 않고 섭렵했다. 화려한 색상의 반다나를 머리에 둘러쓰고 부어오른 상처를 자신만의 패션감각으로 커버할 줄 아는 아이였다. 지니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면서 혹시 내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는지 물었을 때, 지니는 밝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 제가 아름답다는 사실이요.”
지니는 밤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 주변을 휙 지나가는 그림자가 가끔 보인다고 했다. 그림자에 놀라곤 했지만, 특별한 꿈을 꾼 뒤로는 그 그림자가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MRI 촬영 중 기계 안에서 잠들어 꿈을 꿨는데, 최근에 세상을 떠난 미미 이모가 성城 안에서 한 아기와 함께 창가에 서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태양이 보였다. 안전과 완벽한 보호를 암시하는 건축물에는 따뜻함과 환한 빛이 서려있었다. 미미 이모는 지니를 껴안고 귓속말로 "다시 내려가서 싸워야 해."라고 속삭였다.
지니는 암에 걸리기 전에는 수영하기를 좋아했고, 꿈속에서 본 그녀의 성에도 수영장이 있었다. 그 성에는 지니가 건강했을 때 즐겼던 활동들을 할 수 있는 여러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니는 또 꿈 속에서 자신이 알고 사랑하고 떠나보냈던 동물들로 가득한 동물원을 볼 수 있었다. 개, 고양이, 새들이 차례로 나타나 건강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MRI 촬영이 끝나고 잠에서 깼을 때 지니는 거의 희열에 들떠 있는 모습으로 엄마 미셸에게 대뜸 "난 괜찮을 거야. 혼자가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지니도 자신이 이 현실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이 진행되면서 지니는 더 많은 꿈을 꿨고, 세상을 떠난 동물들과 반려동물들이 ‘그 성’ 안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도 더 자주 보였다. 죽음이 임박했을 시기에 지니는 거의 15분마다 엄마를 불렀다. 어느 날 미셸이 딸 방에 있다가 다시 주방에 돌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지니가 활기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셸은 다시 딸의 방으로 가서 방금 전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물었다.
"하나님이랑 얘기하고 있었어. 하나님은 나이가 드셨지만 좀 귀엽기도 해." 놀랍게도 지니는 종교 없이 자랐고, 교회에 나간 적도 없었다. 이어 지니는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난 이제 안아플 거야. 내가 어디로 갈 건지 엄마도 잘 알잖아. 그 성으로 갈 거라는 거." 지니는 그 이후로 미셸을 더 이상 반복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지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위안의 원천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니는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185쪽>
6개월 전에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부부의 어린 외동딸 산드라는 골수암이 몸 전체에 전이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왔다. 산드라의 신체적 고통의 정도가 너무 심해 재택간호는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산드라는 호스피스 버펄로에서 안정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계속해서 "진통제를 좀더 놓아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산드라는 통증에 따른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산드라는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다. 산드라는 가족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진정제를 최대한 많이 투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산드라는 아파하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서 "잠만 잘 수 있게 약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산드라는 투병생활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산드라의 통증을 관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투약한 약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산드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제 산드라는 호스피스 버펄로에 계속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산드라의 부모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딸이 진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들은 명랑한 딸이 계속해서 치료 가능성, 기적을 믿기를 원했다.
산드라는 통증이 줄어들자, 근심걱정이 없던 예전의 어린 소녀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산드라의 생기 넘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산드라가 통증에 시달릴 때는 세상이 어두워 보일 정도였다. 그 아이는 장애가 있는 자기 팔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머리에 반다나를 두른 자신의 창백한 모습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서는 물론 벤치에서, 복도에서,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춤을 췄다.
산드라도 꿈을 통해 어른들이 숨기려고 했던 진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산드라는 산기슭을 오르고 있는데 밑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당기며 위에 있는 천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꿨다. 산드라는 십자가가 있는 산 정상에 다다르자 모든 고통이 사라짐을 느꼈다. 산드라는 꿈에 계속 보이는 이 생생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꿈은 고통과 함께 세상에 묶여 있는 산드라에게, 그 속박에서 벗어나 고통없는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산드라는 가족들 모르게 죽기 일주일 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계속 작별인사를 전했다. 그 아이는 시리아 친구들에게 이 글이 '당분간' 자신의 마지막 게시물이 될 것이라고 알렸다. 산드라가 아랍어로 남긴 글은 번역기능을 통해 읽어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애잔한 노래 같았다.
"인생을 논하기엔 아직 내가 너무 어리다는 걸 알아. 하지만 투병생활을 하면서 꽤 많이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해. 고통스럽고 불행하더라도 기쁨을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거나, 계획을 세우려 하거나, 나중을 위해 살지 마. 하루하루를 살면 돼. 현재를 즐기는 삶을 살아. 지금 이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고, 결국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될 테니까."
<194쪽>
"옳고 그름 그 너머에 들판이 있다. 나 그 곳에서 그대를 다시 만나리." - 루미
<222쪽>
28세 시에라의 경우, 그 가족은 갑작스러운 슬픔을 받아들여야 했다. 복부 불편감을 호소했던 시에라는 처음에 맹장염이라는 오진을 받았지만 사실은 광범위하게 전이된 결장암이었다. 시에라의 어머니 태미는 그 끔찍한 소식을 받고도 신기하리만큼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시에라를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에라는 화학요법을 받고 있던 병원에서 결혼식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에라에게는 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고, 아이 아빠인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을 오랫동안 꿈꿔 왔다. 암 전문의는 시에라의 어머니를 따로 만나 시에라가 결혼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두 달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결혼식은 치를 수 없었다.
시에라가 호스피스 버펄로에 입원하기까지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결혼이 아닌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입원치료를 받다가 한순간에 완화치료를 받아야 하는 그 상황을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시에라의 통증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그녀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시에라와 그 가족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려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게 급선무였다. 담당의사는 시에라의 동생에게 시에라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시에라의 동생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언니는 자기가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요."
시에라는 자신이 전보다 더 쇠약해졌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코앞에 닥친 죽음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저는 이겨낼 거예요."라고 힘없이 속삭였다. 태미는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억눌렀다. 의사는 시에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엄청난 사랑과 배려가 이 방에 가득하다고 말하면서 시에라에게 물었다. "시에라, 당신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나요?" 닭똥같은 눈물이 시에라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미는 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얼마 있다가 시에라에게 최근에 꿈을 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늘 이상한 건 아니에요. 가끔 잘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고요." 의사는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갔다. "혹시 꿈에 계속 보이거나 꿈 속에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나요?" 한참 정적이 흘렀다. 시에라는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의사의 어깨 너머를 훑어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태미는 울기 시작했다. 시에라가 그녀의 할아버지 하워드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이자 헌신적이고 가정적인 남자였던 하워드는 손녀 시에라와 각별한 사이였다. 하워드 할아버지는 시에라가 암 센터에 있을 당시에도 그녀의 꿈에 나타났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태미가 그 정적을 깨며 물었다. "시에라, 할아버지가 뭐라셔?" 시에라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답했다. "내가 어엿한 숙녀가 되고 엄마가 되어 대견하다고 하셔." 그녀는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통받지 않길 바라셔." 태미는 이제 그만 딸을 보내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가, 할아버지가 너를 데리러 오시면 할아버지랑 함께 가렴,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시에라는 4일 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생을 마감했다. 태미는 자신의 소중한 딸을 조금이라도 더 안아주기 위해 시에라의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고, 시에라는 그렇게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나는 시에라가 첫 숨을 쉴 때 그곳에 있었고, 그 아이가 마지막 숨을 쉴 때에도 그곳에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거예요."
<229쪽>
폴 역시 죽음을 앞둔 아내 조이스가 임종몽을 통해 그녀의 어린시절을 지탱해 준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폴은 아내가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놓아줄 수 있었다. 몇 년 후 폴 자신이 우리 호스피스에서 주관하는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환자가 됐을 때, 폴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얻게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죽음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폴이 가장 많이 꿨던 꿈은, 아내 조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그에게 손을 흔드는 꿈이었다. 폴은 조이스가 자신은 잘 있으며, 그도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켜주기 위해 미인대회에서나 볼 법한 '깜찍한 손인사'를 보여줬다고 내게 말했다.
폴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간호사인 그의 딸 다이앤은 아버지의 임종몽 이야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얻었다. 다이앤은 "아빠는 임종몽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셨어요. 아빠는 기분 좋은 꿈들을 기억하고 싶어했고, 우리도 그 꿈 이야기를 즐겁게 듣곤 했죠. 아빠와 함께한 그 마지막 며칠은 우리 남매가 아빠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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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전해주는 임종몽의 사례들은 세심한 심리치료 과정처럼 보인다. 그 '보이지 않는 치료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한편, 오랫동안 외면해 온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꺼내 치유한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죽어서 비판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한편의 영화라면 임종을 앞둔 사람은 각본, 연출, 주연을 동시에 해낸 예술가가 된다. '보이지 않는 치료사'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작업에 조심스레 관여하여, 초조해하는 예술가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극장에 걸린 후에 자책하지 않도록, 충분히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고, 자신에게 관대하라고...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의 몸으로 죽는 벤자민의 삶을 따라가며 다양한 인생, 다양한 죽음, 여러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임종몽에 대한 글을 읽으려니 이 영화가 계속 생각났다.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죽는 내용인데다가, 병원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데이지가 삶을 회상하는 형식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아름답고 처연하고 가슴 뭉클한 장면들의 향연같은 영화다.
영화의 서두에 '눈 먼 시계공'이 나온다. 날 때부터 앞을 못보던 그는 자식을 잃은 후, 최고의 시계를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배냇장님이 시계를 만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가 하는 일'에 대한 비유이겠지만, 신神에 대한 비유도 된다. 시계공은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獨生子'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시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신은 시간을 만들어놓고 잠적했다.^^
"탯줄을 자를 때 곁에 있는 건 쉬워요. 누구에게나 굉장한 경험이고 멋진 일이죠.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보며 임종을 지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도 그 경험을 했어요. 아버지께서 2년째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셨죠. 어느날 밤에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께서 이러시더군요. '아버지가 허리 아프시대.' 부모님 집으로 가서 구급차를 불러야 했어요.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 반년은 이렇게 지내야겠구나.'
그날 밤 병원에서 병실로 들어가보라고 하더군요. 얼마 안남았다고요. 우리를 병실로 안내하더니 5분 정도 남았대요. 너무 갑작스러웠고 저는 할 말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죠. 들어가서 아버지를 봤어요. 호흡장치를 떼는데, 알아보지는 못해도 이제 끝이란 건 아시는 눈빛이었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귀에 속삭이면서 진정시키려고 애쓰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나? 당신이 살아있을 때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나?' 그건 한마디로 불가능해요. 안겪어보면 설명이 안돼요. 하지만 저는 그게... 사랑의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낳는 것보다 훨씬 심오합니다. 물론 저도 딸이 태어났을 때 아주 행복했지만요." -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사무실이나 책상 정리해놓은 걸 보고, '나의 강박증은 이 형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구나.' ... 나도 내가 힘들어서 병이 날 지경인데 이 사람 가까이 있다가는 병이 도지겠다 싶었어요.ㅎㅎ" - 봉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