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왼쪽 눈은 언제나 0.1이라는 판정을 받지만, 접사에 특화된 카메라렌즈처럼 가까운 건 아주 잘 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눈이 내리면 옷소매에 눈송이를 받아서 숨을 멈추고(입김에 녹지 않게) 들여다보는 게 특별한 행복이었다. 나풀거리며 천천히 내려오는 함박눈만큼 '확실한 행복감'을 주는 것도 없다. 함박눈은 눈결정을 품고 있다.
나의 10대 시절은 그다지 좋은 날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박눈이 평펑 내리면 막연히 행복해져서 밖으로 뛰어나가 눈을 맞고 다녔다. 아무도 안밟은 눈밭을 밟고 싶었지만 부지런한 개들이 안다닌 데 없이 발도장을 찍어놔서 나는 그놈들과 경쟁해야 했다. 내가 뛰면 개들이 더 신나서 내 앞과 옆에서 마구 달렸기 때문에 나는 깨끗한 곳에 내 발도장을 찍을 수 없었다. 개들과 숨차게 논바닥을 뛰어다니면 오빠가 '쟤는 역시 똥개가 맞다'며 놀렸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난 주 수요일 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추운 날씨였음에도 바람이 심해서였는지 결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몇년 만에 보는 환상적인 풍경에 감탄하고 감사하면서, 내리는 눈 속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하루만에 사라졌지만.
그리고 어제 다시 눈이 내렸고 이번엔 함박눈이었다! 공원으로 밤산책을 나갔다. 휴대폰용 확대경(조명도 있는)도 가지고서. 하지만 이래저래 완전 무용지물이었다. 눈덮인 순백색공원은 이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다. 눈으로는 볼 수 있는데 왜 사진에 담을 수는 없나. 에모토 마사루처럼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 하나. 그래도 각도에 따라 눈결정이 반사하는 빛이라도 담아보자 하고 사진을 찍어봤는데.... 요 모양이 되었다.
안되는갑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릴 때 밭에서 보았던 '목화'를 연상시키는 나무를 찍었다. 벤치가 있는 나무데크 가장자리엔 밤마다 LED등이 쪼르륵 켜지는데, 그 위로 눈이 쌓여서 왕방울만하게 보이는 게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눈결정이 살아있었다. 폰으로 사진을 찍어보니 배경의 LED 덕분에 결정이 보였다! 빛을 낼 뿐, 열은 거의 내지 않는 이 조명을 발명한 이에게 인사하고 싶다.^^ 내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눈은 본래 희지 않다. 투명하고 얇은 얼음에 누군가가 정교하고 화려한 육각무늬를 조각해 놓은 듯한 형태인데, 이것들이 서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흰색으로 보인다. 그 문양과 크기가 워낙에 다양해서 같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자석과 야광(축광), 잘 때 꾸는 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마법... 그리고 이 '함박눈'은 진심 신기하고 신비하다. 원래는 온전한 형태였겠지만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 많이 부서지고 또 너무 쉽게 녹기 때문에, 정말로 대단한 이 '보석 전시회'는 대개 몇시간 또는 하루 안에 끝난다. 이 황홀한 작품들의 작가는 누구인가.
집에 돌아와 내가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확대해 보면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는데, 육안으로 본 바와는 달리 희한한 로즈골드색이 되었다. 폰카메라의 한계, 추위에 더 흔들렸던 손, 거기에 나의 기대감이 더해져 이런 사진들이 나왔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가, "좋은 사진은 좋은 장비에 달려있지 않다. 찍는 이가 피사체를 '좋아하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눈결정을 사랑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그는 옳다.^^
에모토 마사루의 연구는 모든 사람이 곰곰히 생각해 볼 만한 숙제를 준다. 사람의 의식은 물과 얼음 즉, 물질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세상을 뒤덮는 저 어마어마한 수의 눈결정들은 누구의 의식으로 태어난 것일까. 인류는 긍정성만큼 부정성도 함께 투사하기 때문에 눈결정들은 우리의 작품이 아니다. 그 의식을 신, 천지신명, 우주의식... 뭐라고 정의하든간에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 사랑을 퍼부어주고 있다.
<기도하기 전, 기도한 후>
<단어를 주었을 때>
"사랑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뒤에 있는 힘이 의심할 여지없이 수소폭탄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을 가진 한사람이 온세상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참된 자아이고, 바로 신입니다." - 레스터 레븐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