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스 H. 립튼 지음, 이창희 옮김, 2011
<27쪽>
여러분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포생물학자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사실상 사람은 숫자가 50조에 이르는 단세포 시민들로 구성된 상호협력 공동체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거의 대부분 아메바 같은 모양으로, 생존을 위해 상호협력 전략을 발전시켜 온 독립 개체들이다. 달리 말해 인간은 기본적으로 '집단 아메바적 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어떤 나라가 그 국민의 특성을 드러내듯, 각각의 인간도 자신을 구성하는 세포 공동체의 기본 성질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82쪽>
자, 이제 엄청난 실험이 시작된다...... 기대하시라.
과학자는 싫다는 세포를 수술장으로 끌고 가 묶어놓는다. 현미경 수준의 미세한 조작장치를 이용하여 과학자는 바늘처럼 생긴 피펫을 세포 위로 가져간다. 과학자는 조작 장치를 아래로 내려 피펫을 원형질을 지나 세포의 내부 깊숙이 집어넣는다. 이때 약간의 흡입력을 가하면 핵이 피펫으로 빨려들고, 과학자는 피펫을 세포로부터 빼낸다. 핵이 들어있는 피펫 아래에는 제물이 된 세포가 누워있다. '뇌'가 제거된 채 말이다.
잠깐! 그런데 세포가 여전히 움직인다! 세상에~ 세포가 아직 '살아있다'!
피펫에 찔린 상처는 아물고, 마치 수술받은 환자가 회복되는 것처럼 세포는 비틀거리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마 안 있어 세포는 벌떡 일어서고(발이 달렸다면) 의사 따위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듯 현미경의 시야를 벗어난다.
핵을 제거해도 많은 세포는 유전자가 없는 상태에서 두 달 혹은 그 이상까지 살아남는다. 핵을 제거해도 세포는 뇌사상태에서 생명유지장치에 의지하며 누워있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 세포들은 활발하게 먹이를 소화하고 대사하며, 여러가지 생리적 시스템을 균형있게 유지하고(호흡, 소화, 배설, 운동 등), 다른 세포들과 의사소통할 능력을 유지하며,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성장반응이나 보호반응 등 적절한 반응을 일으키는 능력도 여전히 갖고 있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핵을 제거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유전자가 없으므로 세포는 분열할 수 없고, 원형질의 정상적인 마모로 인해 손상되는 단백질을 재생할 수도 없다. 결함있는 원형질 단백질을 대체할 능력을 상실함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고 결국 세포는 죽어 없어지고 만다.
위의 실험은 핵이 세포의 '뇌'라는 생각을 시험해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핵이 제거됨과 동시에 세포가 죽었다면 실험결과는 적어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하다. 핵을 제거해도 세포는 여전히 복잡하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렇다면 세포의 '뇌'는 여전히 멀쩡하며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핵이 제거되어 유전자를 잃은 세포가 생물학적 기능을 계속 유지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롭게 발견된 일이 아니다. 이미 100여년 전 당시의 발생학자들은 분열 중인 난세포에서 핵을 제거하여 이렇게 핵이 제거된 단 하나의 난세포가 포배기(세포 수가 40개 이상이 되는 단계)까지 갈 수 있음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오늘날 핵이 제거된 세포는 바이러스 백신 제조과정에서 세포배양지의 '살아있는 먹이' 층으로 쓰인다.
핵과 그 속의 유전자가 세포의 뇌가 아니라면, 세포의 삶에서 DNA가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핵이 없는 세포가 죽는 이유는 뇌를 잃어서가 아니라 생식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이 세포들은 망가진 단백질을 교체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복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핵은 세포의 뇌가 아니라 생식기관인 것이다! 과학은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가부장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식기와 뇌를 혼동하는 실수는 이해해줄 만 하다. 수컷들은 생각을 생식기로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듣는데, 그렇다면 과학이 본의 아니게 핵을 세포의 뇌로 오인한 것도 그렇게 놀랍지만은 않다.
<115쪽>
그날 새벽 2시경 나는 세포막의 구조적 조직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선 막대사탕 같은 모습의 인지질 분자부터 생각했는데, 이 분자들은 완벽한 대열을 갖추어 행진하는 군인들처럼 세포막 표면에 배열되어 있다. 구성 분자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배열된 구조를 과학에서는 '결정'으로 정의한다. 결정에는 두 가지 기본형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결정은 단단한 광물질로, 다이아몬드, 루비, 소금 등이 있다. 또 한 가지 결정은 물론 구성분자들이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좀 더 유동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디지털 시계나 노트북 컴퓨터의 스크린에 사용되는 '액정'이 그 친근한 예다.
액정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앞서 예로 든 군인들의 행진을 보자. 이 군인들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개체이기는 하지만 모퉁이를 돌 때 규칙적인 구조를 유지한다. 그러니까 자유로이 흐르는 액체처럼 행동하면서도 결정으로서의 조직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포막의 인지질 분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유동성 결정구조로 되어있어서, 세포막은 터지지 않고도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이는 탄력있는 장벽으로서의 세포막이 갖춰야 할 특성이다. 이러한 세포막의 성질을 규정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세포막은 '액정'이다."
그러자 인지질로만 된 세포막은 올리브가 없는 빵과 버터샌드위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앞서 설명한 실험에서 색소는 버터라는 지질층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버터샌드위치는 절연체라는 얘기다. 그러나 올리브를 집어넣으면 어떤 것들은 막을 통과하는 반면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막에 대한 설명에 다음 문구를 덧붙였다. "막은 '반도체'다."
마지막으로 막에 대한 설명에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막단백질을 집어넣었다. 이들은 수용기단백질, 그리고 통로라고 불리는 효과기단백질이다. 이 두 가지를 집어넣은 이유는 이들 단백질이 영양소를 세포로 들여보내고 노폐물을 배출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에는 "수용기와 통로"가 있다고 쓰려던 차에, 게이트와 수용기가 거의 동의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설명을 이렇게 끝마쳤다. "막에는 '게이트'와 통로가 있다."
그러고 나서는 뒤로 기대앉아 방금 쓴 막에 대한 설명을 다시 읽어보았다. "세포막은 게이트와 통로가 있는 액정반도체다." 그러자 얼마 전에 이와 똑같은 문구를 듣거나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그 때는 어디서 같은 문구를 듣거나 읽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물학과 관련된 발언이나 문헌에서 얻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는데 책상에 놓여있던 신형 매킨토시 컴퓨터로 눈이 갔다. 이 컴퓨터는 나의 첫 컴퓨터였다. 그런데 컴퓨터 옆에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이해]라는 빨간 표지의 책이 놓여 있었다. 문외한들을 위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한 책을 얼마 전에 사둔 터였다. 이 책을 펼쳐보았더니 서문에 컴퓨터 칩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칩은 게이트와 통로가 있는 결정 반도체이다."
칩과 세포막을 똑같은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나는 1, 2초 정도 멍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몇 초에 걸쳐 나는 생명체인 세포막과 실리콘으로 된 반도체를 열심히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정의가 같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고 또 한 번 놀랐다. 세포막은 실리콘 칩에 상응하는 구조나 기능을 갖고있는 것이다!
-중략-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세포막과 컴퓨터 칩이 상응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세포의 작용을 컴퓨터에 비교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으로부터 얻은 첫 번째 깨달음은 컴퓨터도 세포도 모두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또 한 가지의 깨달음은 프로그래머가 컴퓨터와 세포 '외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행동과 유전자의 활동은 세포에 다운로드된 환경으로부터의 정보와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핵은 단순한 메모리 디스크 내지는 하드드라이브로, 단백질의 합성을 암호화하는 DNA프로그램이 들어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억장치를 이중나선 메모리디스크라고 부르자. 컴퓨터의 경우 워드프로세서, 그래픽 프로그램, 스프레드 시트 같은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담은 메모리 디스크를 컴퓨터에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컴퓨터 본체의 메모리에 다운로드하고 나면 현재 작동중인 프로그램을 방해하지 않고도 디스크를 컴퓨터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 핵을 제거하여 이중나선 메모리디스크를 제거하더라도 단백질공장으로서의 세포활동은 지속된다. 왜냐하면 단백질 공장을 만들어낸 정보가 이미 다운로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핵이 제거된 세포가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는 오래된 단백질을 대체하거나 다른 단백질을 합성하기 위해 각각의 이중나선 메모리디스크 속에 들어있는 유전자 프로그램이 필요할 때 뿐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당초에 천동설을 믿는 천문학자로 훈련된 것처럼 나는 핵중심적 사고를 하는 생물학자로 교육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가 들어있는 핵이 세포의 프로그램을 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포의 경우 데이터는 세포막의 수용기에 의해 입력되는데, 이는 컴퓨터의 '키보드'에 상응한다. 수용기는 세포의 '중앙처리장치(CPU)'에 해당하는 세포막의 효과기를 자극한다. CPU에 해당하는 효과기 단백질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행동의 언어로 변환시킨다.
그날 새벽에 나는 비록 생물학계가 여전히 유전적 결정론에 머리를 파묻고 있지만, 마술사 세포막의 신비를 계속해서 상세하게 풀어내는 첨단 세포연구 결과는 이들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환골탈태의 순간, 나는 이 깨달음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나는 외진 곳에 혼자 있었다. 집에는 전화도 없었다. 그런데 의대에서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는 누구에겐가, 아무한테나 이 놀라운 발견을 이야기해 주려고 학교로 달려갔다.
-중략-
영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맺음말에서 다루겠다. 현재로서는 삶의 통제권이 수태의 순간 작용하는 유전적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는 마술사 세포막의 교훈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내가 지금 쓰고있는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의 주인인 것 만큼이나 우리는 스스로의 생물학적 과정의 주인이다. 인간은 각자의 생체컴퓨터에 입력되는 데이터를 편집할 능력이 있다. 마치 이 글을 쓰는 내가 단어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막단백질이 어떻게 생체의 과정을 조절하는가를 알면 인간은 유전자의 희생물이 아니라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163쪽>
17세기에 르네 데카르트는 마음이 신체의 성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데카르트는 신체는 물질로 되어있고 마음은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비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되어있다고 보았다. 마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해결 불가능한 철학적 난제를 남겼다. 물질만이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비물질인 마음이 어떻게 물질인 신체에 '연결'될 수 있는가? 1960년 이전에 길버트 라일은 자신의 저서 [마음의 개념](1949)에서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은 그 이후 데카르트가 생각한 비물질적인 마음에 대한 정의로 널리 쓰여왔다.
<195쪽>
인간의 내피세포를 배양하며 살펴보니, 이들은 배양접시에 독성물질을 떨어뜨리면 그로부터 도망쳤다. 이는 마치 사람이 사자나 강도로부터 도망치는 것과도 같다. 이들은 또한 인간이 아침, 점심, 저녁 식사나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영양소를 향해 움직여갔다. 서로 반대되는 이 두 가지의 움직임은 환경자극에 대한 세포의 기본적 반응을 이룬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호, 예를들어 영양소 같은 신호에 다가가는 것은 성장반응의 특징이다. 독성물질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신호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것은 보호반응의 특징이다. 어떤 환경자극은 중립적이라는 것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이들은 성장반응도 보호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183쪽>
2002년에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에서 베일러 의대의 연구팀은 사람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중증의 무릎통증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조사했다. 이 논문의 주저자인 브루스 모슬리 박사는 무릎수술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훌륭한 외과의사들은 모두 수술에서 위약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슬리는 수술과정의 어느 부분 때문에 환자의 증상이 개선되는지를 알고싶었다. 그래서 연구에 참가한 환자들을 세 개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그룹에 대해서는 손상된 연골을 깎아냈다. 두 번째 그룹에 대해서는 무릎관절을 세척하여 염증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물질을 제거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무릎 관절염에 대한 표준 치료법이다. 그런데 세 번째 그룹에 대해서는 '가짜' 수술을 실시했다. 일단 환자를 마취시킨 모슬리는 관례에 따라 세 군데를 절개한 후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심지어 관절을 세척하는 척 하기 위해 소금물을 써서 물소리를 내기도 했다. 40분이 지난 뒤 모슬리는 정말로 수술을 한 것처럼 절개부위를 봉합했다. 그리고 세 그룹 모두에게 운동처방을 포함한 수술처방을 내주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수술받은 그룹은 예상대로 증상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가짜수술을 받은 그룹도 다른 두 그룹과 같은 정도의 개선을 보였다.
미국에서 매년 650,000건의 무릎관절염 수술이 이루어지고, 건당 수술비가 5,000달러에 이르지만 모슬리에게는 결과가 분명했다. "외과의사로서 내 기술은 이 환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무릎관절염 수술로부터 오는 혜택은 모두 위약효과였다." TV방송은 이 충격적 결과를 생생하게 보도했다. 가짜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나도록 그 수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가짜' 그룹의 일원이었던 팀 페레즈는 수술 전에는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지만 이제는 손자들과 농구를 즐긴다. 그는 [디스커버리 헬스]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이 책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요약했다. "세상에는 마음을 모으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중략-
1997년에 이팩사라는 약의 효과를 실험하는 임상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는 재니스 숀펠드라는 캘리포니아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자신이 사실은 위약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앞서 무릎수술에서 등장한 페레즈 만큼이나 경악했다. 위약을 먹으니 30년이나 그녀를 괴롭혀온 우울증이 해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험과정 전체에 걸쳐 뇌를 스캔해본 결과 전전두엽의 활성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심적으로만' 개선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달라지면 몸도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숀펠드는 구토감을 느꼈는데, 이는 이펙사의 흔한 부작용이다.
-중략-
내슈빌에 사는 의사 클리프턴 미더는 30년에 걸쳐 노시보효과(플라시보효과와 달리, 마음이 부정적 사고를 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는 효과)를 연구해 왔다. 1974년에 미더의 환자 중 샘 론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은퇴한 구두 세일즈맨인 론드는 식도암을 앓고 있었다. 당시에 식도암의 치사율은 100%로 알려져 있었다. 론드는 식도암 치료를 받았지만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식도암이 재발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식도암 진단이 나오고나서 몇 주 뒤에 론드가 사망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론드가 사망한 뒤 부검을 해보니 몸에 별로 암이 없었고, 목숨을 앗아갈 만한 정도의 암은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저 간에 점 두 개, 폐에 하나가 발견되었을 뿐, 론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다들 생각했던 식도암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미더는 [디스커버리 헬스] 채널에서 이렇게 말햇다. "론드는 암을 갖고 죽었지만 암 때문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식도암 때문이 아니라면 론드는 뭣 때문에 죽었을까? 론드는 죽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죽었을까? 론드가 죽은지 30년이 지난 뒤에도 이 일은 미더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암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론드의 주변인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죠...... 어떤 식으로든 내가 그의 희망을 빼앗아버린 걸까요?"
이렇게 안타까운 해약의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의사, 부모, 교사들이 어떤 사람을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도록 세뇌시켜 희망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239쪽>
생각있는 부모노릇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나는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국립 출산전교육협회'가 제작한 비디오도 보여준다. 이 비디오는 보모와 자궁 속의 아기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비디오에서는 엄마를 초음파 장치에 연결하고 나서 아빠와 말다툼을 하도록 한다. 말다툼이 시작되면 아기는 놀라서 펄쩍 뛴다. 논쟁이 절정에 달해 유리잔이 깨지는 데까지 가면 놀란 아기는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는 마치 트램펄린에서처럼 튀어오른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양 보급 이외의 자극에 반응할 능력이 없다는 허황한 생각이 있는데, 초음파장치라는 형태의 현대과학은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잠재워버렸다.
<244쪽>
분명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형태를 갖춘 양육이며, 어른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을 관찰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예를들어 고아원에서 아기들을 요람에 눕힌 채로 먹이기만 할 뿐 아무도 웃어주거나 안아주지 않으면 이들에게는 발달상의 문제가 생기며 이 문제는 아주 오래 간다.
하버드 의대의 신경생물학자인 메리 칼슨은 루마니아의 고아들을 관찰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을 안아주지도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 고아원이나 열악한 놀이방에서는 아이들의 성장이 저해되며 행동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나이가 몇개월부터 세 살에 이르는 60명의 루마니아 아이들을 연구한 칼슨은 아이들의 타액 샘플을 분석하여 코티솔 농도를 측정했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겪을수록 발달상의 문제를 겪을 위험이 커졌다.
칼슨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또한 원숭이와 쥐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신체적 접촉,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의 분비, 사회적 발달 등 세 가지 사이의 중요한 연관을 보여주었다. 미 국립보건원의 인간 건강 및 아동발달 부서의 전 책임자였던 제임스 프레스콧의 연구결과도 갓 태어난 원숭이를 엄마로부터 떼어놓아 신체적 접촉을 못하게 하거나 다른 원숭이와의 사회적 접촉을 차단하면 비정상적으로 스트레스가 높아지면서 과격한 반사회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레스콧은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가를 바탕으로 인간의 문화에 대한 평가를 병행했다. 그 결과 어떤 사회가 어린이를 안아주고 사랑해주며 성(性)을 억압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평화롭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평화로운 사회의 부모는 하루종일 아이를 안거나 업고 다니는 등 아이와의 광범위한 신체적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유아, 아동, 청소년들이 광범위한 신체적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이런 두 집단간의 차이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신체적 접촉에 노출되지 못한 아이들이 체성감각장애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체성감각장애의 특징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준의 급상승을 생리적으로 막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폭력적 행동의 서곡이 된다.
<251쪽>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감정은 신비에 대한 느낌이다. 이는 모든 진정한 과학의 힘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017/06/28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