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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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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19. 18:04 영화

 

 

 

영화는 1, 2,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세 명의 인물이 세 편 모두에 다른 역할로 등장하는데, 이름의 유사성(게리-개빈-게브리얼, 마거릿-멜리사-메리, 새라-수전-시에라)은 그들이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동일인'임을 암시한다. 그들은 다양한 인격personality으로 분열한다. 마치 하나의 씨앗이 수많은 나뭇가지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또는 하나의 노래가 온갖 버전으로 편곡되고 변주되는 것처럼.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잠재적으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두 여성 캐릭터의 선명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포스터는 남주 1인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단 하나의 주체主體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 개의 세상 속 세 명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다층적 구조 안에서 형사, 배우, 작가, 연출자, 리얼리티TV 출연자, 게임개발자, 게이머이기도 하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창조하고 있다. 

 

오프닝. 아주 밝은 빛 속에서 누군가가 초록색 끈을 자르고 이리저리 꼬아서 팔찌를 만든다. 그는 세심하게 왼손과 입을 사용해 오른쪽 손목에 팔찌를 묶는다. 불현듯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한손은 팔찌를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손이고, 다른 한손은 창조된 세계에 구속된 손이다. 손은 언제나 '지어냄'을 뜻한다. 이 장면은 태초의 '빛' 속에서 시작된 창조를 은유하고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 시작했고, 직접 창조했고, 그 속으로 들어갔고, 작업에 심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먹고 일개 인간이 되었다. 기억을 상실한 길 잃은 아이가 되었다. 

 

1부 [수감자der gefangene]에서 게리는 유명한 수사드라마에 출연중인 배우로서, 실수로 자기집을 불태우는 바람에 '가택연금' 중이다. 마거릿이라는 젊은 여성이 '세간의 소란으로부터' 게리를 격리, 보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거릿은 유쾌하면서 엄격하다. 규칙을 정하고 그의 동선을 제한하는 한편으로 그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제공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고, 트램펄린에서 함께 뛰어논다. 옆집에는 매력적인 아기엄마 새라가 살고 있다. 어딘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새라는 다가서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면서 게리를 유혹한다.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숫자 '9'가 게리 앞에 줄지어 나타난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혼란에 빠진 그는 마침내 '금지된 선'을 넘어 빠져나오고, 눈부신 섬광과 함께 그 세계는 한 순간에 사라진다. 


2부 [리얼리티TV]의 개빈은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다. 멜리사는 배우이자 개빈의 오래된 절친이고, 수전은 개빈과 드라마 제작을 협의, 진행하는 제작사의 담당자이다. 개빈은 새로운 TV드라마를 준비중인데, 그의 바쁜 일상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촬영하고 있다. 즉 그는 드라마 제작에 열중하고 있는 극작가인 동시에 어떤 '리얼리티TV쇼'의 주인공이다. 모든 것이 수월해 보이던 초기와는 달리 일은 점점 꼬이고 악화되어 개빈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엎어지고 만다. 분노와 환멸 속에 망연자실하던 그의 눈 앞에 숫자'9'가 나타나고, 갑자기 화면에 'Exit Now? Unsaved changes will be lost.'라는 대화창이 뜬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Exit'를 클릭한다. 게이머가 게임에서 빠져나오듯이 또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3부 [노잉Knowing]은, 2부에서 개빈이 제작하던 드라마의 내부에서 시작하여 1,2,3편에 걸쳐 진행된 미스테리를 정리함으로써 끝난다. 게브리얼은 비디오게임 디자이너다. 그에게는 아내 '메리'와 어린 딸 '노엘'이 있다(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천사, 성모, 성탄). 그들은 가족산행을 나왔다가 차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산 속에 고립된다. 아내와 딸을 차에 남겨둔 채 게브리얼은 도움받을 차량을 찾아 나서고, 시에라를 만난다. 시에라는 그가 원하는 도움이 아닌 '근원적인 도움'을 준다. 그가 삶이라고 믿는 이 '놀이'를 그만 끝내라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마침내 그는 모든 걸 기억해내고 떠난다. 다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그 '세상'만큼은 남겨두고 간다.

 

인간의 삶을 떠나면서 그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세상을 '존재할 수 있는 최상의 세계'로 조율하여, 메리에게 인계한다. 그는 상징적으로 손목의 팔찌를 끊음으로서 해탈!하고, 세상은 하나의 빛으로 축소되어 메리의 눈 속으로 수렴된다. 새 세상에서 눈을 뜬 메리는 잃을 뻔 했던 '삶'을 되찾은 기쁨으로 딸과 마주보고 웃는다. 메리와 노엘은 이전세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이후세계로 왔기 때문에 '세상은 그저 환영이고 삶은 게임일 뿐'임을 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지식'을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교사가 될 것이다. 

 

영화는 '수감자', '감옥'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넘쳐나는 창살과 문과 창문들, TV와 그림의 프레임, 그리고 팔찌, 전자발찌, 수갑, 거미줄, CCTV, 경보음, 탈출, 체포, 재수감 그리고 거울과 시계... 대상과 (관찰자로서의)자신이 함께 투영된 유리창, 디스크를 넣으면 자동연주되는 피아노도 나온다. 오디오기기나 전자키보드가 아닌 그랜드피아노인 것이 재미있다. 그는 연주자 없이도 건반이 눌려지고 피아노줄이 튕겨지는 기계적 구조를 신기하다는 듯이 살피다가 바닥에 편히 누워서 피아노연주를 감상한다. 디스크는 생각, 피아노는 물리적 세계自然같다. 거실 벽에는 큰 액자가 걸려있고 그 안의 그림에도 액자가 걸려있다. 액자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창문처럼 보인다. 그 창문 안쪽에서 여자가 밖을 바라보고 있다. 액자를 바라보는 게리를 바라보는 것도 같고, 영화를 보고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도 같다.

 

그가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는 동안 옆에서는 또 하나의 그가 거실을 정돈하고 있고, 거울 안에는 또 다른 그가 움직이고 있다. 동시에 여러 차원에 존재한다. 밝고 다정한 마거릿-멜리사-메리는 그의 삶에 온기와 안녕를 준다. 새라-수전-시에라는 그의 삶을 휘젓고 곤경에 빠뜨린다. 얼핏 천사와 악마같지만 사실 그 반대다. 전자는 감옥의 교도관이고, 후자는 탈옥 도우미다. 숫자 '9'는 의식ego의 수준을 뜻하는 한편으로 앵무조개!나 미로를 연상시킨다. 그는 미로를 빠져나오는 테세우스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다.

 

이 영화에는 볼테르의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가 비중있게 등장해서 관객에게 독서를 권한다. 덕분에 읽게 된 이 책에는... 인간이 지어낸 세상이 얼마나 가혹하고 개판인지가 재치있게ㅠㅠ 묘사되어 있다. 책에서 반복되는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럴싸한 개소리 같았다.ㅋ 영화에서는 메리와 노엘이 살아갈 세상이 결과적으로 '최선의 세계'가 된다.  

 

영화를 만든 존 오거스트는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데, 유독 이 작품만 직접 연출했다. 특별히 아끼는 각본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들여다 볼수록 거의 모든 장면, 모든 대사에서 그의 지극정성을 느낄 수 있다. 

 

 

 

 

00:46:43

"이건 실제가 아니야. 이 쇼는 실제현실이 아니라고. 그걸 왜 몰라?

당신, 눈 먼 장님이야? 당신은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댁도 여기 우리와 함께 덫에 걸린거야! 나가, 나가라고! Oblivio accebit!"

 

 

01:09:59

"모든 게 꿈인가요?" 

"아뇨" 

"내가 혼수 상태 인가요?" 

"아뇨" 

"그럼 내가 죽은 건가요?" 
"여기가 지옥이나 연옥같은 곳?" 
"연옥은 로마 사람들이 토하던 곳이구요. 이건 뭐든지 될 수 있는 실제현실이에요." 
"무슨 뜻이죠?" 
"모든 게 있는 그대로예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죠." 
"좋아요, 그럼 난 누구죠?" 
"당신은... 다차원적인 존재예요. 거대하고 거의 무한의 힘을 가진 당신이 들어있는 이 육체는 당신의 화신化身 중 하나일 뿐이에요. 말하자면 아바타죠." 
"그럼 내가 신이란 말인가요?" 
"엄밀히 말해 신은 아니죠."

......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에요. 당신은 이 세계를 내키는대로 창조해냈고 곁에 가까이 살면서 어떻게 되나 보려고 결심한 거죠. 당신은 이 세계를 파괴할 수도 있어요. 마음만 한번 먹으면요."

 

 

01:20:55

"그럼 한번에 많은 캐릭터로 게임을 하시나요?"
"두 개 가지고요.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들 해요."
"하지만 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 세계를 창조했으니 비밀코드를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전지자god모드 같은 거요?"

"그걸 그렇게 부르나요?"
"모든 힘을 다 가지고 있고, 절대 죽지않는 모드죠. 하지만 사실 그러면 게임이 지루해져요. 게임에 규칙이 없으면 재미가 없죠."
"하지만 댁이 만든 규칙이잖아요."
"네, 그렇죠."

 

 

01:24:24

"날 죽이려는 건가요?"
"아뇨, 이건 살인이 아녜요. 중재intervention에 들어간 거죠."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요?"

"이건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한 일이에요. 그걸 인정하는게 첫번째 단계구요. 당신은 마약중독자예요. 다른 점은 이 혹성과 이 사람들이 당신이 선택한 마약이었다는 거죠. 우주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처음엔 어쩌다 한번씩 확인만 하곤 했었죠. 네안데르탈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대륙 두 개를 옮겨도 보고... 하지만 점점 더 빠져들어갔죠. 자기가 만든 몇 개의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했어요. 노예들, 왕들, 메시아들... 얼마 안 가서 일주일 내내 24시간 갖고 놀았어요."

"내가 그렇게 지낸지가..." 
"4천년간 그랬어요. 우리들 시간개념과는 다른 시간이지만요."

"날 찾으러 온 거에요?" 
"그게 여성이 하는 일이죠."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이게 진짜가 아니란 걸 잊어버렸어요. 우린 불타는 마차 위에 폭풍우를 내릴 수는 없었어요. 여긴 당신의 우주니까 당신 규칙을 따라야 했지요. 우린 당신의 작은 세계가 얼마나 좁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줘야 했어요. 내 말 오해하진 말아요. 여긴 좋은 곳이에요. 아늑하고... 하지만 당신이 떠나온 곳 기억나요? 당신이 떠나온 곳을 기억하나요?" 
"거긴 따뜻했어요. 그리고 흰색이 마치..."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인간의 사고력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구요. 당신이 돌아가길 바래요. 우리와 함께, 나와 함께 돌아가요."

 

 

01:27:48

"만일 내가 그냥 (게브리얼로) 돌아간다면 그리 복잡하진 않을텐데..." 
"그래선 소용없단 걸 우리 둘 다 알아요. 다음주에 당신은 여기 돌아와서 솔방울을 다시 디자인하고 있을 거예요. 그만둬야 돼요, 딱 끊어야 해요!" 
"못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강요할 순 없어요. 당신이 원해야만 해요." 

 


01:31:03

"가야 되는 거지? 그치?"

"아니, 여기 머무를 수도 있어."

"얼마나? 영원히? 여기 있으면 매일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 하겠지. 당신이 가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최악의 시나리오일 경우? 모든 게 불타는 공백 속으로 분해돼. 망각상태oblivio accebit로 모든 게 끝나버려. 
"그게 다야?"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더 걱정하는 건 인간 본성이야. 당신네들은 서로를 너무 많이 죽여." 
"공정하게 말하자면, 대개는 당신의 이름으로 그러지. 게다가 우리는 신보다 더 효율적으로 서로를 죽여." 
"난 이 세상이 좋아. 이 곳에서 당신과 노엘이랑 함께하는 삶이 좋아." 
"이건 진짜가 아니야. 난 진짜 당신 아내도 아니고. 당신도 내 진짜 남편이 아니쟎아. 어떤 면에선 전부 가식일 뿐이야. 그동안 얼마나 많은 버전이 있었던 거야?" 
"90개. 이게 마지막 남은 거야. 난 수십억의 사람들을 한순간에 파괴시켜 버렸지. 난 그들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었겠지만..." 
"그만! 해명하거나 사과할 필요 없어. 모든 것은 당신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만일 이게 전부라면 그걸로 충분해."
"그런가?" 
"그래. 당신 짐을 쌀 필요는 없겠네." 
"난 괜찮아." 
"당신은 정말 잘했어. 그동안 즐거웠어,"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좋은 사람." 
"당신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favorite이야."


01:35:20  (노엘은 더이상 mute가 아니다!)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 이름이 뭐지?
"음... 엄마요."
"맞아, 바로 그거지."
"아빠는 안 와요. 하지만 괜찮을 거야. 모든 조각들을 잘 맞춰 놓으셨거든. 그건 마치..."

"존재할 수 있는 최상의 세계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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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이전에 책 [캉디드]와 함께 정성들여 포스팅했는데 실수로 날려먹었다. 다행히 사진들이 남아있고 이 영화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다시 썼다.

 

 

"무수한 매듭을 짓더라도 실은 여전히 한 가닥일 뿐"   - 루미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