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mooncle
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Tag

2018. 5. 17. 13:56 영화

 

 

 

꽤 유명한 영화배우인 로빈 라이트는 두 아이의 엄마다. 딸 새라와, 어셔증후군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어가는 아들 애런이 있다. 세 사람은 활주로가 지나가는 벌판에서 '격납고'를 개조한 집에 산다. 유독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애런은 라이트형제의 모형비행기나 그것을 닮은 빨간 '연'을 날리며 시간을 보낸다. 로빈의 삶은 애런에게 묶여있다.

 

로빈은 행복하지 않다. 조금씩 상태가 나빠지는 아들을 지켜보며 웃음을 잃어버린 걸까. 자신의 직업적 성공이나 안위는 체념한 사람같다. 25년간 함께 일해온 노회한 매니저 '알'은 로빈을 달래고 갈구고 때로는 겁주어 설득하는 데는 도가 텄다. 로빈은 '배우 로빈 라이트'를 스캔하여 영화사 소유의 캐릭터로 넘기는 계약에 서명하고, 마지막 연기(스캐닝)를 끝낸다. 본인의 의사보다는 영화사와 매니저의 설득에 밀려서 내린 결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20년 후 로빈은 영화사가 주최하는 '회의The Congress'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장소는 '아브라하마'이고 환각제를 흡입!해야만 입장 가능한 가상세계다. 검문소 직원은 환각제 앰플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00:46:31   "명심하세요, 라이트 씨. 아브라하마는 제한된 애니메이션 구역입니다. 

          이 길을 다시 지나지 않고는 애니메이션 구역에서 나올 수 없어요."

 

로빈은 아브라하마(아브라함^^ '믿음'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뜻인 듯)에 입장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빠져나오지 못한다!

 

환각제의 약효가 나타나는 시점부터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돌변한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가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혼란을 의도했다면, 이 영화는 환영을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하여 꽤 명쾌하게 구분해 주는 것 같지만... 그렇게 만만한 구성은 아니다.

 

환각제의 약효가 나타나는 시점, 즉 '애니메이션 구역'에서부터는 터무니없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황량한 벌판이 오색찬란한 바다로 변하며 배가 떠다니고 고래가 헤엄치고 별이 날아다닌다. 그냥 밤에 꾸는 '꿈'과 차이가 없다. 이상한 대화, 이상한 룸서비스, 이상한 거울, 이상한 바퀴벌레, 이상한 영화사... 그 와중에 테러가 일어나 더 강력한 환각제에 노출되어 또다른 환각에 빠졌다가, 총살당해 죽었다가, 깨어나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어셔증후군맛! 환각제를 마시고 날아다니다가, 환각제 약효를 지우는 약!을 먹고 리얼월드로 돌아오는가 했더니... '리얼월드를 닮은 환영'이다. 

 

 

이 영화는 어렵다. 처음에 로빈은 맑은 정신으로 가상세계 입장을 선택했지만 차차 정신줄을 놓친다. 회의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일이 꼬였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애런'을 잊지는 못한다. 거의 '낙원'에 가까운 세상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환각제'를 이용하여 애런을 찾아나선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상세계에서 애런을 찾을 '좌표' 같은 건 없기에, 로빈은 자신이 애런을 출산하던 순간의 '애런'의 시점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갓난아기 애런이 된 로빈은 엄마를 바라보고 엄마 품안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헤어짐의 날이 온다. 영화는 애런(로빈의 의식)이 애런(환영)과 대면하면서 끝난다. 

 

초현실적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환영의 세계에는 수많은 유명인들이 카메오로 등장한다(발견의 재미ㅋ). 톰 크루즈, 마릴린 먼로, 히틀러, 붓다, 예수, 공자, 호루스 신, 프리다 칼로, 무하마드 알리, 아프로디테 신, 제우스 신, 에우로페, 켄타우로스, 가네샤 신, 이시스 신, 엘비스 프레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체 게바라, 로널드 레이건, 마이클 잭슨, 미네르바 신...... 이들을 내가 알아보는 까닭은, 로빈의 '꿈세상'이 내가 살고있는 이 '현실세계'와 기본설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빈과 나는 자신이 멀쩡한 세상에 살아!있다는 믿음도 공유한다.^^

 

꿈은 일종의 영화이고 그 감독('꿈꾸는 자' 또는 '꿈을 지켜보는 자')은 각본도 쓰고 배역도 맡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감독은 자신의 배역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어서 점차 감독에게 주어진 강력한 지휘권을 잊어버린다. 덕분에 리얼리티는 올라가고 영화는 '네버엔딩 스토리'가 되고 등장인물은 불어난다. 그래봤자 리얼월드(고향, 본향, 떠나온 곳, 천국, 이데아... 무엇으로 부르든)의 어수선한 복제일 뿐이지만.

 

결국 꿈 속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모험을 하든지간에 결국 자신의 내면을 탐험할 뿐이라는 결론은 피할 수 없다. 모든 경험은 상상력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이다. 그 거울에는 주로 '두려움'이 나타난다. 로빈의 환영에는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두 가지 두려움이 있으니, 하나는 미라마운트영화사의 제프 그린이고 또 하나는 애런이다. 제프 그린은 오만한 '갑'답게 위압적인 모습으로 몇 번 등장하다가 로빈의 총살형을 집행하고는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애런은 '빨간 연'이라는 상징으로 계속 나타난다. 영화 인셉션의 '기차(=아내)'처럼.

 

 

▲푸른하늘과 바람, 눈부신 햇빛, 엄마와 아들, 진짜비행기와 비행기를 닮은 연... 아름답고 애틋하고 절묘하다. 연은 바람 속에서 힘차게 날지만 연줄을 잡은 사람에게 묶여있다. 놓아줘야 한다. 하지만 로빈은 아들을 놓지 못한다. 줄이 끊어진 얼레를 가슴에 품고 환각계에서 연을 찾아 헤맨다.

 

'카르마(업業, 원인)'라는 개념이 있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나름의 정의을 내렸는데, 카르마란 '우리를 지상의 삶으로 계속 돌아오게 하는 모든 것' 이다. 우리의 삶이 꿈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윤회한다면, 우리를 이 환영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은 무엇일까. 운명같은 사랑이나 원한관계의 청산, 부귀영화 따위도 유혹적이겠지만 '사랑하는 이에 대한 책임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족쇄가 아닐까 한다. 로빈은 당차고 독립적인 딸 새라보다 애런에게 연연한다. 미안함, 죄의식, 자책 등의 감정은 이기심보다 더한 집착을 낳는다.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미안함과 책임감'을 해부한다. 매니저 '알'은 말한다.

00:40:40

"<중략> 난 내 과거가 창피했어. 하지만 내심 나만의 강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남의 약점과 결함을 알아 보는 능력 말이야. 매니저로서는 꽤 유용한 기술이거든. 그렇게... 당신을 만난 거야. 나한텐 완벽했어. 천사처럼 사랑스럽지만 배우로선 최악의 결함도 갖고 있었지. 두려움이야.

 

 

 

극심한 두려움, 지독한 공포, 당신의 모든 욕망을 가로막는 공포... 중요한 회의 전엔 공황 상태가 됐고 비중이 큰 역을 맡으면 굳어 버렸어. 그 때마다 내가 도왔지. 

 

난 당신의 두려움과 약점을 뜯어 먹고 산 내면의 악마였어. 애들이 태어나자 그 두려움도 사라지더군. 정말 행복해 보였고 일도 그만 두고 애들과 있고 싶어했어. 난 버려진 것 같았어. 그 때 깨달았지.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날 떠날까 봐 겁이 났어. 그러다 갑자기 몇 주 사이에 애런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어. 난 그 틈에 다시 힘을 얻었지. 애런은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우리만 남겨졌어. 

 

지금 떠날 순 없어. 그 괴물 안에 갇혔잖아. 당신의 마지막 연기야. 당신을 구원해 주겠지. 모든 두려움과 모든 악마로부터... 그만 고통 받아. 그럴 이유 없어."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정말 긴 대사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돌이켜보면 심오한 장면이다. 수완좋은 매니저와 유약한 배우, 정 많은 엄마와 아픈 아들은 상호의존관계다. 보살핌을 주는이는 어쨌든 중요한(가치있는) 사람이 되고 보살핌을 받는이는 길들여져 종속된다. '널 사랑해서', '나도 희생했다'는 주장이 진실이라 해도... 알과 로빈은 각기 상대의 두려움과 약점을 뜯어 먹고 사는 내면의 악마인 것이다. 선한 의도로 그리했더라도, 원인이 아무리 뿌리깊다 해도, 서로간의 결속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우리는 서로를 놔줘야 한다. 저 긴 고백을 끝으로 더는 등장하지 않는 매니저 알처럼, 로빈도 애런을 놓아준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아브라하마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아브라하마호텔 로봇 랠프과의 대화;

00:56:06   근본적으로 모두 이치에 맞고, 모든 것은 마음 탓이죠.

<중략>

00:56:50   랠프, 정말 어두워요. 내 마음 탓이에요?

00:56:53   전부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둠이 보인다면 당신이 어둠을 택한 겁니다.

 

로빈의 삶은 리얼월드에서든 환영(꿈) 속에서든 웃음과 행복감이 결여되어 있다. '몸'이 아닌 '의식'이 우리의 실체라면 행복도 불행도 그 의식의 상태에 달려있는 것이다. 로빈이 웃고 떠들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아브라하마에서 한결 잘 지냈을 수도...

 

이 영화는 '너는 리얼월드에 살고 있니?' 또는 '리얼월드가 뭐라고 생각해?'라고 묻는 것 같다. 난 모른다. 여기가 리얼월드라고 믿고 살아왔지만 뭔가 수상하긴 하다. 어쩌면 분주하게 장소를 옮겨다니며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은 무한반복적 헛수고 중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의 우주를 촬영하는 카메라맨(나 자신)을 자각하고 카메라를 꺼버리는 게 정답일지도....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