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쪽>
그는 주의깊게 내 얼굴을 살펴보며 말했다. "많이 컸구나. 싱클레어." 그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 보였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나이 든, 똑같이 젊은 모습이었다. 그가 합류해서 우리는 함께 산책을 했다. 순전히 시시한 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고, 당장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에 몇 번 그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가 그것도 잊었으면 좋으련만, 그 멍청하고 멍청한 편지들이라니! 그는 그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도 없었고, 나는 아직 사나운 시절의 한복판에 있었다. 교외에 이르자 그에게 술집에 들어가자고 청했다. 그는 함께 들어갔다. 나는 허풍을 떨며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해서는 잔에 따르고 그와 잔을 부딪쳤다. 대학생들의 음주습관에 매우 친숙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는 첫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집에 자주 가나보지?" 그가 물었다.
"응, 그래."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따로 할 일이 뭐가 있어? 결국은 그게 가장 재미있는 걸."
"그렇게 생각해? 그럴지도 모르지. 거기엔 아주 아름다운 점도 있으니까. 술에 취하는 것, 바쿠스적인 것! 하지만 자주 술집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개 재미를 완전히 잃어버리던 걸. 술집을 돌아다니는 거야말로 진짜 속물적인 일 같은데. 그래, 물론 하룻밤 횃불을 밝히고 진짜로 화끈하게 취하는 거야 좋지! 하지만 거듭 한잔 또 한잔, 그거야말로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 파우스트가 저녁마다 단골술집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
나는 잔을 비우고 적대감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누구나 파우스트는 아니니까."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약간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예전의 활기와 우월함을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뭣하려 싸우겠니? 어쨌든 술주정꾼이나 방탕한 사람의 삶이 흠 하나 없는 부르주아의 삶보다는 아마 더 생동하는 것이겠지. 게다가 언젠가 읽은 말인데, 방탕한 삶이 신비주의자가 되는 최고의 준비과정이라더라. 뒷날 예언자가 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이야 늘 있는 법이니까. 그도 한때는 향락을 즐기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지."
나는 불신에 가득찼고 그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서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 누구나 제 입맛대로 살라지! 터놓고 말하자면 예언자나 뭐 그런 게 되는 건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데미안은 살짝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잘 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네게 불쾌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게다가 네가 지금 어떤 목적으로 그 잔을 들이켜는지 우리 둘 다 모르지.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것은 그걸 이미 알고 있겠지. 그걸 아는 건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자신보다도 더 잘 한다는 사실 말이야. 그런데 용서해라. 난 그만 집에 가야겠어."
우리는 짧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앉아서 병을 몽땅 비웠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순간 데미안이 이미 술값을 치렀음을 알았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내 생각은 다시 이 짧은 만남에 머물렀다. 온통 데미안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교외의 술집에서 했던 말들이 다시금 기억에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걸 아는 건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안다는 사실 말이야!"
창에 걸린 채 이제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빛나는 두 눈이 보였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빛이었다.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그 누군가였다. 모든 것을 아는 그 누군가.
데미안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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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보게." 잠시 뒤에 그가 소리쳤다. 이제 철학을 좀 해보자고. 그러니까 입은 닥치고 배를 깔고 엎드려 생각을 좀 하자는 거지."
그는 성냥을 긋더니 자기 앞에 있는 벽난로 속 종이와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부채질을 하면서 신중하게 불꽃을 살렸다. 나는 그의 곁으로 가 너덜너덜한 양탄자 위에 엎드렸다. 그는 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불꽃이 내 마음도 사로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한 시간가량 파닥거리는 장작불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불꽃을 바라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바지직거리고, 아래로 스러졌다가 꿈틀거리며, 활활 타오르다가 경련하고 마지막에 고요히 가라앉아 작열하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불꽃 숭배는 지금까지 고안된 것 가운데 가장 멍청한 건 아니지." 그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그 말 말고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꽃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꿈과 고요 속에 빠져들어 연기의 형상들과 재의 그림들을 보았다. 한번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함께 불을 보고있던 그가 잉걸불 속에 송진 한 조각을 던져넣자, 작고 날씬한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그 속에서 노란 새매의 머리를 한 그 새를 보았다. 스러져가는 벽난롯불 속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실들이 그물처럼 엉켜 철자와 그림들이 나타나고, 얼굴, 동물, 식물, 벌레, 뱀들에 대한 기억이 나타났다. 내가 깨어나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두 주먹을 턱에 괸 채 완전히 몰두하여 열광적으로 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벌써 어린 시절에 나는 자연의 기묘한 형태들을 바라보려는 성향이 있었다. 관찰이 아니라 그 본래의 마법에, 그 뒤얽힌 깊은 언어에 마음을 빼앗겼다. 목화木化된 긴 뿌리, 암석에 나타난 여러 색깔의 광맥들,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얼룩, 유리에 난 균열들 - 이런 모든 것이 내게는 때때로 대단한 마법을 부렸으며, 무엇보다도 물과 불, 연기, 구름, 먼지, 그리고 특히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빙글빙글 도는 색깔점이 그랬다.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하고 난 다음 며칠동안 그런 것들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 뒤로 느낀 어느 정도의 활력과 기쁨,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감정의 상승이 순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을 오랫동안 바라본 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불을 바라본 일이 특이하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원래 목적을 향해 가는 도중에 겪은 몇 안되는 경험에 이 새로운 경험도 더해졌다. 그런 형태들을 관찰하다보면, 그러니까 비합리적이며 이상하고도 꿈틀거리는 자연형태에 몰두하다보면, 이런 형태들을 있게 한 의지력과 우리의 내면이 서로 일치한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 물론 곧바로 그런 일치감을 우리자신의 변덕으로, 우리자신의 창작으로 여기려는 유혹을 느끼지만 -
우리는 자신과 자연 사이에 있던 경계가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며, 또한 이런 형태들이 외부의 인상이 우리 망막에 맺혀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인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창조자인지, 우리 영혼이 언제나 끊임없는 세계의 창조에 얼마나 많이 동참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쉽고도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는 길은 이런 연습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뉘지 않는 동일한 신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자연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외부세계가 붕괴한다면 우리 중 한명이 세계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산과 강, 나무와 잎새, 뿌리와 꽃, 자연의 모든 형태가 우리 안에도 미리 새겨져 있으며 바로 영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영혼의 본질은 영원성이며 우리는 그 본질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 창조의 힘으로 느껴진다. ......
"......인류가 어느 정도 재능을 가진 아이 단 한 명만 남기고 모조리 멸종한다 해도, 그리고 이 아이가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아이라 해도 이 아이는 모든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신과 데몬과 낙원과 계명과 금지들, 그리고 신구약 성경,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해 낼 거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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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와는 달리 인류의 의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개별 인간은 인류전체를 포함한다는 이 낯선 개념은 SF에서는 꽤 흔하다. 영화 '다크시티'는 '깨어난 한사람'이 어둠 뿐이던 도시에 바다와 땅과 태양을 만들고 지구를 재건하면서 끝난다. 같은 감독의 영화 '노잉Knowing'은 지구의 종말을 보여주는데, 두 명의 어린이만이 외계존재들에 의해 새로운 행성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그 곳에 지구를 새롭게 재건할 인류 대표선수로서.
매트릭스 3부작의 마지막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100년이상 지속된 인간과 AI와의 전쟁은 네오의 영웅적 희생으로 종전을 맞이한다. 새로운 매트릭스 안에서 깨어난 꼬마 사티는 눈부신 일출을 가리키며 자신이 '했다'고 말한다. 네오를 위해서.
<2017/08/24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