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재미나게 봤다. 이 영화 역시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봐서 다행이다. 1997년에 봤더라면 신과 악마, 천사가 출몰하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에 웃었을 것이다.
줄거리 요약 : 승승장구하던 변호사 캐빈은 한 차원 높이 더욱 승승장구하다가 '망한다'. 그리고는 자기 인생을 망친 원흉(사장)을 찾아가 따지고, 싸우고, 그의 정체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되돌릴만한 '선택'을 한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끝!
영화 후반에는 캐빈과 악마(존 밀튼, 법률회사 사장)의 격렬한 대화가 15분쯤 이어지는데.. 악마가 하는 말이 다 '어록'!이다. 대사도 구구절절 대단하지만 악마 역의 알 파치노는 진심 대단하다.
01:57:14
"지켜봤고 기다렸지. 숨을 죽인 채 말야. 하지만 난 인형 조종사가 아니야. 내가 그런 일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는 안 해."
"매리 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건 자유 의지야. 나비의 날개와 같은 거지. 한 번만 손을 대도 다신 날지 못하거든. 난 무대만 준비해 놨어. 줄은 스스로 당기는 거라고. 진 적이 없지? 왜? 왜인 것 같아? 실력이 좋아서? 그럴까? 하지만 왜지?"
"당신이 내 아버지라서?"
"난 그 이상이야. 게티스 법정 때 몹시 더웠지? '어떤 작전을 쓸 거죠? 케빈? 멋진 독주였어요. 지는 날도 있어야지. 항상 이길 순 없잖아' "
"당신 정체가 뭐야?"
"이름이야 아주 많지."
"사탄!"
"아버지라고 불러."
"매리 앤은 그 사실을 알았던거야. 그녀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죽였나?"
"메리 앤이 죽은 게 내 탓이라는 거야? 농담이겠지? 넌 언제라도 메리 앤을 구할 수 있었어.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사랑이었는데 넌 너무 바빴어. 너희가 뉴욕에 왔을 때 넌 첫날부터 한눈을 팔았어."
"아냐, 당신은 우리 사이를 몰라!"
"난 네 편이야. 밖엔 아무것도 없어! 얼간이처럼 굴지 마.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아내를 돌보라고 했잖아. 내가 뭐랬지? 모두 널 이해할 거라고 했지? 그런데 니가 뭐라 그랬지? '뭐가 겁나는 지 아세요? 사건에서 손 떼고 아내가 회복되면 그녀가 미워질 겁니다' 기억 나?"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날 속였어."
"누가 게티스 사건 때 최선을 다 하랬나? 누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지?"
"당신이 그렇게 시킨 거지. 날 갖고 논 거야! 나를 시험한 거라구!"
"컬른도 마찬가지야 유죄란 걸 알았잖아. 어떻게 했지? 그 사진들을 보고도 넌 그 거짓말쟁이를 증인석에 앉혔어"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야. 거짓말하게 시킨 거라구!"
"난 그런 짓은 안 한다니까! 지하철에서 내가 뭐랬지? 그 때 내가 뭐라고 말했냐고! '질 때가 됐는지도 몰라'라고 했어. 네 생각은 달랐어"
"진다고? 난 안 져. 난 이겨. 난 항상 이기지! 난 변호사고 이기는 게 직업이니까!"
"내 말대로쟎아. 허영은... 내 최고의 기호품이지. 아주 근본적인 거야. 자기애... 그거야말로 천연 아편이지. 네가 매리 앤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냐. 그저 다른 사람에게 좀더 신경을 썼을 뿐이야. 너 자신말이야."
"당신 말이 맞아. 다 내 탓이야. 내가 그녀를 놓아버렸어."
"너무 자책하지 마. 넌 더 많은 걸 원했을 뿐이야. 날 믿어."
"아내를 뒤에 남겨둔 채 나만 앞으로 나갔어."
"그렇게 계속 자책하지 마. 니가 얼마나 멀리 왔는데,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내가 쉽지 않게 만들었는데도 말이야. 쉽게 만들 수가 없었지. 너한텐 말이야. 난 자녀들이 많아. 실망도 많이 했지. 시행착오 끝에 결국 너희만 남았어."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뭐야?"
"너 자신이길 바래. 너 이거 알아? 내가 말해주지. 얘야, 죄의식은... 벽돌이 든 자루와 같아. 그냥 내려놓기만 하면 돼. 지금 심정이 어떤지 알아. 나도 겪었거든. 이리 와. 잊어버려."
"그럴 수가 없어."
"누굴 위해서 짐을 짊어지는 거야? 하느님? 그거였어? 하느님이야? 말해 줄까? 신에 대해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길 해주마. 신은 지켜보길 좋아해. 못된 장난꾼이지. 생각해 봐. 그는 인간에게 본능이란 걸 줬어. 이 멋진 선물을 줘놓고서 뭘 하는지 알아? 자기만 배꼽 잡고 떼굴떼굴 구르고 싶어서 정반대되는 규칙을 만들었어. 실수치곤 기ㄱ막히지. 보기는 하되 만지지는 말라, 만지되 맛보진 말라, 맛은 보되 삼키진 말라. 그리고 네가 허둥지둥 할 때 뭘 하는 줄 알아? 깔깔 웃고 있어. 신은 구두쇠야! 사디스트야! 부재지주야! 그런데 숭배하라고? 천만에!"
※부재지주不在地主: 이익이 나는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지주
"천국에서 모시느니 지옥에서 군림하겠다, 이거군."
"그게 어때서? 태초부터 난 이 땅에 코를 박고 살아왔어.인간이 꿈꿔 온 모든 욕망을 내가 가꾸고 키워 왔다고. 인간이 원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고 비난도 안 했어. 왜냐?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거부한 적이 없거든. 난 인간의 팬이야. 인본주의자라고. 아마도 최후의 인본주의자겠지. 케빈, 제정신인 사람치고 20세기가 전적으로 내 것이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모두 내 거야! 케빈. 모두 내 거라고. 난 지금 한창이야. 이제 내 시대라고. 우리 시대지."
"엄청난 연설이네요. 내가 정말 필요한가 봐요?"
<중략>
"내가 스스로 자원해야 가능하겠지?"
"그래. 망할놈의 자유의지. 천년 왕국이 곧 올 거야. 타이틀 매치 시간이지. 난 준비됐어. 넌 어때?"
"나에게 뭘 줄 건데?"
"뭐든지! 다 주겠어. 뭘 원해? 희열은 어때? 순간적인 희열. 언제나 얻을 수 있지. 어떤 희열도 좋아. 코카인 맛의 희열은 어때? 낯선 여자의 침실에 들어간 기분 말이야. 잘 알지?"
"그 정도론 어림도 없어."
"알아. 일단 워밍업하는 거야. 더 원하지? 그럴 자격이 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어때? 배심원의 미소! 그 차가운 법정이 너한테 홀딱 반하는 거야."
"그건 내 힘으로도 되는데?"
"이건 힘들 걸? 내가 니 서류가방에서 벽돌(죄책감)을 꺼내주지. 기쁨을 주겠어. 아무 조건없이! 결코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게 해 주지. 이건 혁명이야 캐빈."
"왜 법이지? 젠장, 왜 하필 변호사고 법이지?"
"왜냐하면 아들아, 그게 우리를 모든 것으로 인도하니까. 그것만 있으면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으니까. 그건 새로운 형태의 사제 집단이지. 현존하는 변호사들보다 법대생들이 더 많은 거 알아? 총이 불을 뿜듯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구! 너희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무죄 석방을 시키고, 또 시키고, 또 시키고.. 이런 식으로 악취를 풍기면 결국은 천국을 차지할 수가 있어."
"성경에선 당신이 져. 우리는 지게 돼 있어요 아빠."
"근원을 생각해 봐(Consider the source) 아들아. 게다가 우린 우리 책을 쓸 거야. 제 1장! 바로 이 제단 위에서 시작되지. 이 순간부터!"
<중략>
"악마의 미덕은 허리 아래에 있도다."
"사랑은?"
"과대평가된 거야. 생화학적으로는 초콜릿을 잔뜩 먹는 것과 차이가 없지."
구약 욥기를 보면, 신과 악마는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욥'의 갖은 고난을 유도하고 구경한다. 둘 다 못돼 쳐먹었다. 신과 악마는 바둑을 두는 친구같다. 아니, 70억개의 바둑알(freewill을 지닌)이 지어내는 드라마의 관객같다. 그 드라마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 남과 여, 지혜와 무지... 같은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지고 '신'은 그것을 바라본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신의 놀이(lila)'가 이런 걸까. 드라마가 모닥불이라면 신은 불꽃을 제공하고, 악마는 땔감을 제공하는 것일까. 악마의 집 벽에는 거대한 부조가 걸려있는데, 그것은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희노애락)을 표현하는 듯 끊임없이 움직인다.
캐빈이 연전연승의 성공가도에서 탈선하여 멈춰섰을 때, 뉴욕 번화가의 대로가 텅! 비어있다. 모두가 퇴장한 무대처럼 사람도 차도 소음도 없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도 같은 장면이 있다. 세상이 마치 모두가 떠나버린 빈집 같고, 지상에 주인공 혼자 남겨진 듯한 심히 낯선 풍경. 우리가 그토록 진지하게 달려들어 분투하던 삶도, 함께 상호작용해 온 인간 군상도 전부 증발한 듯한 상태.
다 어디 갔지? 이 곳에서 지내온 수많은 시간, 갖가지 일들은 뭐였지? 여태껏 나 혼자 쇼를 한 건가. 꿈인가? 이제 뭘하지?..... 데이비드는 비명을 지르다가 꿈에서 깨었고, 캐빈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밀튼에게로 향한다. 메이킹필름이나 감독 코멘터리 영상을 봐도 그들은 '상징'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영화를 통해 '삶이 실제같지? 조연도 엑스트라도 다 진짜같지? 잘 생각해봐. 너만 진짜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악마도 말하지 않는가. '나는 무대를 마련할 뿐, 연기는 각자가 하는 거'라고.
또 재미있는 장면 하나.
이 영화에서 딱 한 번의 타임워프가 있는데, 한 순간 그야말로 모든 것이 주인공의 눈동자 속으로 수렴되면서 시공간 점프! 이런 거 너무 좋다. 영화감독들끼리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도 나온다. 영화 '셀프/리스(Self/less, 2015)'에서의 모습과 차이가 없어보인다. 18년의 세월동안 손때조차 타지 않은 의자들이 신기하다. 저 황금궁전같은 집을 두고 백악관으로 옮겨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던데... 어쨌거나 하얀집으로 이사해서 지금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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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생각해보면 책도 영화도 내가 찾아낸다기 보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안내받아 만나는 것 같기는 한데, 불과 두 달 전 일인데도 왜 이 영화를 보기로 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문병갔던 병실에서 뭘 검색하다가 불현듯 '데블스 애드버킷을 봐야겠어'라는 의지!가 솟아났으므로 귀신의 유혹 같기도 하다. 예전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봐야겠다고 결정하던 때는 더 이상했는데, 제목이 머릿속에서 그냥! 흘러나왔다. 드물고 신기한 일이지만 어쨌든 귀챦은 과정을 건너뛰는 '직통전화'같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