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쪽>
어린시절 우리 집 서재에는 단테의 [신곡神曲The Divine Comedy]이 한 권 있었는데, 이 책의 삽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옥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을 묘사한 그 그림은 천국을 묘사한 그림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기억에 남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암이나 심장병에 걸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보다 지옥 그 자체였다. 우리 가족 중에는 성자saint가 없었으므로 나는 우리 가족 모두가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당시 그 즈음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그곳에서 별것 아닌 잘못을 속죄하느라고 외로이 고통받고 있으며 아마도 여러 세기에 걸쳐 그래야 하리라고 믿었다.
동시에 나의 어린시절 직관력은 봄철의 황금빛 에너지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사후세계를 생각해냈다. 그곳은 눈부신 햇살을 받아 생기가 넘치고, 나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꽃으로 뒤덮인 목초지였다. 그곳은 또한 기분 좋게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토실토실한 다람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어서 새끼 고양이처럼 그들을 안아줄 수 있는 곳이었다. 나의 수호천사가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튀어나온 요정과 오래 전에 죽은 우리 개 닥스훈트종 사치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이상화된 사후세계의 이미지는 변화를 거쳤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186쪽>
전통적인 사후 모델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이 죽으면 거의 같은 곳(사후세계)으로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에 따라 각자의 사후 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5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는 '모든 인간은 죄를 타고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우리들 상당수는 그러한 종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사후심판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죄의 개념은 죄책감이라는 쓸데없이 무거운 감정적 짐을 지운다. 죄를 지었다는 수치심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용서와 해방으로 안내할 내면적 '지식'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세운다.
종교재판으로부터 뉴잉글랜드의 마녀재판이 성행하던 끔찍한 시대까지 이어진 종교적 자경주의vigilantism는 어떤 종파든 신자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통제하면서 '사회적 경멸'이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더했다. 유대교에서는 천사가 각 개인을 평생 따라다니며 그의 행위를 낱낱이 판단하고 기록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에도 각 개인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다는 초자연적 감시자가 있다. 그들이 기록한 내용은 매일 밤 장부관리자에게 전달된다. 이처럼 각자의 행동이 수집되고 집계된다는 생각은 영혼의 가치를 저울에 달았던 4,000년 전 시작된 이집트의 깃털 테스트를 연상시킨다.
<190쪽>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그보다 적어도 1,5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각색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득한 옛날부터 구전돼 내려온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설형문자로 기록돼 보존된 여러 버전의 홍수 신화에는 방주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 아트라하시스 혹은 우트나피쉬팀 등으로 다양하다. 두 신화의 분명하고 중요한 차이점은 인간을 대량말살하는 이유다. 창세기에서는 야훼가 죄지은 인간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인간이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그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신들에게 방해가 됐다는 것이다. 몇몇 신이 그 해결책으로 인간을 완전히, 또는 거의 몰살하기로 작정했다. 즉, 원작신화에서 홍수는 도덕성과는 관련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성서에 나오는 신의 개념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독재적인 통치자이며 엄한 가부장적 원로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노기등등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신은 점차 연민과 사랑이 넘치는 신으로 바뀌었다. 고대에 그런 신이 있었다면 역겨울 정도로 여성적이고 소심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신은 아무도 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가 점점 더 관대해짐에 따라 신의 권좌에 앉아있던 흰 수염의 무시무시한 노인 같은 신은 그보다 더 관념적인 신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이처럼 '심판하는 신'이라는 고대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지옥도 사라졌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있다는 가정은 창세기에 명백하게 씌여있다.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돼 낙원을 잃는다. 가장 큰 죄인 불복종 탓에 그들의 자손은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인 죽음이 이 이야기에서는 죄로 인한 '자연스럽지 않은' 벌이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죽음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또한 아담과 이브의 불복종으로 인해 후손들은 수치심, 죄책감, 불결함, 괴로움, 출산의 고통을 포함하는 신체적 고통, 육체노동, 욕망, 유혹, 탐욕, 범죄, 성관계 등의 수많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에덴Eden'은 성서시대보다 수천 년 앞선 수메르 시대의 단어 '에디누Edinu'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수로水路와 사막 사이의 초원인 '스텝steppe'을 뜻하는 단어로, 이 낙원상실 신화가 태고시대 중에서도 아주 먼 초기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창세기의 후반에는 이브와 대조를 이루는 완벽한 복종의 화신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야훼의 명령에 따라 그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해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신에게 불복종하느니 차라리 친족을 죽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 같다. 복종이 사랑과 생명존중의 본능을 이긴다는 것이다.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야훼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를 자신이 선택한 민족의 초대 족장으로 임명한다. 언약이 이루어지고 그 언약은 할례를 통해 남자의 몸에만 새겨진다. 유대교의 기원을 아브라함에게 두는 것은 모두 가부장적 통치와 관련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국가와 국가숭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고안되어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야기의 주된 목적은 야훼의 아내 아쉬라Asherah를 포함해서 여러 여신을 숭배하는 끈질기고 일반화된 관행을 근절하는 데 있었다. 여신숭배는 전통적으로 여성적 헌신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이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고고학적 기록에서 거듭거듭 증명되었다.
생명의 나무와 사악한 뱀이 등장하는 정본正本 이브 이야기는, 신전 안에 세워둔 나무토막이나 나무기둥, 신성한 나무로 상징되는 아쉬라뿐만 아니라 동양과 지중해 동쪽지역에서 성행하던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여신숭배를 타파하기 위해 고안됐다. 국가와 신전은 신, 국왕, 대사제를 포함하는 남성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고자 했다. 여성과 신성 사이의 연결고리는 해체되어 낙원 자체도 주로 남성의 영역이 되었다.
아쉬라에 대한 묘사와 의례에는 언제나 나무나 나무같은 물건이 등장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심었고, 신명기16:21에서 심는 것이 금지된 살아있는 나무, 일정하게 양식화된, 혹은 신성한 나무, 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 때로는 땅에 심어진 나무 같은 물건 등으로 상징될 수 있었고, 그녀의 모습이 살아있는 나무에 조각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숭배를 비난하는 성경 구절은 출애굽기, 신명기, 열왕기, 사사기,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가 원래 야훼의 아내 혹은 배우자였음은 이제 반박의 여지가 없다.
<201쪽>
우리가 사망한 후에 아무도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사후세계에서는 회한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사후에 우리는 용기가 부족했던 점,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점, 느낀 만큼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 점, 우리의 창의적 재능을 사용하지 않았던 점 등을 후회할 것이다. 타인을 다치게 했던 일, 마음을 짓밟으려 했던 일, 희망을 없앴던 일에 대해 회한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 가슴에는 무한한 연민이 가득 차 있어서 처벌의 여지가 전혀 없다. 유일한 치유책은 진정한 자기 용서다. 그리고 유일한 자동안전장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늘 그리고 영원히 'all that is'의 일부라는 인식이다.
야훼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의를 믿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두려워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시험했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나 왕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흔히 '두려움'으로 표현했다. 절대적 권위자를 사랑, 신뢰, 믿음 같은 친밀한 감정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에게 복종만 한다면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믿음'과 '복종'이라는 개념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강요된 믿음은 내면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심한 경우, 그런 믿음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자신에 대한 병적인 거부, 광신, 전쟁, 테러로 이어진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모든 것all that is'과 연결돼 있다는 타고난 인식에서 발원한다. 우주가 선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천진한 아이의 면모를 되찾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본성은 알고 있다. 육신이 소멸한 뒤에도 우리는 살아남는다는 것, 사후세계가 심판과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 모두를 아우르는 'all that is'는 헤아릴 수 없이 자애롭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