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레오Leo는 말을 못한다. 소년시절 보트의 프로펠러에 목을 심하게 다쳤고, 그의 어머니는 아미시Amish의 관습에 따라 수술을 거부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대부분의 언어장애인이 듣지 못하는 데 반해, 레오는 모든 소리를 듣고 언어를 이해한다. 남의 말에 대꾸를 못하니 바보취급이 일상이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시끄럽고 번잡한 도시에서 묵언수행자처럼 산다. 클럽에서 바텐더 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공일(아미시공동체에서 목수일을 익힌 듯)을 한다.
그러다가 사건에 휘말린다. 어디론가 사라진 나디라를 백방으로 찾아다니던 그는 차를 훔치고, 함께 일했던 클럽에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해치고 죽인다. 그리고 결국 나디라를 잃는다. 그가 '음소거mute'로 우는 장면은 정말 가슴 아프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더구나 그는 신실한 아미시교도이고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는데...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일까? 이 영화는 비극tragedy이다.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 라 브뤼에르
Life is a tragedy for those who feel, and a comedy for those who think. - Jean de La Bruyère
"이 세상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지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 호레이스 월폴
The world is a tragedy to those who feel, but a comedy to those who think. - Horace Walpole
이 두 격언은 결국 같은 뜻이지만 관점의 차이가 있다. 인물 중심으로 보면 '인생', 배경 중심으로 보면 '세상'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이라고 했는데 그가 각본가, 배우, 감독을 겸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삶은 (렌즈를 통해)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 롱샷으로 보면 희극' 또는 '삶은 주인공의 관점에서는 비극, 감독의 관점에서는 희극'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레오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면 비극이지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보면 희극적 측면들이 보인다. 소년 레오를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의료진은 이렇게 설득한다. "내부조직이 심하게 손상됐어요. 고칠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시도해보지 않으면 레오는 결코 말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아드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봐야죠. 어머님의 신앙을 이해하지만, 가끔 주님께서는 인간의 손을 빌려 최선을 일을 행하시거든요."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안돼요. ... 괜챦을 거예요. 집으로 데려가면 돼요. 주님께서 레오를 치유해주실 거예요." 레오는 개입할 수는 없었지만, 깨어있었고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곧바로 30년 후로 넘어가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이 짧은 오프닝은 마치 '예언'이나 '신탁'처럼 영화가 끝날 무렵 온전히 실현된다. 정확히 '말이 씨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 의학기술이 충분히 발달했음에도 종교적 이유로 수술을 거부하는 사람을 '인간의 손을 빌려 치유'하는 과정은 이상하고 절묘하다.
두 명의 절친한 의사가 있다. 캑터스는 딸을 애지중지 보호하는 아빠이면서 동시에 아내 살인범이고, 더그는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이식전문의'이자 소녀환자의 몰카를 찍는 소아성애자다. 둘 다 레오를 업신여기지만 어쨌거나 레오의 인생에 제때에 끼어들어 제역할을 하고 사라진다. 도무지 입을 다물지 않고 막말을 쏟아내던 캑터스는 레오의 손에 '벙어리'가 되어, 말 못하는 자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죽는다. 캑터스의 어린 딸까지 넘보던 더그는 뚱딴지처럼 레오에게 인공성대를 이식해주고는 역시 레오의 손에 죽는다.
레오가 다치고 구조되고 병원에 다녀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누나가 있었다. 30년만에 다시 말을 하게 된 레오를 지켜보는 어린 소녀 조시Josie가 있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듯이, 경험자(느끼는 자)가 있고 관찰자(생각하는 자)가 있다(그들은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다). 물 속에서 목소리를 잃었던 소년은, 목소리를 되찾고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물 밖으로 나온다. 이 때, 조시도 처음으로 말문을 연다. 둘은 처음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웃는다. 조시는 레오 덕분에 캑터스와 더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할머니집으로 향한다. 이 영화는 희극comedy이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피노키오]를 연상시킨다. 그 이야기는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옛날옛적에... 나무토막이 하나 있었다." 누구나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알고 있지만, 진짜 주인공은 '나무토막'이다. 그 나무토막은 어린애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간지럼을 타며 웃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 '의식있는 존재'가 나무인형으로 모습을 바꾸고 진화의 길을 걷는다. 피노키오를 창조한 목수 주세페(요셉Joseph의 이탈리아식 표기) 제페토는 멋진 꼭두각시 인형을 하나 만들어서 인형극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형을 만들고 이름을 지어줬지만 끈으로 조종하긴 커녕 곁에 둘 수도 없었다. 생각!할 줄 알고 움직일 수 있는데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피노키오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 제페토를 곤란하게 하고 말썽을 피우고, 책을 구해 학교에 보냈더니 집을 나가버렸다. 피노키오는 제멋대로freewill 삶의 희노애락을 실컷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간다.
피노키오는 파란 머리의 소녀, 파란 요정, 파란 새끼양...의 도움으로 번번히 위기를 모면한다. 마치 캄캄한 밤의 달빛처럼,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피노키오를 보살피고 길을 보여준다. 파란 머리카락에, 입술과 손톱까지 파랗게 칠한 나디라는, 레오의 삶에 빛과 희망을 주고 그가 목소리를 되찾는 길에 첫단추가 되어준다. 파란 요정은, 현실과 꿈을 오가며 신의 아이를 보호하고 안내하는 '여성성의 화신'이다.
클럽에서 몸싸움을 할 때, 또다른 파란머리의 웨이트리스가 싸움을 말리려다가 레오의 팔에 맞아 쓰러진다. 그 장면은 나중에 레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던 찰나에 '꿈'처럼 재생되는데 웨이트리스의 얼굴이 나디라로 바뀐다. 그 비몽사몽의 차원에서 나디라는 호소한다. "난 여기 있으면 안돼.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나에 대해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난 여기에 있으면 안돼. 난 너를 떠날거야. 난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내가 널 부를 수 있어야 해, 알겠어? 난 너한테 다가갈 수 있어야 해." 절실히 소통을 원하는 나디라를 레오는 밀쳐버린다. 레오가 깨어났을 때 벽(나디라의 집)에는 영화 [푸른 천사Der Blaue Engel/The Blue Angel]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사실 화면의 대부분이 청색, 청록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영화 자체가 '파란 요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옳지만, 정확히는 '생각'이 씨가 된다. 어떤 씨앗은 아침에 심어서 저녁에 거두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몇년, 몇십년만에 열매를 맺기도 한다. 맨 처음에 생각이 있고, 그것이 소리(말)와 기호(글)로 불완전하게 카피된다. 그 과정에서 의미의 퇴색과 유실이 불가피한데도 우리는 '언어'에 의지해 소통하게 되었고, 그래서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가 되어버렸다. 레오와 조시는 눈빛과 표정, 몸짓, 글씨, 그림...으로 소통하는데 나름 효율적이고 정직하다. 캑터스와 더그의 '말'은 떠보는 말, 거짓말, 욕설, 속임수와 과장...으로 오염되어 있어서 오히려 이해하기 번거롭다. 그에 비하면 파란요정의 소통방식은 얼마나 직관적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둔감해졌다. 제목 '뮤트mute'는, 불완전한 인간언어를 넘어 소통을 갈망하는 푸른요정의 벙어리나 다름없는 처지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나디라의 이름 Naadirah(نادره)는 파슈토어pashto語로 '희귀하다'는 뜻이다. 잠재의식 또는 상위자아 또는 수호천사가 잠시나마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건 정말로 희귀한 일일 것이다.
00:07:59 "레오, 그만 숨어. 네가 얼마나 잘생겼는데. '다 스타르고 토라Da stargo tora.' 내 눈의 검은색이라는 말이야. 나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거라는 뜻이지." 눈의 검은색은 '동공'일까. 그 마법의 영사실을 운영하는 신성을 뜻하는 걸까. 이란 문화권에서 연인들이 실제로 쓰는 말이라는데... 시적詩的이고 심오하다.
[소스코드]와 [더 문]을 좋아해서 이 영화를 봤다. 비록 평점은 낮지만 뛰어난 감독이 시시한 영화를 만들 리 없으므로! 액션영화나 복수극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인지 자동차씬도 격투씬도 밋밋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식당의 TV화면인데, 방청석에 [더 문Moon]의 주인공 샘 벨이 가득하다. 무려 156명이라고 써 있다. 얼마나 창의적인가. 저 장면을 위해 들인 정성에 감탄과 웃음이 절로 나오는 한편으로 궁금증이 샘솟는다. 앞줄에서 발언하는 나이든 이가 원본 '샘 벨'인가? 지구로 출발했던 그 샘 벨은 살아있을까? 그 후에 무슨 일이? 저들은 각자 고유의 정체성을 가졌을까? 대동소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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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무에 앉아있는 친구이자 동료인 아름다운 새 두마리. 한마리는 달콤한 열매를 먹지만 다른 새는 먹지 않고 친구를 지켜본다." - 리그베다Rig Veda
"인간의 노력 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은 마음 안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 제임스 S. 퍼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