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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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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7. 22:19 책에서 발췌

원제: M. K. Gandhi Interprets THE BHAGAVADGITA /1991

 

 

제1장과 제2장 中

<5쪽>

[기타]는 사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두 본성,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세대에 걸쳐 [기타]의 중요한 언어들은 새롭고 더욱 깊은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10쪽>  
나는 도움을 받지않고 [기타]를 읽어낼 만큼 산스크리트Sanskrit에 능통하지 못했다. 두 영국인 친구는 당연히 산스크리트에 까막눈이었다. 그들은 에드윈 아놀드 경의 훌륭한 번역판을 가져왔다. 나는 곧장 전체를 읽어보았고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 줄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열아홉 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있다. 거기에는 최고의 지식이 구현되어 있다. 그 열아홉 줄에 담겨있는 원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이 번뜩인다. 아니 그 자체가 높은 목적을 위하여 단련된 지성이다. 그 속에 담겨있는 지식은 경험의 결실이다. ...중략...  [기타]의 다른 부분에 이 열아홉 줄의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15쪽>  
[기타]의 주제는 단순히 브라만Brahman의 체현과 그 방법들이다. 싸움은 다만 그 가르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략... 나는 두료다나와 그의 측근들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적satanic 충동을 드러내 보여주고, 아르주나와 그의 지지자들은 신적Godward 충동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마당은 우리의 몸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경험으로 알고있는 시인-선지자가 우리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투쟁을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 누구든지 남을 두려워하고, 재산을 쌓아두거나, 육체의 쾌락에 빠져든 사람은 틀림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싸울 것이다. ...... 우리의 이성을 훼방하는 이 세상에 폭력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기타]는 우리를 그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달아날 준비가 되어있는 자는 차라리 죽이거나 죽는 게 나을 것이다. 

<24쪽> 
악은 어떤 선이 한편이 되어줄 때 비로소 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대변하는 악한 체제는 선한 민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지탱된다. 만일 그 지지가 철수된다면 악한 체계는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 비협조non-cooperation 투쟁을 밑받침하는 원리였다. 정부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선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듯이 두료다나는 자기쪽에 정의가 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비슈마와 드로나같은 선한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27쪽>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2장 22)" 아르주나는 싸워야 하느냐 여부를 묻고있는 게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싸워도 좋다는 허락을 유디슈티라(판다바家의 맏이)에게 받아내었고 인드라한테서는 튼튼한 무기를 얻었다. 만일 그가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면 싸움이 있기 전날에 그렇다고 크리슈나에게 말했으리라. 그랬을 경우에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두료다나에게 가서 그를 싸워 이기라고 말해줬을 것이다. 그는 비라트왕이 두료다나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싸웠다. 그는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은 누구를 상대로 싸울 것인가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38쪽>  
아르주나가 스리 크리슈나에게 물은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가 아니다. 그의 질문은, 사람이 자기의 친척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였다. 이 질문은 편견의 산물이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자기의 피붙이이자 사람들한테서 존경받고 있는 비슈마와 드로나다. 어떻게 그들을 죽인단 말인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구를 죽일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자에게 우리의 상식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43쪽>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밧줄을 뱀으로 보아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45쪽> 
세월과 함께 판다바도 카우라바도 잊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잊혀진다 해도 지금 우리 가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타]다. 크리슈나는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의 수레를 몰고있는 '아트만'이다. 우리는 수레의 고삐를 그에게 넘겨줄 때만 승리할 수 있다. 신은 꼭두각시 연극의 연출가처럼 우리를 춤추게 한다. 

[기타]는 우리를 편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정신적 문제를 만날 때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러고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 크리슈나가 열여덟 장에 걸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이다. 

<81쪽> 
스리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너는 나의 팔이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다."  

<84쪽> 
우리가 한다는 짓이 기껏해야 샤이크칠리(공상가)처럼 환영幻影에 빠져 헤매는 것이라면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라는 돌들로 포장되어 있다.  

<107쪽> 
[바가바드기타]는 여자들과 바이샤와 수드라와 모든 계급의 사람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건강하고 기름졌든 마르고 야위었든 상관없이, 마음만 강하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단단하게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감각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사티아그라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115쪽>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는 '슈니아타shunyata(無, 空)'를 뜻한다. 그러나 [기타]의 니르바나는 평화를 뜻한다. 그래서 '브라마-니르바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차이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니르바나와 [기타]의 니르바나가 가리키고 있는 상태는 같은 것이다. 상당수의 학식있는 사람들이, 부처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교리를 가르친 바 없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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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예찬하는 19줄(2장 54~72)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오, 크리슈나여, 

안정된 지혜를 지니고 초의식 상태에 잠긴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나이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나이까?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라 부를 수 있도다.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이 나타나든 악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려 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현자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로다.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있는 대상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에게는 밤중이로다. 

갈망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도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오, 파르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하는 자의 상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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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부분(2장 11~30) 

그대는 제법 지혜로운 말을 했으되, 
슬퍼할 것 없는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산 것들을 위해서도 죽은 것들을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느니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란 없으며,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니라. 

 

바로 이 몸에서, 
몸을 입은 이(영혼)가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거치듯이 
그렇게 또 다른 몸으로 들어가거니와, 
그런 까닭에 바탕이 굳은 자는 슬퍼하지 않느니라.  

 

오, 카운테야여,  
감각이 대상에 닿으매 
거기서 차가움과 뜨거움,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고가며 잠깐 머무느니라. 
그것들을 참아 견디어라. 오, 바라타여.  

오, 지극히 고상한 사람이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지럽거나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 
그 사람만이 영생불멸에 이를 수 있느니라.


비존재는 결코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느니,  
진리를 보는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 둘의 비밀은 보여졌도다.

 

불멸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번창하고 있음을 알지어다. 
그 누구도 저 불변하는 존재 자체를 파멸시킬 수 없느니라. 


영원하고 불멸하며  
측량할 수 없는 분의 체현인 이 육신들은 유한(有限) 하도다.  
그런즉, 싸워라, 오, 바라타여. 


이것(아트만)을 살해자로 생각하는 자와  
이것이 살해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둘 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로다.  
이것은 죽이지도 않으며 죽임을 당하지도 않느니라. 

 

이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도다.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니라. 
태어나지 않고 영원하고 영속하며 오랜 것. 
육신이 죽게 될 때도 이것은 죽지 않는도다.  

오, 파르타여,  
멸망하지 않고 영원하며 태어나지도 않았고  
불변하는 이것(아트만)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를 어떻게 죽이거나 죽게끔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몸을 입은 사람도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느니라.  

이것은 무기가 상처입히지 못하고,  
이것은 불이 태우지 못하고,  
이것은 물이 적시지 못하고,  
이것은 바람이 말리지 못하느니라. 

 

모든 자름과 태움과 적심과 말림 그 너머에,  
영원하고 모든 것에 충만하고 안정되고  
움직여지지 않고 영속하는 이것이 있느니라.  

감각으로도 잡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잡을 수 없도다. 
이것을 일컬어 불변한다고 하느니, 
그런즉 이러한 그것을 안다면 그대는 비탄에 빠지지 않으리.  

이것(아트만)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오, 마하바후여, 
그대는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나느니,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을 뉘우쳐서는 안되느니라.

 

모든 존재의  
태어나기 전 상태는 명백하지 않고,  
중간상태는 명백하고,  
죽은 뒤의 상태는 다시 명백하지 않느니라. 
오, 바라타여, 슬퍼하며 울 까닭이 무엇이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신기하다고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신기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신기하다는 말을 듣거니와,  
그러나 이것을 듣는다 해도 
이것을 참으로 아는 자는 아무도 없도다.

 

모든 존재의 몸 안에서 
몸을 입은 이것은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나니,

오, 바라타여, 
그러한 즉 그대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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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의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게는 이 책에 부록으로 실린 게 제일 좋았다. 용비어천가 같은 옛스러운 말투에, 원문에 충실한 듯한 긴 문장이 마음에 든다.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근사한 전차에 아르주나가 신과 함께 올라타 있는 수많은 미술작품의 위용과는 달리, [바가바드기타]에 실제 전투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제1장 첫줄부터 곧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고하며 독자를 긴장시키지만, 제18편 막줄에 이르러도 전쟁은 시작되지 않는다. 크리슈나 신은, 절망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아르주나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는다. 전쟁을 말리지도 않고, 승리를 위해 힘을 보태지도 않고, 싸움을 회피할 요령도 일러주지 않는다. 콜로세움의 관객처럼 임전무퇴를 종용할 뿐이다. 다만 아르주나를 위해 개인지도(간디는 '토론'이라고 말하는)를 시작한다.

 

크리슈나는 '전쟁같은 삶'에서 좌절한 한 인간에게 '선택을 했으면 피하지 말고 뛰어들라'고 격려하면서, 귀중한 [요가 매뉴얼]을 손에 쥐어주는 것 같다. 그것도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일개 '마부'로 현신하여, 야훼보다 열 배는 자상한 방식으로!

 

 

"참자아를 기수로, 육체를 마차로, 지성을 마부로, 마음을 고삐로, 감각을 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말이 잘 훈련되어 있고, 고삐가 튼튼하고, 마부의 손에 잘 맞으면, 그는 본연의 상태라는 목적지, 곧 온 우주에 편만한 신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 스와미 비베카난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