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CENTRISM/2009
<36쪽>
제3장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실제 세계가 어떤 지각 행위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는 물리학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제가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아인슈타인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아무도 없어도 소리는 나는 것일까?”
여러분은 아마도 이 오래된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거나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친구나 가족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단호한 대답을 듣게 된다.
"당연히 소리가 나죠.”
얼마 전 한 사람은 고민해볼 가치도 없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며 불쾌한 표정을 내게 보였다.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현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우리와 무관하게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물인 나는 우주 속에서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성서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서구 세계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사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발생하는 소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또는 고민하기 위한 충분한 과학적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소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되는 것일까? 초등학교 고학년 과학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기 힘든 독자를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리는 매질의 교란에 의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매질은 공기다. 또는 물이나 쇠처럼 공기보나 밀도가 높은 물질이 매질일 경우, 소리는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공기는 빠르게 진동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공기가 초당 5~30회로 진동할 때, 그늘의 민감한 피부는 분명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나무가 쓰러질 때 우리가 실질적으로 감지하는 대상은 공기의 진동이다. 이는 시속 1,200킬로미터의 속도로 주변 공기를 매질삼아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기의 균일한 밀도가 깨졌다가 복원된다. 과학적 설명에 따르면, 크고 작은 공기압의 변화는 두뇌와 귀로 이뤄진 청각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지속된다. 이 변화는 작은 바람이 빠르게 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소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무가 쓰러지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누군가 근처에 있다면 공기 파동이 물리적으로 고막을 진동시킨다. 그런데 두뇌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초당 20~20,000회 진동해야 한다(나이가 마흔이 넘을 경우, 상한선은 10,000회 정도로 낮아지며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러운 콘서트 장에서 젊음을 보낸 경우는 더 낮아진다). 물론 초당 15회 진동하는 파동과 30회 진동하는 파동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후자는 들을 수 있지만 전자는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뇌 신경계가 설계된 방식 때문이다. 고막의 진동으로부터 자극을 얻은 뉴런은 전기 신호를 두뇌로 송출하고, 그러면 두뇌는 그 신호를 소리로 해석한다. 이 전체 과정은 분명하게도 공생적(symbiotic) 경험이다.
공기 파동은 그 자체로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1초에 15회 진동하는 파동은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듣지 못하고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청각시스템은 특정 범위의 주파수만 인식하도록 설계됐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청각적 경험에서 관찰자의 귀와 두뇌는 공기 파동만큼 필수적인 요소다. 바로 이러한 형태로 우리의 의식은 외부 세상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것은 적막한 공기의 파동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아무도 없어도 나무는 쓰러지면서 소리를 내지."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무도 없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는 자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도 없는 숲 한가운데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촛불이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비록 권장할 만한 실험 조건은 아니지만, 스모키 베어(Smokey the Bear, 미국 산림청의 산불방지 홍보용 회색 곰-옮긴이)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화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고 해두자, 여기서 아무도 촛불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도 불꽃은 여전히 밝은 주황색을 발하는 것일까?
양자 실험의 결과를 부인하고 관찰자가 없어도 전자를 비롯한 모든 입자가 구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가정해도(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자), 촛불의 실체는 결국 뜨거운 가스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광원과 마찬가지로 광자 또는 전자기 에너지 파동을 방출한다. 이들 모두 전기적 자기적 파동으로 이뤄져 있다. 전기와 자기의 순간적인 출현이야말로 빛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전기파나 자기파 자체로 어떤 시각적 특성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촛불 그 자체로 주황색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촛불이 방출한 전자파가 우리의 망막에 도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때 400~700나노미터(nanometer, 10억분의 1미터)에 해당하는 파장이 망막에 분포한 800만 개의 원추세포에 자극을 전달한다. 그러면 원추세포는 다시 이웃한 뉴런에 신호를 전하고, 그 신호는 시속 400킬로미터 속도로 따뜻하고 축축한 후두부에 도달한다. 그곳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뉴런들이 자극을 받아 발화하고,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친숙한 '외부 세상' 속에서 주황색 불꽃을 경험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동일한 자극에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가령 다른 생명체는 같은 촛불을 회색, 불꽃으로 본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황색이 애초에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적 자기적 파동의 흐름이다. 주황색 불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시각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인식과 사물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는다.
무엇인가 만질 때는 어떨까? 쓰러진 나무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면 딱딱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딱딱함 역시 두뇌 속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에 투영된 감각이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딱딱함이라는 감촉은 실제로 딱딱한 물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모든 원자의 외부 껍질에 존재하는 음전하를 띤 전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동일한 극성을 띤 전하는 서로 밀어낸다. 나무껍질을 이루는 원자의 전자는 손가락을 이루는 원자의 전자를 밀어내고, 이러한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우리는 나무껍질이 딱딱하다고 느낀다. 엄밀하게 말해서 손가락이 나무껍질과 접촉함으로써 딱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을 이루는 원자의 대부분은 거대한 미식축구 경기장 50야드 라인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텅 비어 있다. 딱딱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에너지장이 아니라 정말로 딱딱한 물질이라면, 우리의 손가락은 안개를 휘젓듯 나무 속을 쉽게 관통할 것이다.
좀 더 직관적인 사례로 무지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산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무지개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식 주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
여기서도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무지개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무지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태양과 물방울 그리고 적절한 위치에 있는 관찰자의 눈(또는 대체물인 카메라)이 그것이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 빛은 40~42도의 각도로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개를 보려면 굴절된 빛이 도달하는 범위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또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사람은 서로 다른 무지개를 본다. 다른 사람이 보는 무지개는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리고 반사하는 물방울의 크기가 클수록 색상은 선명해지고 파란색 띠는 좁아진다.
잔디밭 스프링클러처럼 물방울이 아주 가까이 있을 때에는 무지개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무지개는 오직 우리 자신만이 볼 수 있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관찰자가 없다면? 당연히 무지개도 없다. 무지개의 기하학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눈과 두뇌로 이뤄진 시각 시스템(또는 카메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지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과 물방울만큼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찰자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관찰자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면 무지개 역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우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지개의 이와 같은 주관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동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동화 속 무지개는 뚜렷하게 존재하는 실체다. 이와 똑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고층빌딩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관찰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생물중심주의의 첫 번째 원칙에 도달했다.
생물중심주의 제1원칙 ▶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의식을 수반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