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쪽>
스님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바꿔 [능엄경] 속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아난다의 대화를 대중들에게 설하기 시작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아난다는 대답했다.
"종에서 납니다."
"그럼 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종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흠... 그럼, 아무리 종소리가 났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래도 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다가 마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 허공 가운데서 종소리가 나는구나!"
"예, 진짜 빈(空) 가운데서 묘한 작용이 일고 있습니다."
<120쪽>
"나에게 일생은 땅 밑의 뿌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식물처럼 보였다. 우리들이 보고있는 것은 꽃이며,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나의 일생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사건은 불멸의 세계가 순간의 세계 속으로 침입한 일이다" - 칼 구스타프 융
<130쪽>
정신분석을 창시한 사람은 프로이트였고 그래서 청고스님도 처음에는 그의 저술을 즐겨 읽었다. 프로이트는 수면 아래 잠긴 빙산처럼 의식에 가려진 무의식을 발견했고, 그 무의식에 의한 폐해가 크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만으로도 놀라운 학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무의식을 밝혀가는 과정, 정신병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은 너무나 작위적이었다. 청고스님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너무 성적인 부분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봤던 것이다. 세상살이는 성문제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심리적 기제를 사람 간의 권력관계로 파악한 아들러의 이론도 단순명료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허술해 보였다. 다양한 정신분석이론 중 청고스님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어보였던 것은 다름아닌 칼 구스타프 융의 사상이었다. 청고스님은 그의 집단무의식 이론에 매혹되었다. 나중에 출가한 후 불경을 공부하다가 집단무의식이 유식학唯識學과 제법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융의 이론은 어느 부분 불교사상과 상통합니다. 특히 집단무의식의 개념은 심리적 기제를 개체에서만 찾지않고, 계통발생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유식학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융은 원형archetype이 영구히 의식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원형은 본능적인 것으로 항상 의식 아래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죠.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짓는 모든 업業까지 저장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개념보다는 융이 주장한 원형을 둘러싼 콤플렉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식학에서는 삼성三性, 즉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중시합니다. 변계소집성이란 인간은 분별에 의해 사물을 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타기성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원성실성이란 인식과 대상의 구별이 없는 진여眞如의 세계를 말합니다. 유식학의 삼성은 고스란히 융의 이론인 '개성화의 과정'과 일치합니다. 개성화의 과정이란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융의 저서 [아이온aion]에 등장하는 아이온은 서양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융은 아이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미트라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으로서 온갖 것을 창조하고 파괴합니다. 아이온은 뱀의 몸을 하고있지만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자리는 태양을 상징하지만 뱀은 겨울 혹은 우기雨期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아이온은 상반되는 것, 즉 빛과 어둠, 창조와 파괴의 어울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이온이 갖고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열쇠입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산스크리트어 알라야 비즈냐나(आलयविज्ञान ālaya vijñāna)를 음을 따라 표기한 것으로,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또는 간단히 제8식(第八識, eighth consciousness)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마음[心]은 6식(六識: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서는 마음에는 6식 외에 이보다 더 심층의 의식인 제7식인 말나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따라서 마음은 8식(八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