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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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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3. 00:21 영화

 

 

누구의 추천도 없이 그냥 어쩌다가 보게 된 영화. 이래저래 '지루한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영화인데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봤다. 내가 나이먹고 생각이 많아져서 '지루함'을 잘 못느끼는 경지로 가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ㅋ
 
영화 참 별나다. 영국북부의 언덕에 자리잡은 주유소가 배경의 전부이고, 등장인물은 총9명에 사슴 몇마리. 발랄한 캐릭터도 없지만 악역도 없다. OST도 없다. 음악이라고는 셸이 요리하고 샤워할 때 불렀던 노래와 엔딩에서의 라디오 곡이 전부다. 모든 장면이 롱테이크처럼 느껴지고 줄거리 역시 한줄요약 가능할 정도지만 그렇게 연출한 의도를 알 것도 같다. 

 

 

황량한 고지대 길가에 서있는 주유소. 밤과 낮이 교차할 뿐 매일같이 바람만 부는 그 곳에 말없고 우울한 아빠와 성년을 앞둔 셸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집나간' 셸의 엄마를 찾고싶어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것 같다.
 
셸은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곧이어 떠나는 그들을 지켜본다. 필요에 이끌려 멈춰섰다가 필요가 충족되면 곧 떠나는 사람들, 간혹 아는 사람이 주유를 하러오면 몇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손님은 떠나간다. 그렇게 볼일 끝나면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당연한 모습이 매정하게 보인다. 떠나가서는 13년째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설정 때문인가. 바라보는 나마저 '분리불안'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느려터진 전개 덕분이었을 것이다. 
 
장성한 딸과 외로운 아버지 사이의 복잡미묘한 감정들, 아빠는 상실감과 책임감과 외로움이 범벅이 된 가엾은 캐릭터에, 간질까지 있어서 원래는 딸의 '보호자'였겠으나 점차 딸에게 부담이 되어가고 있다. 서로에게 '보호자'인 부녀. 셸에게 있어서도 아빠는 유일하게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단 한사람이다. 애써 밝게 살아보려고, 사람들과 어울려보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 
 
이 영화는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같다. 딸이 떠났을(?) 때의 아빠의 고통, 아빠가 떠났을 때(!) 셸이 느꼈던 고통이 전해져와서 나도 아팠다. 셸의 아빠는 딸 없이 살아갈 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앞서 세상을 떠나버린다. 셸 역시 혼자 남겨지느니 아무데로나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짐가방을 챙길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 떠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먼 길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안그렇다. 어디로 가서 누구와 지내든 셸은 분리가 두려워 해맑게 웃기 어려울 것이고, 헤어지지 않으려고 (아빠에게 그랬듯) 제손을 타인의 입에 물려줄 것이다. 두려움의 기억은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낯선 배우들 뿐이라서, 영화가 아닌 누군가의 진짜 현실을 본 것만 같다. 세상의 '셸'들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한다. 아픈 날들을 딛고 해맑게 웃으며 살 수있기를 기원한다.

 

 

 

 

 

<2014/04/15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