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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0. 01:58 영화

 

 

 

영화 중반까지 '나는 어쩌다가 어린이 방학특선같은 이런 영화를 보게 되었나' 하였고, 며칠이 지나고서야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가 영화로 구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위한 흥미로운 모험담이면서, 그 이면에는 인류의 정신적 진화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원작소설의 제목, 책 표지 그리고 영화의 포스터들은 이것이 '빛'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원작자도, 영화감독도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지하도시 '엠버(Ember: 숯불, 불붙은 석탄, 타고남은 불)'는 200년을 존속했다. 그 곳에는 바깥세상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대들이 살고 있다. 기괴하게 큰 동물들이 출몰하는 걸로 봐서 세계대전 급의 핵재앙으로 인류는 거의 멸종한 것 같고, 현명한 건설자Builder들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For the good of all mankind' 지하도시를 지었다. 그들은 때가 되었을 때 생존자들이 지상으로 나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를 바라면서 귀한 '열쇠'를 남겼지만......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ㅋ 200년 동안 엠버는 훌륭한 삶의 터전이었지만, 인간사회답게 반역, 부패, 은폐, 기만... 있을 건 다 있다. 햇빛이 없으니 침침한 전등이 유일한 '빛'이자 희망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걸 암송한다. 

 

"우리 도시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최고의 배려로 이곳을 선택하신 건설자들에게 무궁한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에서 번영합니다. 우리의 중심에서 심장처럼 뛰고 있는 위대한 발전기의 무한한 능력에 감사를 함양합니다. 엠버 너머에는 사방이 영원한 어둠입니다. 우리 도시가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광명입니다." 그러면 시장이 이렇게 응한다. "It's true."

 

 

도시가 수명을 다해 가는데도, 엠버 밖을 탐험하는 것은 불법!이고 지도자는 어리석다. 10대인 리나와 둔은 우여곡절의 모험 끝에 지상에 당도한다. 그들은 호기심과 용기를 지녔고, 현명한 어른들로부터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받는다. 먼 훗날 엠버 밖으로 나오게 될 후손들을 위해 건설자들이 마련해 둔 세심한 '상승 코스'가 감동을 준다. 어둠(전등빛) 속에 살아온 그들이, 난생 처음 '떠오르는 해'를 목격하는 장면은 더 감동이다. 내내 어둡던 화면에 나타난 푸른 하늘과 흰구름은 축복같다. 

 

 

밖에서 보면 엠버는 동굴이다. 그래서 거대나방 같은 게 도시 안까지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리나와 둔은 그 동굴 안으로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개척자의 소임을 다한다. 그들은 '어둠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라는 존재 자체로 엠버시민들에게 표지판이 되어줄 수 있다. 만일 동료들을 꺼내주겠다는 선의로 엠버로 돌아간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런 처지가 되기 쉽다.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가지고 왔다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듣게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신들을 풀어주어 위로 데려가려는 자를 붙잡아 죽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영화는 이런 나레이션(둔의 아빠 목소리?)으로 끝을 맺는다.

01:28:27

리나와 둔은 희망을 돌에 묶어서 도시를 향해 떨어뜨렸다. 돌은 지붕 위에 걸리거나 홈통으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운명은 또 다른 방향을 잡았고 메시지는 갈 길을 찾았다. 이제 모든 이를 위한 길이 열렸다. 엠버의 불꽃을 살려왔던 우리 모두는 어둠을 거쳐서, 지상의 공기와 빛 속에서 다시 살 수 있다.

 

 

나는 10여년 전쯤 '동굴의 비유'를 처음 접했다. 대략 '무지몽매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진짜세계와, 그들의 처지를 알려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내용이었다. 지금 검색을 해봐도 대체로 비슷하다. '배운 자들이,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그들에게 앎을 전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 속 '죄수'들을 무지렁이로 보는 건 그렇다쳐도, 자신을 그 죄수와 동일시하는 이가 없다는 건 좀 이상하다.

 

 

 

서광사에서 나온 [플라톤의 국가·政體] 441쪽에는 이런 도표가 있다. 이건 옛날 아버지 방에 진열되어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닮았다. 그 책들은 하드커버에 금박으로 제목을 새긴 대단히 고급스러운 모양새에, 세로쓰기 조판이었는데... 톨스토이와 생텍쥐페리가 웬 한자를 그렇게나 많이 썼던지...ㅋ 


이런 표를 들여다보며 공부할 기회가 나에게 없었던 것에 감사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배우든간에, 이 세계는 엠버이며 동굴이고 우리는 모두 '죄수'다. 리나와 둔처럼 현실 너머를 탐구하는가, 다른 이들처럼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믿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