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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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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8. 21:36 책에서 발췌

 

 

<146쪽>

우리가 버몬트 골짜기로 왔을 때는 땅값이 매우 쌌는데, 우리가 떠나기로 작정했을 무렵 한국전쟁 때문에 땅값이 치솟았다. 스코트는 전쟁에서 오는 이익을 원하지 않아서 지역산림 발전을 위해 자기몫의 땅을 윈홀 마을에 기부했다. 마을사람들은 세금을 안 내려고 그러는 줄 판단해서인지 마지못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기부가 선의에서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머지 절반의 땅이 팔리자 우리는 메인에 있는 땅을 살 수 있었다. 한 친구가 내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큰 이익을 보고 팔 수 있었습니다. 스코트는 엄청나게 값이 오른 땅과 산 모두를 포기한 거구요. 당신은 예전에 뉴욕 메시백화점의 근사한 제의를 거절한 일도 있지요(메시가 사탕단풍 캔디를 다량 주문했을 때). 당신과 스코트는 돈을 벌지 않으려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네요."

 

<165쪽>  
나와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는, 나하고 스코트의 관계 때문에 부모님이 얼마동안 한탄하던 때를 빼고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가까웠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나는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분들은 내가 참된 목표와 스코트에게 온마음을 다해 전념하고 헌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갖고있는 정치견해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의지와 불굴의 노력을 존중했다. 그분들은 인간관계에서 원숙해졌으며 스코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예전에 품고있던 선입견과 반대를 마침내 넘어선 것에 나는 진정한 만족감을 느꼈다.

 

 

<170쪽>

[월드 투머로우World Tomorrow]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견해야 어떻든간에 변혁운동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코트는 교사로서 자기가 주장하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한결같은 정직성과 애정이 담긴 이타성, 그 사람의 성격을 이루는 얼핏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덕성들의 근원적인 통합으로 계속해서 영감을 줄 것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리는 토르스타인 베블런과 스코트 니어링처럼, 어리석은 동시대인들에 의해 '감금되고 묶인' 대가들의 예를 본다. 한편 사회학과 경제학, 정치학의 좋은자리는 시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스코트의 평생에 걸친 업적은 경제학자, 교육자, 평화운동가, 인권옹호자, 좌파정치인, 국제 사회주의자, 생태주의자, 귀농운동가, 미래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이 모든 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학계에 머물렀던 것 이상으로 사회복지 부분에 더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한 통신원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학계에 남아 가르치는 생활을 포기한 것을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보통 교직에 있으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183쪽>

우리는 자주 늙음과 건강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답장을 썼다.

"...... 우리가 건강과 장수를 위해 실천에 옮긴 몇몇 지침을 소개합니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바깥일과 깊은 호흡, 금연, 커피와 차를  포함해 술이나 마약을 멀리 함, 간소한 식사, 채식주의, 설탕과 소금을 멀리 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이것들은 삶에 활력을 주고 수명을 연장시킬 것입니다. 약, 의사, 병원을 멀리하십시오." 

 

 

<196쪽>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신god'이라는 말을 쓰는가. 왜 '전체로서의 존재' 또는 '위대한 전체'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다음의 정의가 최선인 듯 싶다. "신의 본질은,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과 같다."

 

한 의사 친구에게 스코트는 이렇게 써 보냈다.

"내 건강상태를 염려하는 편지 고맙네. 자네 제안을 내가 이해하건데, 자네는 내가 다달이 소변을 받아다 자네에게 갖다주고 비타민B-12 주사를 맞으며 그밖에 필요한 처방이나 치료를 받기를 권하고 있네. 내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내 삶의 남은 기간동안 의사의 감독 아래 수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셈이 되는 걸세. 고맙네만, 나는 그런 과정을 밟느니 차라리 일찍 죽는 편을 택하겠네. 내 방식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보통의 건강과 원기를 유지하면서 적절히 절제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라네. 내가 올바른 식사방식과 절제된 생활로 잘 지낼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는 것이 나와 내가 속해있는 사회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 상각하네."

 

동물들이나 애완동물에 대한 우리 태도를 묻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동물들은 우리 형제들입니다. 우리 곁에서 성장하는 지구상의 다른 종족입니다. 동물들은 열등하지 않으며, 형태가 다른 자아들입니다. ... 우리는 이 창조물들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약탈하고 우리에 가둡니다. ... 우리는 어떤 동물은 친구로 만들고, 다른 동물들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스코트는 '동물들을 존중하라. 동물들이 자유롭게 달리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가 왜 아이를 갖지 않았는지, 가졌다면 우리의 조화로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지 질문을 받았다.

나는 보통 그 무렵(50년 전)에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남자와 사는 것은 매우 부도덕한 일이었으며, 사생아 신분의 어린 자녀들은 사랑하는 내 부모님을 몹시 괴롭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인습에 어긋나는 내 행동을 묵묵히 참아왔다. 나는 스코트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도 충만한 삶이어서 부족함이나 완전하지 못함이 없었다. 아이가 없어도 흥미로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것을 더욱 완전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우리는 아이를 가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스코트와 약속했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젊은이들로 둘러싸였다. 청년들 수천 명이 해마다 뉴잉글랜드에 있는 농장으로 우리들을 찾아왔다. 어떤이들은 가까운 곳에 살면서 우리와 같이 일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냥 들러서 함께 얘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편지로 자기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고 또 삶이 바뀌었는지 들려주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삶에 관한 우리 책을 읽고 많든 적든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많은 아이들을 가졌던 것이다.  이 밖에,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여, 즉 새로운 인구를 더하지 않음으로써 인구증가를 늦추었을 수도 있다.

 

<206쪽>

오랫동안 스코트와 나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큰 기대를 가졌는데, 이제 스코트가 삶의 마지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얘기하고 책을 읽었다. ......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 왔다. 그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 스코트는 자신의 죽음이 점쟎고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평온하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이는 궁극적인 경험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롱하거나 의식이 없는 채로 가는 대신 죽음을 음미하고 심지어 즐기고자 했다.

 

 

1862년 소로의 누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빠가 오랫동안 앓고 있을 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평이나 우리와 함께 남아있으려고 하는 소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완벽한 만족감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숨이 점점 약해졌고, 아무런 저항없이 오빠는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213쪽>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은 1980년(스코트의 나이 97세), 국제 채식주의자회의에 참석하러 인도에 간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한 번, 메인의 바우뒨대학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 그이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강연을 했다. 한 청중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스코트씨가 나이 아흔여덟에 보여준 힘과 내면의 정열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그이의 강연기술이 마치 절정기에 이른 것처럼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먹을거리들을 기르고 나무를 자르며, 글을 쓰고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계속했다.

 

 

<216쪽>  
죽음은 병든 사람이 회복하는 것같이, 병을 앓고난 후에 정원으로 나가는 것같이 오늘 내 앞에 있다. 
죽음은 여러 해 동안 갇혀있는 사람이 간절히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오늘 내 앞에 있다. 
죽음은 칼과 방패로 상처입은 사람에게 의사가 약을 발라 치료하듯이 오늘 내 앞에 있다. 
           - [이집트 사자의 서The Egyptian book of the Dead] 中 

탄생과 죽음은 우리 지식의 한계를 표현하려고 지은 말이다. 한 친구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우리에게 썼다. "죽음은 단지 지평선입니다. 지평선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스코트가 새 지평선을 찾기위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느꼈고, 그가 좋아하는 우화를 떠올렸다. 

「나는 바닷가에 서 있다. 내쪽에 있는 배가 산들바람에 흰 돛을 펼치고 푸른바다로 나아간다. 그 배는 아름다움과 힘의 상징이다. 나는 서서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배가 마침내 한조각 구름이 될 때까지 바라본다. 저기다. 배가 가버렸다. 그러나 내쪽의 누군가가 말한다. '어디로 갔지?'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이다. 배는 우리쪽을 떠나갔을 때의 돛대, 선체, 크기 그대로이다. 목적지까지  온전하게 짐을 싣고 항해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가 작아진 것은 우리 때문이지, 배가 그런 것이 아니다. '저기 봐! 배가 사라졌다!'고 당신이 외치는 바로 그 순간, '저기 봐! 배가 나타났다!' 하며 다른 쪽에서는 기쁜 탄성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삶에 있었던 큰 사랑과 떠남을 생각했다. 두 번의 빛나는 순간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플로리다의 병원에서 운명하고 있을 때, 어머니와 내가 같이 병실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돌아와, 문간에 서 있는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 이라며 행복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우리 모녀에게 두고두고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스코트가 메인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동안 집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한 마디 말이 내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그 사람이 숭배해 온 톨스토이와 간디 말고,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헬렌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은 이렇게 썼다. "헬렌은 젊은 처녀처럼 행복한 탄성을 지르며 방을 가로질러 달려와 그 극적인 찬사에 대해 그를 껴안고 키스했다. 스코트는 흐뭇한 얼굴로 헬렌에게 잔잔한 웃음을 보냈다."

 


<224쪽>  
"죽음을 슬퍼하고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사람이 불멸이라는 생생한 사실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육체가 영혼을 가졌는가. 아니다. 영혼이 육체를 가진 것이다. 영혼은 육체가 제 할일을 다 했음을 잘 알고, 아주 엄격하게 그것을 한쪽으로 비껴놓은 뒤 얼룩이 묻은 옷처럼 벗어버린다."  - 루시엔 프라이스 '영혼의 기도' 1924

 


<228쪽>  

그이의 100세 생일 한달 전 어느날, 테이블에 여러사람과 앉아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한 달 동안 그가 뭔가 마실 것을 원할 때 사과, 오렌지, 바나나, 포도같이 그가 삼킬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주스를 만들어 먹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물만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병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이 말짱했고, 나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몸은 수분이 빠져나가 이제 시들어가고 있었고,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나는 침상에 같이 있으면서 조용히 그이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반쯤 소리내어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구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이 당신과 함께 가요.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잘 있어요."

천천히 천천히 그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나무의 마른잎이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좋~아" 하며 숨을 쉬고나서 갔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238쪽>  
......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진실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사는 데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일에서도 그렇게 진실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 그는 이상주의자였으나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 어떤 종교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 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은둔자로서 행복해 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의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음악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데는 무디었지만, 언제나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내 뒤에 있었다. 학문적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감각을 가졌다.

 

그는 위대하고 포용력이 있는 영혼이었다. 그런 사람과 반세기동안 함께 산 것은 참으로 좋은 삶이었다. 우리는 경험과 느낌의 풍요로움을 공유했으며, 그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단순한 삶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해갔다. 나는 하늘에 있는 우체통에 부치게 될, 그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그이가 죽은 뒤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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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트 니어링만큼 복 많은 남자도 드물 것이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남편자랑'을 들어봤지만, 그 중에 헬렌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ㅋ 세상에 자기 자서전을 남편의 평전으로 대신하는 사람, 자기 남편에 대해 이렇게나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찬사로 책 한권을 채울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스코트 니어링의 자서전에는 헬렌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 쥐꼬리만큼 나온다. 에휴~). 스코트가 너무나 좋아서, 그가 하려는 일이 너무 가치있다고 확신하여 자신의 삶을 몽땅 투자?한 사람, 홀로 외로이 남겨진 노년에 '아이는 다음 생에 만나서 낳기로 했다'고 말하는 사랑스러운 분...의 책을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이 책을 읽던 당시의 나는, 헬렌이 환생, 신지학회, 애니 베산트, 수맥찾기, 강신술, 위저보드...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는데, 좀 자만했던 것 같다.ㅋ 오늘 이 책에 리처드 바크의 [Reluctant Messiah]가 인용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책을 몇년 전에 [기계공 시모다]라는 제목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변했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