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쪽>
플라톤은 죽음은 삶의 정점이므로 '최상의 삶은 죽음에 대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죽음은 무의미한 존재에 발생하는 의미없는 결말이 아니다. 이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적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삶을 회복하는 최상의 계기다. ...... 영지주의자 시인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는 죽음 앞에서, '나는 두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기쁨에 들떠 있다'고 선언했다.
'웃고있는 예수'는 삶은 좋은 것이며, 죽음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각상태를 표현한다. 우리는 이것을 '낙관적 믿음의 생성'이라고 부른다. 낙관적 믿음은 삶이 당신 편에 있다는 합리적인 믿음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 그들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 모두 당신을 도우려고 한다는 믿음이다! 낙관적 믿음은 신앙의 좀 더 멋진 새로운 이름이다.
낙관적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고통이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고통이 오직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기 대문에 고통은 우리를 더욱 자비롭게 만든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마침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일자를 깨달아가는 과정의 부분이기 때문에, 나쁜 경험조차도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다. 휘트먼은 이 본질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좋은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완벽하다. 그리고 '나쁜 것'이라고 불리는 것도 역시 완벽하다.
<293쪽>
당신은 영화를 볼 때마다 유사한 상황에 빠진다. 모험 중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극장 안에 있는 자신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이것은 무서운 상황에서도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양자 모두를 포용하는 관점'이다. 만일 주인공과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흥미로운 모험은 '무서운 체험'으로 변할 것이다. 악당들이 당신을 잡으려고 하고,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며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육체skin-bag^^를 동일시한 삶을 살 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의 비유다. 깨어있는 삶은 괜챦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실제로 영화 속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쇼를 보고 있다. 우리는 단지 흰 스크린(또는 액정패널) 위에 투사된 여러 색깔을 보고있다는 의식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빠져든 환상을 즐길 뿐이다.
무료로 제공된 대단한 쇼가 있고 이것은 제대로 감상되지 못하고 있다. 쇼를 즐기기 위해서는 환상에 빠지는 것과 본래부터 안전하다는 것, 둘 다를 아는 게 필요하다. 자신을 영화 속에 빠지게 하면서, 동시에 영화 속에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쇼를 즐기는 비밀이다. 이러한 삶은 실제로 딜레마와 갈등을 원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느끼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즐기는 것이다. 시작부터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계속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누가 그런 영화를 보겠는가? 우리는 가벼운 코미디보다 더 많은 것을 삶에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드라마를 원한다.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삶 즉, 묘사할 수 없는 깊이와 신랄함을 갖춘 카타르시스적 만족을 주는 대작과 같은 삶을 원한다.
<296쪽>
당신의 통찰력은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살필 때만 밝아질 것이다.
누가 외부의 꿈을 보는가, 누가 내면의 자각을 보는가.
- 칼 융, 서한집1 (Carl Jung, Letters, Volume 1)
문자주의자들이 볼 때, 우리는 명령을 어겼으므로 죄인이다. 아버지가 말한대로 우리는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화가 났다. 중한 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실제로 죄의식을 느끼면서 잘못을 말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죄'와 '회개'의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 흔히 '죄'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 '결함hamartia'은 궁술로부터 온 것으로 단지 '핵심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일 뿐이다. 또 '회개'로 번역되는 '심경의 변화metanoia'는 '관점을 바꾸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신성한 법규를 어기는 것이 아닌, 단지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회개는 자신을 꾸짖는 것이 아니며 심판자인 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여러 복음서에서 예수는 '구원의 시작은 회개'라고 가르친다. 깨어나는 과정의 첫단계는 핵심을 벗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삶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단순하다.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현실의 꿈을 꾸는 것이다.
<301쪽>
현재 내가 사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다. - 바울
신비주의자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신 안에 존재한다. 그들의 행위는 신의 행위다.
신은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하고, 그들의 눈을 통해 본다. - 압드 알 카에다 Abd al-Kader
<307쪽>
이교도 영지주의자들은 인격적 변화의 과정을 '정화'를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자신을 무의식적이고,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별자로 만드는 특징적인 기질들을 정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어두운 면' 혹은 '나쁜 점'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교도 철학자 에픽투테스는 이렇게 조언한다.
선해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당신이 나쁘다는 것을 깨달으라.
철학의 시작은 자신의 약함과 단점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
악惡은 그 뿌리가 감춰져 있는 동안은 강하다. 그러나 악이 알려지게 되면 악은 사라진다.
만일 이 악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 속에 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 [빌립복음서] 123장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장황한 종교적 법칙들과 유대 문자주의의 규정들을 단 두가지의 단순한 명령으로 바꿨다. 또한 '두번째 명령은 첫번째와 같다'고까지 언급했다. 첫번재 명령은 '진심으로 신을 사랑하라', 두번째 명령은 '다른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명령은 깨달음에 관한 영지주의 방법의 두 측면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깨어있는 삶은 조건없이 모든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present'라는 말은 '지금'과 '선물'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지금이 얼마나 귀중한 선물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당신에게는 곧 지나가 버릴 매순간을 감상할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 당신이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당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매 순간을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다. 만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당신이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쨌든 이 순간을 사랑하라. 나쁘게 나타나는 것 안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라.
<313쪽>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배우는 방법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좋아한다거나 안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낯선 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하라. 왜냐하면 미몽의 삶 안에서는 본질적으로는 나와 하나인 그들이 다른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찬성한다면, 좀 더 야심찬 것을 시도해보라. 즉 예수가 마태복음의 훌륭한 문장을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처럼 조건없이 적을 사랑해 보라. 관대한 정신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자비심을 동반한 자각을 통해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마음에 들지않는 개성을 가졌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자신과 동일한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그를 있게 한 그들자신의 삶의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분리의 함정에 빠진 그들이 바로 '우리'의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만일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그러한 측면들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우리는 매우 자기비판적이라, 이에 기인하는 자기혐오로 인해 무기력해져서 자신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다른 시도를 해보라. 자신을 용서하라. 당신도 때때로 분리된 채 방황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기회를 줘라. 그리고 무조건 자신을 사랑하라.
<325쪽>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은 진리의 가장 큰 적이다. - 아인슈타인
우리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비범한 시대를 살고있다. 서구는 현재 미증유의 영지주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없었다.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은 번성하고 있다. 근래 보수적 근본주의의 성장은 수많은 새로운 영성들이 경쟁하고 있는 현재의 종교시장ㅋ에 대한 절망적인 반응일 뿐이다. ...... 21세기에 모두 함께 깨닫는 것을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영성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종교로부터 영지주의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과학과 제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과학자scientist'란 그리스어 '영지주의자Gnostic'를 라틴어로 번역한 말이며, 둘 다 '아는 자'를 의미한다.
(*이탈리아어 sciénte의 뜻은 '의식있는, 지각있는, 학문이 있는, 박식한'.)
이 세계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이해를 구체화한 위대한 물리학자들, 즉 뉴턴,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보글리에, 진, 플랑크, 파울리 그리고 에딩턴 등의 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 반대다. 그들은 자기고백적인 신비주의자이며, 영지주의자다.
오늘날 지식의 방향은 비기계적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과학의 물리적 측면에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우주는 거대한 기계라기보다는 거대한 사고思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정신은 더이상 물질의 영역에 우연히 침입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물론 개별자의 정신이 아닌,
개별자의 정신으로 성장한 '원자'들-사고로 존재하는 정신-을
물질영역의 지배자나 창조자로서 환호하며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 제임스 진 (Sir James H. Jeans 물리학자)
우주적 정신과 로고스Logos 관념은 내 생각에는 과학적 이론의 현재수준에서 상당히 타당한 추론이다.
모든 실재의 속성은 물질적이거나,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정신의 속성이 물질적일 수 있다는 가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물질을 이해하는 것처럼,
형용사인 '물질적'이라는 것과 명사 '속성'을 함께 묶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만일 모든 것은 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신비적인 견해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무의미의 물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 에딩턴 (Sir Arthur S. Eddington 천문학자)
정신의 전체적인 수는 단지 하나일 뿐이다. 나는 감히 이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특수한 시간표를 갖는데, 그것 즉 정신은 항상 지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이 물질적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
우리는 이것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존재한다. 우리는 단지 구경꾼일 뿐이다.
우리가 이 안에 있다고 믿는 이유, 즉 이 그림 안에 들어있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의 육체가 이 그림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슈뢰딩거 (Erwin Schrödinger 물리학자)
<331쪽>
유물론자들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 뿐이기 때문에,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부차적 효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의 뇌에 있는 신경이 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의 생각 중 단 하나에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사고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이 아니며, 또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이라는 피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남겨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이와는 달리, 영지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매우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만일 실재의 근거로서 '의식'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은 의식 안에서의 경험으로 존재한다. 우리 경험의 어느 정도는 사적인 생각이나 감정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경험들이다.
과학의 통찰은 영지주의 통찰과 조화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은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주장하고, 과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이 의식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일자와 영원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빛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리학은 빛이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는 모순에 빠져있다. 이것은 객관적 관점에서 볼 때, 각각의 개별자는 분리된 하나의 '입자'지만,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개별자는 의식의 바다에 나타나는 파도와 같다는 영지주의적 관찰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나 개인으로서는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다.
- 하이젠베르크 (Werner Karl Heisenberg 물리학자)
인간의 정신은 우주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막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선 어린아이와 같다.
......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주적 종교의 감정을 일깨워주는 것이며, 이 활동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 나는 우주적 종교의 감정이 과학적 탐구를 하는 데 가장 강력하고 가장 고귀한 자극이라고 주장한다.
한 과학자는, 현재의 이 유물론적인 시대에 진지한 과학자들은 바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 아인슈타인
<362쪽>
우리에게 좋은소식은,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것이며, 나쁜소식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분리의 악몽 속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분리되었다는 잘못된 신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이다. ......
과학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초신성 안에서 수십억 년 전에 폭발해서 불탄 별들의 심장부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우주의 먼지다. 우리는 우주로부터 발생했으며 그런 면에서 진실로 '세계인'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며, 우주는 우리의 어머니다. 우리 모두가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결국 서로를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370쪽>
인간 존재의 지고至高한 의무는,
모든 불만족스러운 경험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다. - 달라이 라마
인간 존재는 '우주'라고 불리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다.
그는 다른 나머지와 분리된 어떤 존재로 - 의식의 착시현상처럼 - 그 자신과 그의 사고와 감정을 경험한다.
이 착각은 감옥처럼 개인적 욕망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친근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애정을 주도록 제한한다.
우리의 임무는 모든 생명체와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용할 수 있도록 자비심을 확대함으로써,
이 감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
이 세상의 문제는,
어리석은 자는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반면, 현명한 자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 버트란드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