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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3. 00:28 책에서 발췌

정신세계사 / LIFECYCLES:Reincarnation and the Web of Life - Christopher Martin Bache,1990. 



<서문 - 케니스 링Kenneth Ring>
크리스 베이치와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결국 같은 목적지를 향해 이끌려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 나는 크리스와 비슷하게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이란 덤불을 헤치고 초개아超個我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란 불모지를 통과한 끝에야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이란 매력적인 연구주제에 도달함으로써 엄청난 세계관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내게는 수백명의 임사체험자들이 곧 스승이었다. 지난 12년간 그들은 나의 인터뷰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체험한 사후의 과정과 그로부터 얻어낸 삶의 교훈은 이 책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임사체험자들은 윤회론자들이 늘 주장해온 바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즉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고, 우리의 진짜 고향은 이곳이 아니라 영적 세계이며, 우리가 말하는 소위 '죽음'은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종의 '공중제비'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여기에 윤회론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말을 덧붙일 것이다.
 
크리스는 윤회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 이 우주에 의미없는 것은 없다. 둘째, 전생체험은 그 당사자로 하여금 '나는 영원한 존재이며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는 진실을 단순한 믿음을 넘어선 앎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셋째, 우리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 무엇도 우리를 삶의 본질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으며, 삶의 시련들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23쪽>
어떤 사람들은 놀랄만큼 많은 수의 명사名士들이 깊은 숙고 끝에 윤회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이런 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다. 다음과 같이 다채로운 인물들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플라톤, 쇼펜하우어, 존 맥타가트, 벤저민 프랭클린, 레오 톨스토이, 윌리엄 제임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랠프 월도 에머슨, 헨리 소로, 월트 휘트먼, 솔 벨로,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장 시벨리우스, 폴 고갱,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조지 스미스 패튼, 찰스 린드버그, 헨리 포드, 카를 융 등등.....

  
<30쪽>
나는 종교학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전공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윤회가 진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반복되는 경험'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완전히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   윤회란 본질적으로 삶의 '길이'에 대한 문제이므로 자연히 인간의 본성과 존재 목적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우리가 곱씹어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들 말이다. - 내게는 시간이 대체 얼마나 있는 것일까? 살아 움직이고,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만큼인가?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들을 바로잡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만큼인가? 우리는 길어야 백 년 정도 살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예컨대 그런 백 년 단위의 삶을 거듭하면서 만 년 정도까지 살 수 있는 존재인가? - 이 질문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따라 우리의 자아상과 삶의 지향점이 확 바뀌기 때문이다.
 

 

<110쪽>

카르마는 일반적으로 인간 의식을 성장시키는 많은 인과법칙을 가리킨다. 카르마라는 단어는 본래 '행위'를 뜻한다. 

- 카르마Karma(행위, )는 비카파Vikapa(결과, )를 만든다. 그러나 카르마라는 말은 통상 원인과 결과 둘 다를 지칭하는 말로 잘못 쓰이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카르마를 타고났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좋은 비카파를 타고났다'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미 이런 표현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나 또한 굳이 구분을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


 기원전 6세기 힌두문헌인 '우파니샤드'에서 언급된 이래로, 카르마는 '환생을 낳는 행위'를 뜻하게 되었다. 카르마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수많은 생을 거치며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모든 배움은 그렇게 이뤄진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조건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고, 그것은 또다시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상황은 계속 달라져 가기 때문에, 이는 결코 사전에 확정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다.


카르마와 비카파. 원인과 결과.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진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인과사슬의 미궁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왔듯이 그 바깥으로 나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처럼 사슬을 약화시키거나 중화하는 카르마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더욱 강화하는 카르마를 악업惡業이라 한다. 비교秘敎 전통들은 인간을 몸 속에 갇힌 채 되풀이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영혼으로 보고,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조건들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종교란 곧 지상의 영혼들로 하여금 본래의 집으로, 본래의 영적 존재로 돌아가게끔 안내하는 신호등이라고 가르친다. 지상에 산다고 하여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제한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곳에 무한정 붙잡혀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카르마에 관한 비교
秘敎적 가르침은 대체로 '귀환return'에 관한 것이다.
 
아주 흔하게, 카르마는 도덕률적인 주고받음의 법칙으로 설명된다. '주는대로 받게 되리라',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각각의 종교전통에는 이런 유의 영적 평등주의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아가페agape, 유대교에서는 헤세드hesed라고 한다. 모두 지고한 사랑을 뜻한다. 이것은 타인을 깊이 공감하고 연민하며, 그의 상황과 경험을 충분히 살핌과 동시에 나 자신의 뜻도 달성해가는 식의 행위를 뜻한다. 도교에서는... '무위non-self-motivated action'라고 부른다.


 

<141쪽>
휘튼의 내담자들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죽음)을 떠올려 묘사하면서 임사체험자들의 증언과 거의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주변을 떠돌다가 터널같은 곳을 지나고, 흰 빛을 만나고, 이번 생을 되짚어보고 등등. 임사체험자들은 그쯤에서 현생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 온다. 하지만 휘튼의 내담자들은 바르도Bardo - 삶과 삶 사이의 차원 - 에서 무슨 일들이 더 이어지는지를 말해 주었다. 휘튼은 지상을 떠난 이런 상태의 의식을 초의식(meta-consciousness)이라고 불렀다.


......  초의식은 이 지상의 상태보다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그 곳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이 지상이 아니라 그 곳에 속한 존재이다. 휘튼의 상담실에서 최면으로부터 깨어난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가짜 세상 속으로 깨워냈어요... 나는 이제 어느 세상이 진짜인지를 압니다." 다른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곳은 너무나 밝고 아름답고 고요해요. 마치 아무 통증도 없이 태양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에요. 당신도 그 완전한 일체로 돌아갈 거에요. 나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요." 휘튼의 내담자들은 한결같이 바르도의 완전함, 강렬함, 충족감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매우 상징적이고 원형적인 이미지들을 묘사했고, 말로는 그 느낌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생을 반복할 때마다 이런 황홀경을 맛보고, 그럼에도 매번 그것에 매료당하는 듯 하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죽고나면 망각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 큰 우주극 속에 속한 존재임을 재인식한다. 일곱 번의 전생과 그 중간과정들을 기억해 낸 한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생의 죽음 이후에 나는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느꼈다. 내 몸이 커지고 부풀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곧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극도의 희열이 흘러넘쳤다. 또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뭔지, 또 내 자리는 어디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자각했다. 모든 것이 명쾌했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경이롭게도 사랑이 바로 만물의 본질이었다. 평소의 의식으로 돌아와 깨어날 때 나는 그 절대적인 사랑과 지혜와 평온을 내려놓아야 했다. 조악하고 불쾌한 이 현실을 다시 마주하면서 나는 차라리 죽음을 바라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면 그 경이로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지금껏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죽음이 손톱만큼도 두렵지 않다."

 


<288쪽>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카를 융은 내담자들이 소위 원형적原型的archetypal 의식 차원에 접근할 때 실제 삶 속에서 동시성synchronicity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동시성 현상을, "물리적 인과관계는 없지만 '의미상으로는' 서로 엮여 있는 사건들"로 정의했다(나였다면 "비물질적 인과관계에 의해 조율된 사건들"로 정의했을 것이다). 융의 내담자들이 의식의 심층에 도달하여 자신을 치유하는 순간, 마치 마법처럼 그들의 외부 세상도 변화했다. 의미심장한 '우연' 들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우주가 공모하여 그들의 내적 탐구를 힘껏 돕는 듯했다. 융은 심층적 자각이 물리적 사건들까지 통제할 수 있는 -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 강력한 에너지를 해방하거나 촉발한다고 추정했다.

동시성 현상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빈도가 잦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서 가까운 친척이 찾아와 작별인사를 하는, 그래서 밤중에 놀라서 깨는 경험을 한다. 꿈속의 친척들은 대개 자신은 괜찮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에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날에 우리는 그가 지난밤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내 학생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최근에 나는 골프를 치던 중에 문득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짚이는 바는 없었지만 끔찍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후, 나는 남편에게서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여성의 급작스런 기분 변화와 친구의 죽음 사이에는 어떤 물리적 인과관계도 -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한 - 없었지만 분명'의미로 엮인' 상호작용이 있었던 듯 보인다.

간혹 중요한 일에 아무리 전념해도 전혀 성과가 안 날 때가 있다. 모든 상황이 우리의 성공을 훼방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잠깐 뒤로 물러나 생각을 가다듬고 태도를 바꿨을 뿐인데 그동안 닫혔던 문이 덜컥 열리거나 중요한 전화가 걸려온다. 우리의 내면과 외부 세상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을 단지 주관적 '과대망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동시성 현상은 마치 우주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초점 또는 방향을 특정한 곳으로 맞춰준다. 대개 동시성 현상은 당사자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고, 지금의 선택이 불러올 막다른 골목 또는 돌발적 시련을 경고해준다. 또는 우리가 뭔가 힘든 결정을 내린 후에 그것을 '평가해주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91쪽>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할 무렵, 놀랍게도 마치 이 여성의 경험을 해설해주는 듯한 조셉 캠벨의 글을 읽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한 모험이 준비되어 있다'는 내면의 부름을 듣고도 안전과 안정을 좇느라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곧 활기를 잃기 시작한다. 그는 나이가 더 들어서 똑같은 상황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지만 그 사다리가 다른 벽에 걸쳐져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라는 직감을 따른다면, 삶은 그 길을 탄탄대로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영적 마법spiritual magic은 믿는다. 나는 자기 자신의 지복bliss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문이 열린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렇다! 내 삶에서도,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이것은 진실이다.

'운명이 보여주는 분명한 의도'라는 쇼펜하우어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거기서 그는, 당신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본다면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구성되어 있으리라고 말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처럼 몇몇 우연한 만남이 생의 중심 플롯을 형성하고 있으리라고. 또한 당시엔 실수처럼 보였던 일들이 지금은 피할 수 없었던 시련으로 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묻는다. '대체 누가 이 소설을 쓰는 것일까?'

 

 

<300쪽>

프로이트는 양심conscience이란 부모에게 훈육받은 내용이 응집된 초자아superego에 불과하다고 설명함으로써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부모의 영향력은 표피에 해당할 뿐이다. 이처럼 얕은 개념으로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양심은 대령大靈oversoul과 연결된 구명 밧줄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들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세상을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의 카르마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스스로 준비해둔 과제들로 우리를 안내해가는 고요한 목소리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험난한 꿈에서 깨어 결실을 맺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

 

 

<305쪽>

[법구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다." 

 

 

 


<2016/07/06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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