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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uman doing but human being - P't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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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19. 19:59 책에서 발췌

 

 

 

<48쪽 / 초의식metaconsciousness 또는 바르도bardo에 대하여>

휘튼은 30여명의 피험자들을 몇 년에 걸쳐 이 시간도 공간도 없는 '갇힌 빛'의 영역으로 인도했다. 그 체험은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것이어서, 처음 그 곳을 찾은 사람은 할 말을 잃는다. 그들은 나중에 그 때의 넘쳐나던 이미지와 인상을 해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게 기분좋은 건 처음이었어요.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황홀감, 무섭도록 눈부신 빛 속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몸이 아닌, 그림자몸인 영체로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땅도 하늘도 없고 경계 따위는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훤히 다 보였죠.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생각을 전달하고 싶으면 말을 하거나 듣지 않아도 뜻이 통했습니다."

휘튼이 '초의식'이라 이름붙인 이 황홀한 상태는, 어떠한 알려진 존재상태도 뛰어넘는 실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꿈을 꾸고있는 상태, 체외이탈 체험, 전생의 재체험 등의 어떤 상태와도 다르다. 초의식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과 동화하여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분명히 알게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신체의 속박에서 풀려나 우주와 하나임을 느끼고 끝없이 퍼져있는 구름 속의 한조각 구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은 계속되는 환생 시도의 출발점이며, 육신이 죽으면 돌아가는 의식의 세계인 것이다. 

 

피험자들이 굳이 바르도에 들어갔던 것은 단지 조사를 위해서였을 뿐이며,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거의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여행정보를 얻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그들의 체험(조언자들을 만나고 다음 삶을 위한 대본 쓰기)이 치료상의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다. 전생으로부터 온 두렵고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기적적인 치료효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은 육체에 깃들이지 않은 그 상태에서, 자신들이 환생후 만나게 될 부모, 직업, 인간관계, 희노애락과 관계되는 주요사건들을 미리 선택한 이가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초의식 상태에 들면 피험자의 표정은 싹 달라진다. 죽음을 재체험함에 따라 눈썹을 찌푸리는 등의 두려움, 불안, 고통이 표정에 드러나지만, 그것은 곧 사라지고 무표정이 되었다가, 평화롭고 편안한 표정을 거쳐, 마지막에는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 앞의 광경에 완전히 빠져있기 때문에 휘튼은 질문하지 않고 그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기다린다. 한 피험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생을 체험할 때 나는 분명히 감정반응을 나타내는 하나의 인격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르도에서는 눈에 보이는 몸이라는 건 없어요. 나는 이미지에 둘러싸인 관찰자인 것입니다."

 

바르도는 자신이 육체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진정으로 시작된다. 바르도를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압도될 듯 눈부신 빛, 방금 끝난 삶을 파노라마처럼 재검토하는 등의 '근사체험NDE' 현상을 보고하고 있다. 근사체험자들은 깨어난 후 삶과 죽음 사이의 장벽에 다가갔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휘튼의 피험자들은 그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행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황홀감,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비의 빛에 영접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들은 틀림없이 당황하게 된다. 바르도에서는 3차원적 감각이 완전히 없어져버린다. 시간의 흐름도 없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논리도 질서도 시간도 없는 혼돈이 되어버린다. 휘튼은 모든 것이 콜라쥬 화면처럼 뒤섞인 혼돈 속에서 통찰과 이해를 이끌어내 방법을 찾아냈다. 피험자에게 하나하나의 사건을 끄집어내어 이야기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예컨대 유리구슬이 가득 든 자루에 계속해서 손을 집어넣어 구슬을 한 개씩 꺼내 차례대로 늘어놓는 것과 같다.

 

 

<53쪽>
누구나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이러한 각자의 태도와 삶의 내용, 그리고 영혼의 발달상태가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체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상한 영혼의 충동에 따라 성격을 형성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육체에서 영혼으로 아주 간단히 옮겨갈 수 있다. 그들은 육체가 사라짐을 기뻐하며, 지금까지 갇혔던 데서 풀려난다는 기대감으로 밝은 기분이 된다. 발달을 이룬 사람이라도 지금까지의 삶이 불완전했다고 느끼면,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하며 바르도 상태의 숭고함에 다시 다가갈 기회를 바라기도 한다.

 

인격이 덜 발달한 사람이 취하는 입장은 대체로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죽어서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워 육체에 남으려고 발버둥치거나, 혹은 특히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우 그 육체를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옷'으로 바꾸려고 서둘러 다시 환생한다. 불의의 재난으로 죽음을 당한 충격은 당혹과 분노, 자기연민 또는 복수심을 일으켜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두는 원인이 된다. 한 대학교수는, 몇 백년 전 미국 남서부의 인디언이었을 때 살해당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가 초의식으로 들어갈 때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전했다.

"다른 세 명의 인디언에게 고문과 죽임을 당해 손발을 잘린 나는 미칠 듯이 분노하며 몸 밖으로 떠올랐습니다. 좀더 단련을 쌓았더라면, 좀더 힘을 냈더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육체를 떠날 때 몹시 분노한 나머지 주먹을 치켜들었습니다.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켜 살아날 기회가 한 번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지요."

자주 인용되는 이행의 원형인 '터널' 체험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휘튼의 피험자들은 아래쪽에 누운 자신의 몸을 '본' 후, 긴 원통형의 통로로 빠르게 끌려들어갔다고 되풀이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육체를 떠났고, 남겨진 친척과 친구를 달래고 안심시킬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불가사의하고 멋진 체험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곧 사라져 버린다. 관 또는 터널은 내세로 통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행 도중 안내자를 만나 바르도로 이끌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여 마지막에 낯선 사람들과 합류한다.

 

 

<56쪽>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는 BC1300년에 쓰여진 사후 입문서다. 죽은 사람이 안전하게 저세상으로 가기 위한 주문이나 기도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피라미드에 새거거나 두루마리의 형태로 시신과 함께 묻었다. 1842년에 독일의 레프시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쓰여진 파피루스책을 번역, 출판한 제목 [사자의 서]로 불리게 되었다. 이집트 원전의 본래 제목은 [햇빛 속으로 나아가]로,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체험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바르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눈부신 빛이다. 영혼이 '하나'인 존재로 다시 흡수되어 갈 때, 강렬한 황홀감이 밀려와 부정적인 것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찬란한 출발은 우리가 계속되는 환생을 끝낼 때마다 거듭 우리를 맞이하지만, 언제나 완전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가려졌던 시야가 갑자기 걷힘으로써 우리는 환희와 함께 우주가 어떻게 전개되고 자신이 이 우주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깨닫게 된다. 인간이 계속해서 환생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생명의 영원성이란 무엇인가, 윤회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수수께끼도 술술 풀린다.

 

바르도를 7번째 찾았던 어느 사업가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단계를 넘어서면 황홀해지면서 육신이 완전히 변했음을 느낍니다. 내 몸은 방에 꽉 차도록 커지고,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무한한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이것을 느끼면서 자신이 누구이고, 왜 존재하는지, 우주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은 의미가 있고, 무엇이든 완전히 옳아요. 놀랍게도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평소 의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껴안는 그 사랑과 그 지식, 그 안도감을 뒤로 하지 않으면 안되요. 우울하고 삶이 싫어졌을 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건 그 멋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임을 알고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는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젠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또다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단히 밝고 아름답고 화창했어요.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태양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죠.

모든 것이 하나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되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이런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아마도 피험자의 경험, 의식, 기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기쁨과 평화의 느낌을 발산하는 빛의 동굴로 들어간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은 무지개보다도 회황찬란한 색채를 본다. 자기가 인생 내내 추구해 온 대상과 직접 관련된 계시의 형태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수학자로서 2번의 삶을 살았던 남성은 지금까지 풀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일련의 방정식 형태로 얻었다. 그것은 세계의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탐구했던 여러 형태의 우주에너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해답도 포함하고 있었다. 몇 차례 음악가로 살았던 여성은 넋이 나갈만큼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음악이었어요."

 

 

<59쪽>

바르도에서 자신을 얼마나 자각하는가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른 것 같다. 간절히 영적 발전을 원하는 사람은 죽어서 다시 환생하기까지의 사이에 의식이 대단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장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세속적인 관심에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긴 대신에 그 상태로 '잠 자는'경향이 있다. [바르도 토돌]은 바르도에 있는 이가 스스로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대로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낸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그려진 모든 것이 사후의 영혼 앞에 대파노라마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휘튼의 피험자들은 초의식 상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멋진 궁전과 아름다운 정원이 보여요."

"나는 여러 크기의 갖가지 추상물에 둘러싸여 있어요. 네모, 원통 모양도 있네요."

"앞이 훤히 트였어요. 그리고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끝없는 무속을 걷고 있어요. 바닥도 천장도 없고, 하늘도 땅도 없어요."

"모든 것이 지극히 아름다워요. 물질적인 건 하나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어요. 교회, 학교, 도서관, 운동장......"

"내가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어디서랄 것도 없이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어떤 남성은 이번 삶 이전으로 이끌려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커다란 동굴 속이었다. 동굴 끝에는 벽이 가로놓여 있고, 그 꼭대기에 떠올라 살펴보니 식물이 파릇파릇 무성한 이 세상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 세계 모두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 서니 지상의 초목과 대기가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 반대쪽은 더욱 밝고 공기도 희박한 것 같았어요. 나는 안내자와 나란히 지중해의 경치 같은 이 또다른 세계를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나는 조용히 가라앉은 기분이었고 평화로웠지요. 야트막한 언덕 기슭에는 흰 회벽 건물들이 있었는데 독특한 빛에 둘러싸여 있고, 각 건물에는 낮고 바닥이 넓은 아치가 있었어요. 그 아래로 연한 황금색 빛이 방안에서 비쳐나왔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동안 마음속에 그리고 바랐던 환경을 지어내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지식한 가르침만을 지켜온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처럼 실망을 맛본다. 지난 삶에서 편협한 신앙생활을 했던 피험자들이 바르도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의 성장이라는 복잡하고 긴 과정은 '구원'이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초의식 상태에 든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의 힘의 근원이자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대령大靈oversoul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의 핵, 그것과 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떠한가는 상상하기 어렵다. [브리하드 아라냐카 우파니샤드]는 이것을 만물에 내재하는 영혼으로서 이렇게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진실로 보고있는 게 누구인지 그대는 볼 수 없다.

진실로 듣고있는 게 누구인지 그대는 들을 수 없다.

진실로 생각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그대는 생각할 수 없다.

진실로 분별하고 있는 게 누군지 그대는 분별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만물에 내재하는 그대의 영혼.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소멸해가는 것."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