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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20. 15:15 책에서 발췌

 

 

 

<153쪽>  사례 : 헤더 화이트홀름

 

"나는 삶 자체에 대한 알러지인 것 같아요." 마흔네 살의 헤더는 수줍게 인정했다.

헤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활기찬 성격에 혈색도 좋았던 그녀의 몸은 '지금까지의 치료방법으로는 그녀의 육체가 점차 허물어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진료기록처럼 이제 각종 알러지 반응의 싸움터가 되어있었다. 먼지와 꽃가루고양이 털담배연기, 유제품, 향수페인트세제...에 노출되는 것도 위험했다. 게다가 폐렴과 기관지염이 자꾸만 재발하여 가을부터 겨울, 봄까지는 병석에서 지내야 했다. 헤더가 생물학자인 남편 필립과 함께 멕시코에서 토론토로 이주해 온 이후에는 캐나다의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더 심해졌다.

 

어떤 의사는 그녀의 몸이 '전쟁 상태'에 있다고 선언했지만 자신이 평화의 사도 역할을 해내지는 못했고, 또 다른 의사는 헤더의 몸이 '극도의 피로'에서 회복될 가능성을 찾으려면 6개월의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엑스선 촬영과 혈액·소변 검사가 끝없이 이어졌고 의사마다 항생제, 항히스타민제, 코르티손 등 갖가지 약들을 처방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이런 약들은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고, 때로는 또다른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다.

 

헤더에게는 그 밖에도 심각한 마음의 병이 있었다. 그녀는 남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쉽게 휩쓸렸다. 이러한 자신감 부족 때문에 그녀는 보석 디자이너라는 장래성 있는 직업마저 놓아버리고 말았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실패가 두려워 작업장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대학시절부터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으로 더 심해졌다. 게다가 우울증 약조차 알러지를 일으켰기에 약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휘튼 박사는 그녀의 병의 뿌리를 파악하고 고치기 위해 우선 몇가지 병리학적 테스트를 받게 했다. 그 결과, 기관지염과 폐렴에 대한 헤더의 저항력이 비정상적으로 낮아서 심한 고질병인 알러지가 더 악화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헤더가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문제들을 억압함으로써 그것이 육체적 문제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헤더는 최면감수성이 높은 피험자였다. 첫번째 진료가 있었던 날 저녁,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휘튼 박사의 기술을 흉내내어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상당히 두려웠지만 곧 자기최면은 하루의 익숙한 습관이 되었다. 상담시간을 줄이고 회복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헤더가 집에서 트랜스에 들어 무의식의 기억을 찾아내고, 그것을 일기로 써서 일주일에 한 번 휘튼에게 주기로 했다.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려는 헤더의 노력은 처음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역사 시대를 넘어 혈거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엄청난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료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짐을 갖고 있었다니, 마치 대형 트럭 같군요" 휘튼은 헤더의 일기 사본뭉치를 보며 말했다.

 

6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안락의자에서 트랜스에 든 헤더는 이소벨을 보았다. 

이소벨 드러먼드에게서는 어딘가 아주 슬프고 아련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키가 크고 날씬했다. 길고 검은 머리를 목덜미에서 묶고, 소매에 두 겹의 주름이 달린 분홍색 쉬폰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잘 꾸며진 영국 집의 거실을 우아하게 지나서 검은색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더니 쇼팽의 피아노 연습곡을 멋지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헤더는 이소벨의 독주를, 마치 같은 방에서 듣는 듯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최면에서 깨어나 엉엉 울었다. 트랜스 상태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이소벨만큼 확실한 일체감이 느껴진 경우는 없었다. 멀지않은 과거에 살았던 이소벨이 자신과 같은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의 모습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불행감을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헤더의 머릿속은 온통 이소벨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침대 전등을 끄려고 스위치에 손을 막 대려는 순간, 갑자기 강렬한 충격에 몸서리를 쳤다. 

 

"그때의 느낌은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집안에서 아주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곧 자신이 이소벨의 몸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땅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몸 오른쪽엔 불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타고가던 자동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질주했음을 두려움 속에서 깨달았다. 그건 1931년의 일이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충격은 1, 2초밖에 계속되지 않았지만, 헤더의 신경을 완전히 쇠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남편이 위로와 격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내내 그 무서운 장면이 의식에서 지워지지 않아 몇 번이나 울었다. 새벽 5시쯤 남편 필립이 깜빡 졸고 있을 때, 정신없이 서재로 들어간 그녀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충격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간 헤더는 불면증과 구토, 오열, 신경과민, 심한 목감기 등이 겹쳐 죽을 고생을 했다. 1979년 9월 1일 새벽 4시에 쓰여진 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약속된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태어나기 4년 전에 일어난 교통사고의 충격과 외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또 독감에 걸려 속이 좋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내가 아프다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서재에서 침실로 돌아온 헤더는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훌륭한 돌파구가 마련되리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우선 잠이 쏟아졌고, 피로가 덮쳐와서 저녁 6시까지 내내 잤다. 그리고 부시시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약의 도움 없이 편안히 숨 쉬고 있음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게다가 만성적인 두통과 귀울림도 없어졌다. 계속되던 가슴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피부까지도 깨끗해졌다. 그녀는 처음에 이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다. 휘튼 박사 역시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헤더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약을 쓰지 않고도 알러지가 이틀 연속 잠잠하자, 헤더는 집을 나서 바깥 세계의 바람에 맞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일기는 그날의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1979년 9월 4일

노래 레슨을 마친 후 K씨를 만났다. 고양이 털이 쌓인 곳에서 끊임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맡아도 재채기나 기침이 나오지 않았고, 알러지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건 내게 흔치 않은 일이었고 무척 기뻤다.

 

1979년 9월 20일

오늘 H박사를 만났다. 내 알러지가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는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우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그는 내가 알러지 약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해 주었다. 간호사는 내 피부가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헤더는 알러지가 말끔히 사라진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3주 동안 발작적인 오열과 악몽,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지냈다. 심지어 휘튼과의 상담조차 피할 정도였다. 휘튼은 무엇이 헤더의 무의식을 활성화시켰는지 몰라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으며, 환자의 극적인 회복이 일시적인 요행의 결과가 아니기를 바랐다. 헤더가 안정감을 되찾고 정기진료를 재개할 수 있게 되자, 휘튼은 즉시 그녀를 트랜스 상태에 들게 했다. 이 자동차 사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소벨은 로버트라는 남자와 함께 지중해의 수평선으로 내리쬐는 저녁 햇살을 받으며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숙취로 인한 두통을 느끼며 심한 말다툼을 했다. 로버트의 아이를 가진 이소벨은 결혼을 원했지만, 로버트는 원치 않았다. 화가 난 로버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에 있는 마리팀알프스 산허리를 도는 꾸불꾸불한 해안도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구 달리고 있었다. 그 좁은 길 한 굽이가 북동쪽으로 급커브를 이루었는데, 그의 차가 너무 빨리 달리고 있었다. 차는 길 옆의 낮은 울타리를 들이받고 공중으로 날아 작은 나무와 덤불들로 뒤덮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힌 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로버트는 핸들에 끼인 채 즉사했고, 이소벨은 바깥의 모래밭으로 튕겨져 나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차는 몇 차례 더 폭발했다. 이소벨의 몸 오른쪽이 연기와 불꽃에 휩싸였다. 옷과 머리칼에 불이 붙고, 불꽃이 그녀의 뺨 오른쪽을 핥고 있었다.

 

사고의 충격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는데, 이제 그 드라마를 현장에서처럼 생생하게 겪은 헤더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이소벨은 불타는 자동차에서 나오는 검고 뜨거운 연기에 폐가 그을려 쉴새없이 기침을 해댔던 것이다. 헤더는 언제라도 자기가 원할 때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고 후의 구조작업까지 지켜봤다.

그녀는 모여든 구경꾼과 '네모지고 이상하게 생긴 차량' 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사이렌 대신 종鐘이 달린' 프랑스 소방대의 구급차였다. 길 아래쪽에서는 들것을 멘 4명의 구조원들이 이소벨이 누워있는 곳을 향해 가파른 벼랑을 서둘러 올라오고 있었다.

 

헤더는 다음에 어떤 일이 이어질지 보기를 주저했지만 문제해결의 핵심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소벨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흰옷을 입은 간호사들이 거즈붕대를 물에 적셔 벌겋게 물집이 생긴 그녀의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 오른쪽 전체가 심하게 불에 데었다. 오른쪽 눈과 눈썹은 짓무르고 부풀어올라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간호사들은 젖은 거즈를 상처 부위에 몇 분 동안 놓아 두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떼어내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마취제가 충분했으면'하고 말했다. 그들은 사고로 아이를 유산한 이 환자가 이틀을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더는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면서 트랜스에서 깨어났다. 휘튼 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부서진 차에서 나온 연기를 마시는 체험을 다시 겪음으로써 알러지 문제의 핵심에 다가섰다고 믿는다는 말을 했다. 헤더는 당연히 알러지로부터 해방되어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은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헤더는 환기된 기억에 시달리면서도 이소벨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그 후 자기최면을 통해서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기까지의 이소벨의 삶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섬세한 피아노 솜씨와 부유한 환경, 그리고 타고난 매력, 인기와 매혹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소벨은 심각한 정신장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젊은 여성으로서 바랄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이기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데다가 진정한 사랑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도 없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 어렸을 적 사랑이 부족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재산과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가정부의 손에서 자랐다.

 

이소벨은 열아홉 살 때 뉴욕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1924년의 일이었다. 매니저는 니콜라우스라는 이름의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는데, 미국에서 몇 차례 연주회에 출연할 수 있도록 교섭을 해주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이후 이소벨이 일에 전념할 시간은 점차 줄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술과 파티와 사교에 더욱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오자 니콜라우스와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니콜라우스는 그녀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무절제한 생활태도는 이제 습관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런던과 남부 프랑스 등지를 떠돌며 끊임없이 연애사건을 일으켰다. 그녀의 성적 방종은 지중해상의 요트파티에서 로버트와 만나면서 마감되었다. 그들은 런던에 함께 돌아왔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소벨은 사랑의 도피행을 원했다. 이 일로 니콜라우스와의 관계는 끝장 났고, 둘이 심하게 다툰 끝에 이소벨은 런던의 집을 뛰쳐 나갔다. 이소벨은 로버트와 함께 달아난 지 며칠 후, 니콜라우스가 죽었으며 사인은 둘의 다툼 끝에 생긴 심장발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더는 자신이 카르마의 빚은 물론, 성질까지를 포함한 많은 것을 이소벨로부터 물려받고 있음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자란 헤더 역시 피아노를 쳤고, 거기서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멕시코 최고의 음악학교에 다녔다.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의 이러한 연결에 관심이 쏠리는 한편으로, 잊고 싶은 것도 많았다. 붕대에 싸인 이소벨의 불에 탄 몸을 떠올리는 것은 특히 그랬다. 헤더는, 재능있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가 한때 자신을 구원하고 받들던 화려한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흉칙한 불구가 되어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녀의 악몽과 흐느낌은 더 심해졌다. 다음은 헤더의 자가최면 일기에서 요약한 것이다.

 

1933년 겨울, 이소벨은 간호사 하나, 하인 둘과 함께 영국 서섹스주 라이라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그나마 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말도 못하고 그저 심한 신음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나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참혹함이라니! 얼굴은 흉터 투성이에 일그러져 있고, 오른쪽 눈과 입은 찌그러져 있었다. 머리와 목은 연한 복숭아빛 비단 스카프를 둘러 가렸다. 오른손은 물집과 주름으로 덮여 있었고 손을 쓸 수도 없어 보였다. 별장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지만, 피아노 소리는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반사실주의적인 꽃 수채화를 그렸다.

 

이소벨은 몇 번이나 그 비참한 삶을 마감하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런던에서 엘러너라는 '친구'가 최신 유행 패션으로 잔뜩 멋을 부리고 찾아옴으로써 더욱 불타올랐다. 엘러너는 소파에 앉아서 홍차를 홀짝이며 수다를 떨다가 결국 이소벨의 상처를 건드렸다.

"얘, 사람들은 모두 네 얼굴과 손이 문드러졌다고 말하더라. 물론, 남들이 너에 대해 못된 얘기를 할 때면 내가 나서서 아니라고 변호해 주지. 내가 네 처지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애. 너는 어떻게 견뎌내는지 모르겠구나. 어떻게 거울을 쳐다볼 수 있니?"

 

그런 얘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집을 나서 황량한 겨울의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녀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집과 해안선 사이의 들판을 건너 바닷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는 미끄러운 나무 계단을 내려가 자갈이 깔린 해변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차갑고 거친 바다로 들어갔고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헤더의 암울한 기분은, 이 무서운 밤의 마지막 걸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이 체험 이후, 우울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헤더는 자신이 이소벨의 죽음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한 글을 오래 전에 썼음을 기억해냈다. 학생 시절,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표현했다. 그것이 얼마나 기괴하게 보일 것인지는 생각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은 "너는 아주 불행해 보이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녀는 이를 비판으로 받아들여 창의적으로 쓰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분명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소벨의 자살에 관한 기억을 억눌렀다.

 

휘튼도 헤더에게 남아있는 정신적 문제들이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헤더는 그의 안내를 통해 몇 주 동안에 걸쳐 19개의 전생을 수집했다. 그 가운데는 기원전 13,000년 무렵 프랑스 도르도뉴의 동굴벽화 화가, 기원전 3,100년 무렵 왕국 이전 시대의 이집트 기술자, BC 100년 무렵 중국 장안에 살던 가난한 공인, AD 25년 무렵 신성로마제국 루시타니아 지방에서 아이를 낳다 죽은 로마 여성, 12세기 프랑스 브르타뉴 출신의 드루이드교 여사제, 15세기 말 에스파냐에서 잔인한 죽음을 당한 귀족여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전생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삶의 전조로서 예술과 기술 분야에서 일했다. 그러나 왜 그녀가 이번 삶에서 예술적 창조라는 생각 자체 때문에 무기력해지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신경과민과 무력감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소벨 이외에 헤더의 문제와 직접 관계된 것처럼 보이는 삶은 페르디난드 2세 치세의 아주 추악한 삶이었다. 자기최면이 밝혀낸 에반젤린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귀족여성은, 카스틸랴에 여행을 갔다가 한 에스파냐 귀족과 만나 사랑을 하고 마침내는 결혼을 했다. 그는 이미 다른 여자(현재 헤더의 어머니)와 약혼한 사이였다. 두 여자 사이에는 자연히 적대 관계가 싹텄고, 그것은 약혼녀가 에반젤린을 종교재판에 끌어넣는 음모를 꾸며 성공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헤더는 에스파냐 세고비아의 알카자르궁전 지하감옥에서 에반젤린이 최후를 맞는 광경을 일기에 적으면서 배가 아파왔다.

 

어지러운 장면들이 잠깐씩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는 지하 감옥 벽에 달린 횃불 아래 혼자 남겨져 있었다. 달아오른 화로는 그보다 더 밝았다. 거기에는 인두와 집게가 꽂혀 있었고, 살 타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저쪽 구석에서 검은 머리의 여인이 두건을 쓴 억센 남자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의 수갑 찬 손목은 쇠사슬로 천장에 달아매어져 있었다. 팔은 어깨 관절에서 뽑혀 나온 듯했고, 머리는 앞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허리 부분까지 벗겨진 그녀의 몸은 데이고 멍들어 울긋불긋했으며, 두 눈은 지져 없어졌다. 에반젤린의 축 늘어진 몸이 내려지고, 삼베에 싸여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문이 잠기고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른 후 쥐들이 기어나와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운이 없어 쥐를 쫓을 수도 없었다.

 

이 장면에서 헤더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트랜스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작업을 중단하려 했다. 내가 이 장면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타자기를 두드리기가 힘들어졌다. 팔에서 기운이 빠져 거의 쓸 수가 없다."

 

휘튼 박사는 헤더가 지하감옥의 '검은 머리 여인' 을 자기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다는 데 흥미를 느끼고 이번 삶에서의 모녀관계를 추적했다. 자료는 아주 많았다. 헤더는 어린시절, 먹고 사는 데는 매우 풍족했으나, 정서적으로는 질투심 많은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격려에 굶주려 있었다. 어머니는 '애인을 빼앗긴 에스파냐 약혼자'와 아주 흡사한 태도를 보여, 딸을 물리치고 사기를 꺾어야 할 경쟁상대로 보았다.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내가 예술을 하는 것을 싫어했어요."라고 헤더는 회상했다. 헤더는, 자신이 퇴행성 질병으로 가장 고생하고 있었던 40대 초반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그때까지 했던 모든 훼방의 말들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가치없는 인간이고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앞으로의 상담에 필수적인 세부사항들이 드러났다. 휘튼은 이제 헤더에게 남아있는 정신적 문제는 전생이 아닌 불행한 어린시절에서 연유한 것임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이소벨의 삶과 헤더의 삶 사이의 바르도로 안내했다. 바르도 체류는 아주 짧았다. 이소벨의 죽음과 헤더의 탄생 사이는 고작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헤더는 1980년 12월 3일자 일기에서, 이소벨이 폭풍우 치는 영국해협으로 들어감으로써 시작되는 초의식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이소벨의 몸이 어둡고 거친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보인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한때 이소벨이었음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금빛 발광체 안을 떠돌고 있다. 나는 육체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며 주위와 완전히 하나임을 느낀다.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음을 안다.

 

이소벨의 몸을 보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다. 홀로 있는 것 같지만 두렵거나 외롭지 않다. 빛이 퍼지고 내가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길 데 없는 따뜻함과 사랑과 행복을 느낀다. 주위가 온통 밝게 빛나서 나는 아주 밝은 햇볕을 쬐는 것 같다. 구분이나 격리 같은 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롭다. 부드러운 무지개빛이 보이고, 단순하고 아름다운 곡조로 노래부르는 수많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가 이 모두의 일부라고 느끼며 그곳을 행복하게 떠다녔다.

 

헤더는 이 멋지고 빛에 가득찬 무한한 세계에 계속 머물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해답을 얻으려는 욕망이 이겼고, 그 더없는 행복감은 이소벨의 카르마 대본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이소벨이 계획한 길을 갔더라면 나타났을 천재 음악가로서의 일생이 제시되어 있었다. 음반과 런던과 파리에서의 연주회와 일련의 작품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그러나 이소벨은 계획에서 벗어나 혼란과 불행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고, 성장의 가능성을 허비해 버렸던 것이다.

 

헤더가 중간세에서 수집한 사실로 미루어, 그녀의 현재 삶은 비상대책으로 서둘러 마련된 것이었다. 그녀는 성급히 마감된 이소벨의 삶에 대한 카르마의 영향에 대처하기 위해 억지로 이 세상에 보내진 존재였다. 그녀의 알러지는 과거를 고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물론 이소벨이 방탕한 생활로 빠지지 않았더라면 헤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더는 이렇게 썼다.

"나는 바르도에서, 이소벨이 지금쯤 행복하고 성공한 여자, 증손자까지 둔 할머니로서 죽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만 참고 노력했더라면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헤더는 바르도에서 이번 삶이 '과거생의 영향에 대처하면서 이소벨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카르마 대본을 지녔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3명의 조언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넓은 신전 한쪽에서 이집트의 신들인 라, 오시리스, 이시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전에 들어서자 시스트럼(고대 이집트의 타악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피리와 심벌즈 소리도 더해졌다. 아름답고 묘한 음악이었다. 나는 곧바로 이시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키가 엄청나게 컸으며, 말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그는 내가 예술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혼이 다가올 '헤더의 삶'을 잠시 봤다 하더라도 그것은 긍정적인 자극이 되지는 못했다. 새 삶에서 체험하도록 권유된 것은 좌절과 거부, 눈물 등 어려운 경험들이었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선택에 관한 원치않은 추천이었다. 

나는 갑자기 전율과 공포를 느꼈다. 나는 지금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기를 원했으나, 이것이 이소벨 때문에 갚아야 할 빚의 일부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무서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행복한 삶을 보낼 때 만났던 사람이어서 마음이 조금 놓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을 사랑했고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이번 삶에서 지금의 어머니와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비명을 지를 뻔 했어요.”라고 헤더는 나중에 말했다. 이 때문에 심한 기관지성 폐렴에 걸려 몇 주 동안 고생을 했다. 일단 병이 낫고 나니 기분이 맑아지고 안정되어 더욱 낙관적으로 변했으며, 기관지와 폐의 질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1980년 12월 4일의 일기를 보면 거의 안도의 한숨이 들릴 듯하다.

실로 오랜만에 나는 이번 삶에서 약간의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폭풍우를 이겨내면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점차 잘 풀려나갈 것이다. 내 삶은 이미 천천히 개선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음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노력한다면 예술적인 성공도 조금은 거둘 수 있겠다고 느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휘튼 박사는 헤더의 어린시절을 파괴하고 어른으로서의 삶도 왜곡시켜 온 부정적 영향들과 싸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헤더는 최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체계적인 기존의 심리요법을 통해 자신이 애정과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깨닫게 되었다. 불안감은 점차 사라졌고 남들의 반응에 휘둘리는 일도 줄었다. 자신감이 생기자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도 커졌다. 그녀는 설사 납득하기 어렵더라도 남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남편 필립은 '달라진' 헤더에 대해 "지금까지는 자기 그림자만 보고도 두려워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하고 말했다.

 

헤더는 한때 꿈으로만 여겼던 건강과 활력을 되찾아 보석디자인 뿐 아니라 사진에도 새로운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녀는 1983년 마지막 치료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첫번째 전시회를 열었고, 점차 개인수집가는 물론 미술상들로부터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전에는 일기에 "나는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삶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것 같다."는 어두운 글들을 썼지만, 무의식과 전생 탐구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제 그녀는, 이소벨을 파멸로 몰아넣고 헤더 자신에게 존재이유를 제공한 '자신의 어떤 측면'을 이해하려고 매일 노력하고 있다.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