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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언제나 환영幻影들은 환영歡迎받는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웃으시는 거에요. 그녀는 '난 이제 가련다. 여기 아빠와 조지가 나를 데리러 왔네.'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뒤에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하세요."
어느 간호사는 자신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곤 했던 80세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그 분은 이제 점점 더 약해져서 아플 정도의 자극을 줘야 겨우 반응을 보일 만큼 상태가 악화되었어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튿날 나는 그녀의 가족들을 돕기 위해 그 집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딸이 어머니의 마지막을 설명해 주더군요. 그 할머니는 평화롭게 누워 있다가 갑자기 똑바로 앉더니 빛을 발하는 미소를 지으며 '조, 당신이 여기까지 나를 보러 오다니 너무 고마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는 그녀의 죽은 남편이었어요. 그녀는 다시 누웠고 바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환자가 그 방문객과 이야기를 나눌 때 곁에서 지켜 본 이들에 따르면, 거의 언제나 환자는 맑은 정신이었다고 한다.
"삼촌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솜Somme 전투의 공포를 경험했어요. 그 악몽이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당시 삼촌은 병사들을 지휘했으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3명이었답니다. 삼촌 본인도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어요. 그는 나중에 전공십자훈장을 받았어요.
그가 암으로 죽어가던 30년 쯤 전의 일입니다. 내 어머니가 집에서 그를 돌보았어요.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삼촌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던 어느 날 밤을 기억합니다. 삼촌은 너무 아파서 대화에 자주 끼지는 못했지만 그는 우리가 잡담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그가 앞으로 몸을 구부리며 방 건너편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었어요.
그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들을 향해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힘이 펄펄 살아나며 매우 행복해하더군요. 삼촌은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른 뒤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나 감격스럽다고 말하더군요. 삼촌의 말투로 봐서 그 사람들이 솜 전투에서 죽은 전우들임에 틀림없었어요. 그의 얼굴에 경이의 표정이 나타났고 고통은 잊은 듯 했어요. 나는 그날 밤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삼촌의 전우들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그들이 거기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아요."
다프네 빌리우리는 자기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뜨기 전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다프네는 그리스 출신이며,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곳도 그리스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애 마지막 주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져 자신의 주변과 주위 사람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3일 전에는 자신이 자라난 지방의 사투리로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두 남자와 말을 하면서 4시간이나 보내더군요. 어머니의 말과 어머니의 시선이 방의 두 지점을 오가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으로 짐작했지요. 한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다가 그 1년 전에 죽은 어머니의 남동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더 많은 다른 사람이었어요. 짐작컨대 어머니의 할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그들과 대화를 하는 내내 어머니는 매우 고양되었고, 행복했으며, 정신이 극도로 맑았어요. 그 전 어느 때와도 달랐어요. 그들의 대화는 어머니가 그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로 손을 흔드는 것으로 끝나더군요. 내가 어머니의 정신이 맑게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그 일에 대해 말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의 며칠 동안은 어머니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죠."
"별안간 한 줄기 찬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길게 드리워진 반투명 커튼이 눈에 띌 정도로 위로 펄럭였지요.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표정이 급변했어요. 그때까지 착 가라앉아 있던 표정이 이제 미소가 가득하고, 밝고,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말을 하더군요. 아버지로서는 말을 하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목소리만큼은 강하고 분명했어요. 이렇게 말했죠. "예, 어머니, 알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좋아요, 어머니." 그는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어요.
"나의 아버지는 깊이 상심한 채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서 있었대요.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의 아버지에게 '걱정 마. 난 괜찮다. 너무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거든. 그러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라고 말해줬답니다. 그리고 끝까지 맑은 정신으로 계시다가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해요."
J. 태너는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방문했던 어느 날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그날 그녀의 할머니는 태너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방금 내 어머니가 문간에 서 있는 것을 봤거든. 지금 널 보듯이, 멀쩡하게 보이더라니까.' 태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아마 30년 전에 돌아가셨을 겁니다. 나의 할머니는 2, 3년 전보다 더 아프지도 않았으며 정신도 완전히 멀쩡했어요. 엄마가 나에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말하더군요. 그녀는 언제나 '우리 인간은 죽기 직전에 죽은 친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거든요. 그 이튿날, 할머니는 엄청난 심장발작을 겪으시고는 의식을 잃으셨어요. 할머니는 그렇게 혼수상태로 4일 동안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할아버지는 교회에 다녀온 일요일 저녁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바로 침실로 들어가셨어요. 할머니도 차 한잔을 들고 침실로 올라갔죠.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마벨과 도리스'를 봤다고 말을 하시더랍니다. 마벨과 도리스는 어릴 때 죽은 그들의 자식이지요. 할아버지는 그날 밤에 돌아가셨어요."
'죽음의 예고' 임무를 맡은 환영과,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환영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양쪽 모두 같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병리학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시기 몇달 전, 퇴근해서 집에 도착한 나를 붙잡고 마거릿(할머니의 친언니)이 그날 오후에 자신을 방문했다고 말해주었어요. 마거릿은 할머니의 다섯자매 중 가장 친했던 언니였지요. 할머니는 마거릿과 함께 가고 싶어했지만 마거릿이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더래요. 돌아가시던 날 밤 나의 할머니는 숨을 쉬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두 눈이 활짝 뜨이고, 입가에 미소가 퍼지더군요. 사실 미소 이상이었죠. 얼굴 전체로 환한 빛을 받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누구를 맞이하는 듯 두 팔을 위로 올리더군요. 그 순간 이후로 할머니는 상당히 평온해지시더니 15분 후에 숨을 거뒀어요. 그때 나는 마거릿이 돌아왔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할머니가 그녀와 함께 떠날 시간이 되었던 것이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흰색 말을 타고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어요. 자기를 데려갈 뜻으로 왔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말 등에 오르지 않고 버티면서 아버지와 함께 가기를 거부했다더군요."
다른 몇 사람도 이런 종류의 지연 작전을 언급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던 누군가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할 수 있을 때까지 죽음을 미루는 것 같다는 보고는 매우 많다. 친척들이 모두 자기 곁을 떠난 뒤에야 죽음의 길을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혼자서 죽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죽음의 사자使者'가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다. '죽음이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간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의 전조를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닐까.
"12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몇 년 동안 앓아오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어요. 내가 그를 방문한 어느 날이었지요. 그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는 것 같았어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보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어머니가 말도 걸었다더군요.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더니 남편은 '그냥 잘 지냈냐고 하던데?'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어머니의 방문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나는 남편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머니가 오신 것은 남편을 돕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도 그런 환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고, 사후의 삶을 믿어요. 남편은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났어요. 나는 시어머니가 남편이 그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을 돕기 위해 왔다가, 아들이 가족들과 함께 지낼 여유시간을 조금 더 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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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은 편지 중에는 경험이 풍부한 의료 전문가들이 보낸 것들이 많다. 사회복지사로 벨파스트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말기환자들을 20년 동안 돌봐온 케이트 도넌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환자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누군가를 잡으려고 손을 뻗거나, 단순히 누군가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정신이 완벽하게 맑았던 어느 노부인이, 15살에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가 침대 끝에 서 있다고 말해주셨어요. ... 이 경험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어요. 내가 이런 내용을 의료진에게 전하자, 그들은 '아마 약 때문일 것'이라고 일축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 환자의 정신이 완벽하게 정상이었고, 정신혼란 증세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어요. 이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환자들이 약물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경험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아 많이 속상해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기를 꺼립니다. 그 노부인은 정신이 멀쩡했어요. '자네라면 나를 미치광이로 보지 않을 것 같아 이 말을 털어놓네.'라고 말했으니까요.
말기환자 병동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지만 이제는 그런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어요. 젊은 딸을 먼저 떠나보낸 어느 어머니는 자신이 보기에 딸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여겨지던 순간을 매우 감동적으로 설명하더군요. 그녀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었어요.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신뢰할 만한 분이었어요."
'방문객'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알려주는 출발시간이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노인들을 그들의 가정에서 돌보는 일을 했던 주디스 윌슨 부인이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97세 부인의 기력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냥 사라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요. 우리는 그녀가 말을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요. 후에 그녀에게 누구랑 이야기했느냐고 물었더니, 6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 앨리스였다더군요. 그녀는 앨리스가 내일 오후 2시 30분에 다시 올 거라고 했어요. 이튿날 내가 일을 시작한 것은 오후 2시였고요. 그래서 그녀에게 '앨리스가 여기 왔나요?'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오후 2시 30분이 되기 직전에 그녀가 잠깐 눈을 뜨더니 '앨리스'라는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손을 내밀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어요."
또한 윌슨 부인은, 친척에게 '다음 날에는 내가 없을 테니까 방문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부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노인의 가정을 돌며 간병하는 또 다른 의료인도 이런 일이 언제나 일어난다고 전해주었다.
의료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받아온 훈련 프로그램이 죽음의 과정에 나타나는 이런 측면에 대비하는 데 미흡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훈련이 주로 육체적 보살핌에 치중되어 있다보니 모든 원인을 병이나 약에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의료인들은 환영을 경험하는 환자를 목격한다 해도 그 문제를 논의하기를 꺼린다.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저는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편이에요. 하지만 간호사 훈련을 받는 동안, 과학적으로 측량 가능하지 않다면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임종의 자리에서 빛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뇌 기능의 종식과 뇌세포의 죽음에 따른 화학적 환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환영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련의 사례들을 보면서 저는 달라졌어요. 조사에 바탕을 둔 연구분야에서 완전히 손을 뗀 지금, 저는 다시 저의 마음이 활짝 열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세상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죠."
근사체험은, 환자의 모든 의도와 목표가 사라진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근사체험도 임종시와 마찬가지로 절대평화, 환희, 그리고 빛의 경험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여행'의 개념이 핵심이다.
'일시적 죽음체험temporary death experience'의 경우에는 '임종시'에 비해 이야깃거리가 더 풍부하고, 환영의 영역도 훨씬 더 구체적이다. '일시적 죽음체험'은 시작과 중간, 마지막이 있는 여행이며 그 끝은 이 세상으로의 복귀이다. 간혹 그 여행은 '체외이탈 경험'으로 시작하며, 시커먼 터널을 지나 가끔 밝은 빛 속으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거기서 죽은 친지나 친구 그리고 간혹 천사 같은 존재들을 만난다. 이때 그들의 역할은 우선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아직은 함께할 때가 아니므로 돌아가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임종시의 경우에는 이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이 겹쳐지고, 두 세상이 동시에 경험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녹아든다는 점이 다르다. 임종자가 두 세상을 혼동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다는 점을 늘 알고 있다.
죽음을 여행으로 여기는 까닭은 임종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해서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그보다 더 나은 설명은, '방문객'이 전하는 메시지가 삶의 종말이 아닌 연속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낙관적인 메시지이다. 높은 곳으로 향하는 희망적인 여행의 가능성인 것이다. 임사체험자들이 전해주듯이 '죽음에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