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신이치 지음, 신유희 옮길, 2012, 위즈덤스타일
<프롤로그>
노인요양병원에서 15년 가까이 근무해오는 동안 나는 수백 건의 자연사自然死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수액주사나 산소호흡기 등 모든 의료적 간섭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완성해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숭고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만일 이곳이 병원이었다면 그런 귀중한 체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병원에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런저런 처치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기에 자연사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죽음을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으로 여기지만, 정확히 말하면 '의료가 개입된 죽음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다. 암 환자조차도 의료적 개입없이 그냥 내버려두면 고통없이 평온하게 죽어간다. ... 노년기를 보다 편안하게 보내려면 의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노화에 순응하며 병과 동행해야 한다.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당장 의사니 약이니 병원이니 하며 법석을 떠는 사람에게 자연사란 너무나 허황된 소망일 것이다.
나는 유명하거나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서 잃을 것도 없을 뿐더러 어차피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울 게 전혀 없다. 때문에 앞길이 창창한 젊은 의사나 의료계의 고위직 인사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주장을 이 책에 서슴없이 펼쳐놓았다. 이것이 평생을 환자들 곁에서 살았던 한 노의사의 도리이며, 스스로 자연사를 택하여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한 수많은 노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55쪽>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마치 나뭇잎이 떨어지듯 툭 쓰러져 죽는 사자를 생각해보자. '자연스럽게 죽는 것'은 우주적인 순리이다. 자연사自然死란 죽는 순간에 그 어떤 의료장치도 없이 몽롱하게, 기분좋고 편안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자연은 그리 가혹하지 않으며 우리 조상들은 모두 이렇게 '무사히' 죽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죽을 때가 되면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병원을 찾게 되었고, 갖은 방법으로 어떻게든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병원의 사명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현장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사람에게 콧속으로 튜브를 삽입해 위까지 연결하거나(비강영양), 위에 구멍을 뚫어 직접 관을 삽입하여 식사를 돕는 시술(위루술)로 영양을 공급한다. 탈수증세가 있으면 링거주사로 수분을 계속 넣어주기 바쁘다. 빈혈에는 수혈을,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이뇨제를, 혈압이 떨어지면 승압제를 쓴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가 결국 자연이 마련해 준 최후의 선물 즉, 불안도 적막감도 느껴지지 않는 행복하고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낙엽처럼 하늘하늘 죽어갈 수 있는 그 마지막 과정을 완전히 빼앗아 간다.
2011년 2월, 일본노년의학회에서 의사들을 대상으로 스스로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는 85세의 알츠하이머 말기 환자를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설문에 응한 1,554 명 가운데 '모든 것을 삼가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10%에 불과하고, 위관영양 21%, 비강영양 13%, 끝으로 팔다리에 수액주사를 놓는다'가 51%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때 팔다리 수액주사의 경우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필요하다'라는 의견이 놀랍게도 38%나 되었다.
다 죽어가는 식물에 비료를 줘야 할까? 비료를 준다 해도 어차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물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다른 경로를 통해 비료를 몸속에 억지로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는 짓인지 상상해 보라. 언젠가 동년배 장의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엔 노인들이 바짝 시든 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납관 작업이 수월했지. 헌데 요즘처럼 병원에서 죽은 시신은 무거워서 너무 힘이 들어." 마지막 순간까지 링거를 맞고 물을 보충하기 때문에 이른바 '익사' 상태가 되었으니 무거울 수밖에.
나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요즘은 위루라는 강제 인공연명 장치가 있으니 가족분들끼리 잘 상의해서 결정하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가족들로부터 원망을 듣는 등 불쾌한 소동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사를 강요하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해서는 애석한 마음이 들지만.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의 편집장 인겔하임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질병의 80%는 의사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 의사의 진찰이 필요한 경우는 10% 남짓이며, 의사에게 보이는 바람에 오히려 더 나빠진 경우가 10%에 조금 못 미친다." 세계의 모든 의사가 들고 일어날 법한 발언 아닌가? 그런데도 이후로 아무런 반론이 없는 것을 보면 완전히 잘못된 말은 아닌 모양이다.
<75쪽>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연사의 실체는 '기아와 탈수'의 과정을 거치며 죽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생명력이 약해짐에 따라 음식의 필요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뇌 속에 '엔도르핀 유사체(모르핀양물질,아편양물질,아편류)'가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탈수 역시 혈액이 농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된다.
몸져누운 노모를 모시고 살던 아들이 어머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며 병원에 데려온 적이 있다. '출근하면서 어머니 머리맡에 마실 물과 주먹밥을 놔두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그대로더군요' 한여름 무더위에 충분히 먹고 마시지 못하다 보니 결국 사흘째가 되어 거의 의식을 잃었다. 병원에서 링거주사로 묽은 식염수를 계속 점적하여 진해진 혈액을 묽게 만들었더니 의식이 돌아왔다.
'어머니, 며칠동안 힘드셨죠? 아무 것도 못 드셔서...' 아들의 물음에 노모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구나.' 고통을 전혀 못 느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상태로 그냥 두었다면 아무런 고통없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오면 호흡도 약해진다. 호흡이 원활하지 않으면 산소결핍 상태가 되는데 이때 뇌 속에 엔도르핀 유사체가 분비된다고 알려져 있다. 유도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조르기 기술에 걸렸을 때 하나같이 '기분이 좋았다'고 말한다. 엔도르핀 유사체 때문이다. 죽음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가혹하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니 귀에 대고 큰소리로 부르거나 몸을 흔든다든지 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만히 놔두는 것', 이것이 죽음을 앞둔 이에게 가장 좋은 배려이다.
<82쪽>
위루술은 예전에는 전신마취를 하는 외과수술로 위에 구멍을 만들었기 때문에 꽤 신중하게 시술하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위 내시경이 있어 15분 정도면 간단히 끝난다. 위루술이 이렇게 간편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자주 실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병원에서는 가족들에게 위루관 수술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위루를 만들어도 다시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라고 안심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럼 가족들은 '다시 입으로 먹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는 생각으로 수술에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점점 더 인간답지 못한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위루관 수술을 한 지 4년 뒤에 사망한 85세 여성이 있었다. 팔다리 관절이 굳고 완전히 뒤틀린 채, 얼핏 봐선 어디가 팔이고 어디가 다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대로는 관에 넣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양팔을 묶을 수도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또 다른 강제 인공영양법으로 비강영양이 있다. 최근에는 위루술이 점점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비강영양은 줄었지만, 위루술과 달리 몸에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에 보호자들이 비교적 쉽게 동의하는 편이다. 비강영양은 코를 통해 식도나 위, 혹은 십이지장 등으로 가느다란 튜브를 넣어 미음이나 죽을 주입하는 방법이다. 코에 튜브를 삽입하면 불쾌하고 괴롭기 때문에 누구라도 틈만 나면 튜브를 잡아 빼려고 한다. 의식이 있는 경우에는 이게 왜 필요한지 설명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튜브를 뽑아내지 못하도록 양팔을 묶어둘 수밖에 없다. 게다가 침이나 약물 그리고 음식물이 튜브를 타고 기도로 잘못 들어갈 수 있어 오연성 폐렴을 일으킬 수 있다.
나는 노쇠사를 앞둔 노인에게는 원칙적으로 수액주사나 산소흡입은 실시하지 않는다. 그런 장치들은 당사자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과정을 방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액주사 정도는 놔주길 바라는 가족들이 가끔 있다. 탈수가 시작되면 의식이 흐려지고 몽롱한 상태가 되니 나쁘지 않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그들은 수액주사가 무슨 영양 덩어리라도 되는 양 그저 주사를 놔달라고 졸라댄다. 하긴 병원에서 지금껏 '영양제 주사'라는 이름 아래 수액주사가 이루어져 왔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 그래서 나는 (스포츠 음료나)미네랄 워터를 마시라고 권한다.
수액주사도 없이, 입으로 물 한 방울조차 넘기지 못하게 된 경우에는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대략 7~10일쯤이다. 배뇨는 사망하기 2~3일 전까지 이루어지고, 생존일수가 짧을 때는 사망 당일까지도 배뇨가 있을 수 있다. 물 한 방울 못 넘기는데 어떻게 소변이 나올까? 체온을 유지하고, 심장을 움직이고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로 이 에너지 생성과정에서 물과 탄산가스가 만들어지며 이것이 소변으로 배설되는 것이다.
탈수 상태에서는 체온이 38~39.5도 정도까지 오를 수 있다. 이것은 자동차 엔진과 냉각수의 관계와 같다. 엔진을 가동하면 열이 나고, 이것을 식히기 위해 냉각수가 필요한데 만일 냉각수가 없다면 당연히 엔진이 과열될 수밖에 없다. 사람도 에너지 생산과정에서 열이 나고 이 열을 식히기 위해 물이 필요한데, 한 방울의 물도 넘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냉각수 부족으로 체온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당사자는 새근새근 잠을 자는 상태이며 고통은 전혀 없다.
프랑스에서는 노인의료의 기본을 이렇게 정의한다고 한다.
"스스로 음식을 넘기지 못할 때 의사의 일도 끝나며, 다음은 목사의 일이다."
<97쪽>
과거 일본에서는 출산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미신이 있어 '산옥産屋'이라는 격리된 장소에서 출산이 이루어졌다. 출산이 부정한 것이라면 그렇게 태어난 우리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오늘날 몇 군데 남아있어 문화재로 지정된 산옥을 보면, 이런 차디찬 곳에서 어떻게 아기를 낳았을까 싶은 곳도 있고 6평 정도의 공간을 반으로 나눠 분만실과 생리실로 쓴 형태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옥 천장에 매달아 늘어뜨려져 있는 밧줄이다. (이후는 '좌위坐位'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 몸을 일으켜야 중력을 이용할 수 있고, 힘을 쓸 때 몸은 저절로 앞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으므로 출산, 식사, 배변 등은 누워서 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앉은 자세로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
<119쪽>
나는 '죽기에는 암이 최고'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최고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거의 모든 암환자가 병원에서 그 과정을 완전히 숨긴 채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죽어가는 것은 너무도 큰 낭비인 셈이다. 둘째, 암은 비교적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으로 인한 사망은 날짜를 비교적 확실히 특정할 수 있어서 남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하는 등의 신변정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암으로 인한 사망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 암이라고 하면 누구나 극심한 통증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암이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지독한 암이라도 그 가운데 30%는 통증을 수반하지 않는다. 요컨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암인데도 통증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 꽤 많다. 내가 '모임'을 시작할 무렵, 어느 산촌에서 온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가까운 일가친척 가운데 세 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세 분 모두 암을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손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의료의 손에서 벗어나 조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솔직히 암이 두렵지 않습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그 흔한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떠나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다면 암도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