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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3. 00:45 일기




문재인이 19대 대통령이 되었다.

 


어제 늦은 오후에 우산을 쓰고 투표를 하고 왔다. 끝나기 전엔 끝난 게 아니라는 많은 이들의 경계가 있었고, 모든 노력을 무력화하는 부정선거에 대한 걱정이 커서였는지.. 많은 정황이 당선을 가리키고 있어도 마음이 전혀 들뜨지 않았다. 8시에 발표된 출구조사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설레지 않았다. 당선이 확실시된 후 밤늦게까지 유투브로 이런저런 기쁨의 동영상을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15년전 12월 19일의 기쁨과 그 이후의 스토리가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되어 트위터 타임라인을 살피다가 그만두었다. 슬픔처럼 기쁨도 일정시간의 버퍼링 후에야 찾아오는 것 같다.
 
어제 개표가 시작되고 '아! 정말 되는 건가', '아직은 아니야',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지' 하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똥마려운 멍멍이 모양으로 서성이다가 갑자기 청소가 하고 싶어졌다. 청소가 하고 싶다니, 청소가 하고 싶다니... 이건 내가 아니다ㅋㅋ. 더 신기한 건 물걸레를 빨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그러고는 가사도 멜로디도 희미해지면서 '로렐라이 언덕'으로 옮겨탔다. 어? 이 노래는 뭐지? 나 이 노래 아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왜 튀어나온 거지? 
 
그 첫소절 가사로 검색을 해보니 '희망의 속삭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가. 가사를 보니 멜로디도 다 기억났다. 찬송가로도 쓰이는 것 같다. 그냥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뜬금없이 흘러나온 이 노래는 문재인의 당선 앞에서 기뻐하기를 주저하는 내게 훌륭한 메시지가 되었다. 
 

 


< 희망의 속삭임 Whispering Hope >
                                    - Alice Hawthorne(Septimus Winner 1827~1902)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을.
어두운 밤 지나가고 폭풍우 개이면은, 동녘엔 광명의 햇빛 눈부시게 비치네.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앞에 어린다.
 
저녁놀 서산에 재운 황혼이 찾아와도, 청천에 빛나는 뭇별 이 밤도 명랑하다.
밤 깊어 나의 마음 고요히 잠들어도, 희망에 찬 아침 햇빛 창문을 열어주리.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앞에 어린다.

 

나는 초등학교(국민학교) 1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다. 그 때까지는 음악 속에서 살았다. 엄마는 피아노를 칠 줄 알았고, 가곡을 좋아해서 자주 들었고 성악가처럼 노래했다. 윤석중의 시집 '동요따라 동시따라'를 손에 들고 아파트 마당에서 내게 읽어주던 기억이 난다. 1학년 때 엄마를 잃고 교회를 잃고 음악과 시를 잃었지만, 그 어떤 잔상이 남았는지 나는 노래를 좋아했고, 음악 속에 살고 싶어했고, 노랫말과 시를 좋아했다. 무슨 노래든 쉽게 배웠고, 만화주제가부터 교과서노래와 가요까지 모든 아는 노래의 가사를 외웠으며, 악기를 좋아했다. 하모니카와 피리 불기를 좋아했다. 혼자 있는 시간, 혼자 걷는 시간엔 노래를 불렀다. 간절히 노래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난 성량은 작고 저음도 고음도 약하고 숨은 짧아서 일찍이 포기했다.
 
종이에, 마당에 건반을 그려놓고 선생님 흉내를 내던 시절의 소원은, 선생님이 퇴근하고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간 뒤에 텅 빈 학교에서 풍금을 쳐보는 거였다. 그러나 집은 멀고 선생님들의 퇴근은 늦어서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었다. 6학년 때 담임이던 김애라 선생님은 음악을 정말로 좋아해서 우리 반 40명 학생들 모두에게 악기를 하나씩 가지게 했다. 실로폰은 3,000원, 멜로디온은 10,000원! 각자의 사정에 따라 돈을 냈고, 선생님이 서울에 가서 직접 사다 주셨는데 나는 그 돈을 낼 수 없었다.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주지 않았다. 6학년 내내 많은 시간을 합주로 보냈는데 악기가 없는 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으로 참 서글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음악과목은 중학교 때까지만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과목이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음악책 세권을 자취생활 내내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적선처럼 내게 멜로디온이 생겼다. 나는 악보 보는 것을 배운 적이 없어서 악보와 건반이 같이 있어도 연주를 할 줄 몰랐다. 그 대신 머릿속에 들어있는 온갖 노래가 악보가 되어주었다. 말은 하지만 글자는 못읽는 문맹처럼, 나는 악보를 모른다. 그 대신 '음'을 알면 하모니카로 불 수 있고 건반으로도 칠 수 있다. 음을 들으면 계이름을 안다. 어떻게 아는지는 모른다. 2박자면 도솔미솔..., 3박자면 도미솔... 원시적인 반주를 하면서 머리속에서 흘러나오는 계이름으로 연주한다. 나의 장난감인 디지털피아노로 '희망의 속삭임'을 연주하니 기분이 정말 좋다. 자꾸 '로렐라이 언덕'과 엉켜버렸지만 금방 괜챦아졌다. 
 
삶은 그저그런 날들 사이에 가끔 좋은날과 나쁜날이 끼어있고, 저 하늘의 달이 차올랐다가 기울기를 반복하듯이 좋은일도 나쁜일도 그저 순환할 따름인 것 같다. 정말 즐겁게 봤던 영화 '데드풀'의 대사처럼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고, 행복은 ○○처럼 짧다". 그걸 알아버린 이후에는 더이상 좋은 일에 어린애처럼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쓴약은 되도록 빨리 삼키고.. 사탕은 최대한 천천히 녹여먹을 일이다. 그래도 음악이 있어서 쓴약 먹기도 좀 수월했고 사탕 맛도 더 각별했던 것 같다.
 
어제 비가 와서 대기를 청소했으니 오늘(음력4.15.)은 맑은 밤하늘에 뜬 '슈퍼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과 우리의 앞길이 맑고 수월하기를, 좋은 날들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음악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의 모든 것이다"

 

 



 <2017/05/10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