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샘은 여러 번 죽는다. 죽을 때마다 '의식意識Consciousness'은 몸에서 빠져나와 방금까지 입고있던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 본다.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처럼, 몸이 없는데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의식은 주변을 살피며 헬륨풍선처럼 둥둥 떠오르다가 허공에 나타난 '빛의 통로'로 향한다. 천천히 그 눈부신 빛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방향을 틀어 아래로 내려간다. 어떤 미련이 매 번 그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미련을 해소하려면 지상의 삶으로 복귀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 새로운 몸에 안착하면 이전 몸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뜻한 만큼 잘 풀리지 않고 결국엔 업데이트된 미련을 안고 죽는다. 다시 또 다시 '끝내기 위해' 복귀한다. 이것은 첩보영화를 연상시킨다.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으니 [미션: 임파서블]같은 시리즈일까. 훈련된 요원이 '임무 수행'을 위해 현장에 투입된다. 아무리 죽을 고생을 하며 뛰어다녀도 지구의 평화는 요원하며 악당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재충전을 위한 짧은 휴식이 끝나면 다음 임무를 위해 하강!한다. ...... 이 영화는 기나긴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세월, 아니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01:16:22
"이 사진 기억 나. 사라가 찍은 유일한 사진이야. 사라가 (죽기전에)물 속에서 뭔가 봤지. 빛이랬어. 나도 오늘 빛을 봤어. 타일러가 날 죽이고 제이를 죽였을 때... 내가 죽을 때마다!Every time I die"
01:17:42
"난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샘은 갑자기 닥친 죽음 이후, 뭔가를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면서 몇번 더 죽음을 경험한다. 죽을 때마다 '할 일이 더 있다'는 집착이 그를 몸이라는 속박 속으로 밀어넣고, 이 반복이 그를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그는 알아낸다. 자신이 죽을 때마다 '빛'을 본다는 사실! 그리고 몸은 죽지만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임을!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막바지에 그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여동생 사라를 마주하게 된다.
00:14:27
[나는 사라의 오빠다. 사라를 영원히 지켜주기로 약속한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사라가 무섭거나 외로울 때면 여기에 오면 된다. 나는 항상 사라를 보호하겠다.](샘이 어릴 때 사라에게 써준 쪽지)
사라는 6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뒤,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처럼 '부서진 집'을 버리고 형제의 집으로 (들어)갔다. 너무 어렸던 탓에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더이상 사라일 수 없는지, 왜 엄마 아빠가 자신의 옷과 인형을 불태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와 사회는 '샘'이 되라고 강요하면서 글과 셈을 가르치고 원래의 정체성을 다 버리게 했다. '너는 누구니?'라는 물음에 '나는 9살 샘이고, 샘은 사라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대답하도록 거의 세뇌했다. 의사는 '넌 결코 사라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라는 깊이 상처받은 채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이른바 '내면아이inner child'가 되었다.
샘은 시간을 거슬러 사라의 경험을 경험한다. 그 앞선 경험이 이후의 경험에 미친 영향을 통찰하게 된다. 구하지 못한 인명, 치유되지 않은 슬픔과 죄책감, 지키지 못한 약속, 거절당한 사랑... 그리고 떨쳐낼 수 없었던 사진꾸러미, 그를 괴롭혀 온 간헐적 기억상실과 두통... 그 모든 고통의 인과因果를 이해!하게 된다. 바로잡을 잘못 같은 건 없었고 그저 자신을 용서 아니, 이해할 필요만 있었다. 환생의 사이클은 단지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과정일 수 있다. 사실 샘도 아니고 사라도 아니었던 그 '의식'은 마침내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빛을 향해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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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면에서 샘은 '사라가 샘의 몸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깬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반사된 제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비로 살다가 사람으로 깨어나 어리둥절했던 장자莊子같다. 꿈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소년에서 성인으로, 나비에서 사람으로 바뀌는 겉모습을 줄곧 지켜보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전체화면 위로 눈꺼풀이 깜빡인다. 그 눈꺼풀 뒤에서 거울을 '바라보던' 그 존재가 더 뒤로 물러선다. 사람눈의 테두리가 드러난다.
"옛날에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워서 자신이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있었다. 알 수가 없다. 장주의 꿈에서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서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질화'다." - 장자
昔者莊周夢為蝴蝶, 棚棚然蝴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 則蓬蓬然周也,不知周之夢蝴蝶, 蝴蝶之夢為周與? 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꿈 속에서 술을 마시던 이가 아침이 되면 슬피 울기도 하고, 꿈속에서 슬피 울던 이가 아침이 되면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꿈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꿈임을 알지 못하므로, 꿈 속에서 꾼 꿈에 대해 또 점을 쳐본다. 꿈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큰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이것!이 큰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장자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 又占其夢焉. 覺而後 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 知此其大夢也.
샘은 TV로 연가시를 본다. 이 기생충은 곤충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다가 번식기가 되면 곤충을 조종하여 맑은 물로 이동한다. 숙주는 죽고 연가시는 빠져나와 번식한다. 이것은 샘의 몸을 점유(또는 공유)하고 있는 사라와, 목적을 위해 계속 몸을 옮겨가는 샘에 대한 비유일테지만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샘이 운전할 때 차 열쇠에 달린 세마리 동물그림이 달랑거린다. 이것은 티베트불교의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또는 '생명바퀴The Wheel of Life' 또는 바바카크라Bhavacakra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림이다. 탐貪, 진瞋, 치癡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냥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날지 못하는 새, 땅바닥에 붙어사는 뱀, 욕구에 눈먼 돼지! 아브락사스도 다리는 뱀이고 머리는 닭이다. 인간은 식욕, 성욕, 물욕, 권력욕에 끌려다니느라 지상에 붙들려 살면서, 구속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바깥쪽 원에도 상징적인 그림이 있다. 어둠無知속에서 동물적 자아에 쫓기고 끌려다니던 인간이, 밝음智慧속에서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 그러나 서로의 꼬리를 물고 결합한 닭-뱀-돼지가 바퀴를 굴리기 때문에 이 과정은 무한반복된다. 가혹하게도 한바퀴 돌 때마다 기억은 (거의) 초기화된다. 그래서 몇백번을 굴러도 언제나 처음이자 유일한 삶인 줄 안다. 바퀴를 잡고 있는 죽음의 신은 스핑크스처럼 '스스로 답을 찾기 전에는 못빠져 나간다'고 경고하는 듯 하다.
샘은 동료 제이와의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난 자살 충동은 없어요. 아끼는 것들에 집착하는 편이라서요." 이 말은 우리 대다수의 상태를 대변한다. 우리가 삶을 지속하는 이유는 사실 행복해서가 아니다. '아끼는 것들' 속에서 안정을 찾음으로써,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완화하는 과정 자체가 삶이 된다. 익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 튜브에 집착하느라 물 밖으로 못나가는 바보처럼, 아끼는 것들(가족, 연인, 친구, 집, 재산, 돈, 인기, 명예...)을 내려놓지 못한다.
제이 왈, "살면서 자기자신에 대해 웬만큼 알게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유지만 잘 하면 돼. 수평을 맞추듯이 (감정적)균형을 유지하는 거야." 잘 유지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에 어떻게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이는 'FUCK THE COLOR BLIND'라고 쓰여진 옷을 입고 있다. 이 옷은 잊을만 하면 한번씩 나타나서 마치 샘의 모든 괴로움과 사건사고의 원인이 '망할넘의 컬러 블라인드'라고 훈수하는 것 같다. 색맹color blind테스트용 그림을 흉내낸 이 프린트는 다분히 중의적인 말장난이다. 눈은 '총천연색 세상을 투사하는 프로젝션'으로서, 이 출중한! 시력을 끄기 전에는 텅 빈 '하얀 벽'을 결코 볼 수 없다. 일반 블라인드는 그저 빛을 가리지만, 컬러 블라인드는 그게 블라인드라는 사실마저 가린다.
'Reflections of My Life(The Marmalade, 1969)'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멜로디는 익숙한데 노랫말은 낯설다. reflection을 '반성, 성찰, 돌아봄' 등으로 의역하는 기존의 방식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읽으면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된다. reflection은 (물이나 거울에) 반사된 모습反影, 또는 영상映像, (원본의)그림자, 반사된 빛을 뜻한다. 이 노래는 '컬러 블라인드'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각작용과 환영의 정교함에 대한 감탄,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벗어나 본향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소망,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걸 바꾸겠다고... 서구의 1960년대는 여러모로 놀랍다.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고 있어. 내 삶의 반영들.
아, 그 빛들이 어떻게 내 눈을 채울까.
힘겨운 이들이 건네는 인사들. 내 삶의 반영들.
아, 그들이 어떻게 내 눈을 채우는 걸까.
이 모든 아픔, 다가올 슬픔. 나를 집으로 데려다줘.
내 모든 눈물, 울음들. 죽을 것만 같아.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집으로.
난 변하고 있어. 정리하고, 바꾸고 있어.
모든 걸 바꿔가고 있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세상은 나쁘고 험한 곳이야. 살아가기엔 끔찍한 곳이지.
아,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아.
이 모든 아픔, 앞으로의 슬픔.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집으로.
내 모든 눈물, 울음들. 죽을 것만 같아.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고향으로.
"그대가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육체인가? 그 육체는 어머니의 자궁 속 작은 점에 불과했었다. 생각해보라. 무엇이 수태된 한 점의 물질 속에 잠복해서,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육체로 성장시켰는가? 세상에 태어나 존재해 왔으며 지금은 진리를 찾고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대의 정체는 바뀌어가는 겉모습 너머에 있는, 바뀌지 않는 '의식'이다." -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