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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2. 21:37 낙서장

 

 

 

[스코트니어링 자서전]  <124쪽>

 ...... 갈런드기금에서 일한 경험은 개인차원의 자선행위가 얼마나 헛된 행위이며, 더 심하게 말한다면 죄악에 가까운 행위인지를 깨닫게 해준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만일 누군가 배고픔에 시달린다면, 푸짐한 식사 한 끼로 그를 만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행위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또 수혜자는 기생적 생활습관을 얻어 재차, 삼차 구걸의 손을 벌리게 되어 있다. 구걸이 제도화되고, 빈곤에 익숙해지는 악습을 낳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자선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경제적 불공정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눈앞에 닥친 긴급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무조건적인 재정 보조는 수혜자를 그것에 길들게 만들어 결국은 자생 의지를 꺾는 부정적 효과를 기져올 뿐이다. 갈런드기금은 급진적 단체들에게 '자생력'을 부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기금보조는 그 단체들을 영원한 구걸꾼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딸아이 학교에서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비를 모금한다며, CD와 편지지 그리고 돈봉투 달린 홍보지를 가져왔다. CD 화면 속의, 불편한 몸으로 동생들을 부양하는 고아소년에게 편지를 써서 제출하면, 특별히 잘 쓴 사람을 선발하여 봉사의 기회를 준다고 씌여있다. 엄마도 편지를 쓰라고 한다. 작년에는 'OO야, 힘내'하는 식으로 나도 편지를 썼지만 올해는 또 뭐라고 쓰나. 그 아이는 우리의 편지를 읽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작년에도 학교를 통해서 똑같은 단체에 똑같은 식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서 지방으로 전학을 왔어도 다르지 않다.^^ 싫은 티를 내자니 아이로부터 오해를 살까 염려되고, 기꺼이 취지에 따르자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소액을 보내지만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갹출이므로 늘 달갑지 않다. 전국의 초등학교를 동원한 저인망식 모금이어서 더 거슬린다. 표면상 어른들의 참여를 강제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방법보다 강제적이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가 동정심과 협력, 십시일반의 교훈을 배우는 과정을 훼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본다. '전국의 초등학생X2000원=?'. 대충 계산해 보니,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줘야겠지. 
 
모금 권하는 사회다. 일본의 지진피해자를 돕자고 방송3사가 한달내내 돈을 거둬들인다. 특별생방송도 한다. ARS를 이용한 모금의 경우, 상당 퍼센티지가 통신사 등의 업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론은 없다. 모두가 선량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지만 얼마가 걷혔는지, 어디에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알리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 연말연시에만 나타나는 구세군 역시, 매스컴의 지원을 업고 방방곡곡에서 모금활동을 펼치지만 봄여름가을동안엔 구세군제복을 본 적이 없다. 기독교의 한 종파일 뿐인 구세군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공적인 자선단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오늘도 아고라에서는 유명연예인들을 앞세워서 모금청원이 진행중이다. 그 연예인들은 좋은 뜻에서 무료로 나서줬겠지만, 그들을 내세워 수월하게 모금을 진행하는 측이 원하는 모금액수에 상한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는 각종 성금의 불투명한 집행과정을 추적할 수 없지만, 모금주체가 되는 기관, 단체들의 과도한 열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마더 테레사가 인생을 바친 인도 콜카타의 가난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듯이, 우리나라 빈민들의 가난도, 불우이웃도, 결식아동도, 독거노인의 쓸쓸한 죽음도 별 개선없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들이 소득증대의 수단이니 말이다.

 

 


<2011/04/07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2. 21:28 낙서장

낭만이란 무엇일까. 사춘기소녀의 꿈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그렇다. 외로운 마음이 갈구하는 '약'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하이틴로맨스를 읽는 소녀나, 바람나서 가정을 버리는 여자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 같다. 그들은 꿈을 쫓는 소녀들이다. 낭만의 수요자는 아마도 소수의 남자와 다수의 여자일 것이다.

나는 태생적인 낭만추종자였다. 시집을 사 모으고, 순정만화를 읽고, 사랑스런 만화장면을 스크랩하고, 따라그려보기도 하고, 유치환.이영도의 서신집을 밑줄을 그으며 읽고, 이외수의 '감성사전' 따위를 읽고 메모하고, 거의 모든 러브스토리에 빠져들고, 연애소설로 밤을 지새고.... 그 신기루를 쫓으며 사춘기와 20대초반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낭만이 무엇인지도 가물가물하고, 그다지 아쉽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짝을 찾아 헤매이는 시절에서 멀어졌으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낭만에의 동경은 최근 완전히 사라졌다. 태생적 낭만추종자에게 결혼 10주년이 준 선물같기도 하다.^^
 
이른바 로맨틱가이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확~깼기 때문이다. 대체로 애정표현에 능숙하거나, 보란듯이 다정함을 과시하는 남자들은 거짓말에도 능숙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내 하희라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남다른 애정표현(이벤트)으로 유명한 최수종. 알고보니 학력위조범!이었다. 어쩌다가 뽀록이 나자, 자기 입으로 외대 졸업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나. 웬걸, 자기 이름으로 출판한 몇 권의 책에 상세하고도 리얼하게 캠퍼스생활을 묘사해 뒀고, 외대 후배(!)들을 상대로 초청강연도 했었다고 한다.
 
최근에 알게 된 두 유명인의 과거. 전국민이 다 알도록 '옥경이' 사랑을 부르짖는 애처가인 태진아. 간통범으로 경찰에 붙들렸던 과거가 있었다. 어머니뻘되는 부잣집 마나님에게 고액의 용돈을 받아가며 호텔밀회행각을 벌였었단다. 또 한 사람은 이외수. 지극한 아내 사랑을 저서와 방송을 통해 알려온 '사랑' 전문가. 20여년 전에 마약범으로 경찰서에 다녀오셨는데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량의 대마초를 소지하고, 문학지망 소녀들과 여관을 전전'했다고 한다. 죄의 경중은 잘 모르겠으나 '정직'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혜정이'에 대한 애정을 자랑하고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라며 전국 처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타블로 이선웅의 사기행각은 거의 영화 수준이다. 그 타블로를 위하는 척,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회원들을 '똥덩이'라고 매도한 가수 알렉스는, 그 직후에 자신의 프로필에서 '에버딘대학 신학과 졸업'을 완전히 빼버렸다. 이 남자 역시, mbc '우리결혼했어요'를 통해서 뭇여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김동률의 '아이처럼'을 신애에게 불러줄 때는 나도 혹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로맨틱가이는.... 예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언니의 남자친구. 매일같이 손수 만든 도시락을 갖다주었고, 기념일에는 직접 쓴 시로 액자를 만들어 선물했던 남자,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회사 앞으로 마중을 나와서, 장거리연애 중이던 나를 서글프게 했던 그 분은....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애인의 적금을 몇차례나 가져가서 결코 갚는 일이 없었다.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이 생활이었고, 결혼한 후에는 아내의 모든 수입을 탕진했다.

낭만은 무슨...



<2010/09/29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2. 20:14 퍼온 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2010.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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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생의 소식을 접하고, 그 대자보를 읽었을 때.....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소년을 본 것 같았다. 넷상에서의 반응은 대체로 '용기는 가상하나 앞날은 어두울 것'이라는 비관론이었지만.... 나는 안다. 어렴풋하지만 안다. 머리가 깨어지도록 생각하고 생각한 연후에 내린 결정은 '후회'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 미래에 복이 있기를 존경을 담아 기원한다.

 

 

<2010/03/15에 쓰고 2018/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