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트니어링 자서전] <124쪽>
...... 갈런드기금에서 일한 경험은 개인차원의 자선행위가 얼마나 헛된 행위이며, 더 심하게 말한다면 죄악에 가까운 행위인지를 깨닫게 해준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만일 누군가 배고픔에 시달린다면, 푸짐한 식사 한 끼로 그를 만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행위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또 수혜자는 기생적 생활습관을 얻어 재차, 삼차 구걸의 손을 벌리게 되어 있다. 구걸이 제도화되고, 빈곤에 익숙해지는 악습을 낳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자선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경제적 불공정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눈앞에 닥친 긴급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무조건적인 재정 보조는 수혜자를 그것에 길들게 만들어 결국은 자생 의지를 꺾는 부정적 효과를 기져올 뿐이다. 갈런드기금은 급진적 단체들에게 '자생력'을 부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기금보조는 그 단체들을 영원한 구걸꾼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딸아이 학교에서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비를 모금한다며, CD와 편지지 그리고 돈봉투 달린 홍보지를 가져왔다. CD 화면 속의, 불편한 몸으로 동생들을 부양하는 고아소년에게 편지를 써서 제출하면, 특별히 잘 쓴 사람을 선발하여 봉사의 기회를 준다고 씌여있다. 엄마도 편지를 쓰라고 한다. 작년에는 'OO야, 힘내'하는 식으로 나도 편지를 썼지만 올해는 또 뭐라고 쓰나. 그 아이는 우리의 편지를 읽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작년에도 학교를 통해서 똑같은 단체에 똑같은 식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서 지방으로 전학을 왔어도 다르지 않다.^^ 싫은 티를 내자니 아이로부터 오해를 살까 염려되고, 기꺼이 취지에 따르자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소액을 보내지만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갹출이므로 늘 달갑지 않다. 전국의 초등학교를 동원한 저인망식 모금이어서 더 거슬린다. 표면상 어른들의 참여를 강제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방법보다 강제적이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가 동정심과 협력, 십시일반의 교훈을 배우는 과정을 훼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본다. '전국의 초등학생X2000원=?'. 대충 계산해 보니,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줘야겠지.
모금 권하는 사회다. 일본의 지진피해자를 돕자고 방송3사가 한달내내 돈을 거둬들인다. 특별생방송도 한다. ARS를 이용한 모금의 경우, 상당 퍼센티지가 통신사 등의 업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론은 없다. 모두가 선량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지만 얼마가 걷혔는지, 어디에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알리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 연말연시에만 나타나는 구세군 역시, 매스컴의 지원을 업고 방방곡곡에서 모금활동을 펼치지만 봄여름가을동안엔 구세군제복을 본 적이 없다. 기독교의 한 종파일 뿐인 구세군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공적인 자선단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오늘도 아고라에서는 유명연예인들을 앞세워서 모금청원이 진행중이다. 그 연예인들은 좋은 뜻에서 무료로 나서줬겠지만, 그들을 내세워 수월하게 모금을 진행하는 측이 원하는 모금액수에 상한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는 각종 성금의 불투명한 집행과정을 추적할 수 없지만, 모금주체가 되는 기관, 단체들의 과도한 열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마더 테레사가 인생을 바친 인도 콜카타의 가난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듯이, 우리나라 빈민들의 가난도, 불우이웃도, 결식아동도, 독거노인의 쓸쓸한 죽음도 별 개선없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들이 소득증대의 수단이니 말이다.
<2011/04/07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