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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2. 23:42 책에서 발췌

The Spiritual Doorway in the Brain, Kevin Nelson, 2010.

 

 

 

 

<218쪽>
1849년 4월 23일 새벽 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의 비밀경찰대 장교가 도스토옙스키를 잠에서 깨워 감옥으로 끌고 갔다. 도스토옙스키의 혐의는 제정 러시아 농노들의 처지를 말과 글로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 집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심문을 받고 투옥되어 두 달 동안 비참하게 지냈다. 12월 22일 아침, 간수들이 비슷한 혐의로 투옥된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줄지어 대기 중인 마차로 데려갔다. 죄수들은 얇은 옷만 걸치고 있었다. 마차들은 30분동안 달린 후에 멈췄고, 죄수들이 내린 곳은 세메노프스키 광장이었다. 무장한 군대가 그들을 둘러쌌고 군중이 모여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광장 중앙에 검은 천으로 장식된 사형대가 새로 설치된 것을 보았다. 

 

성직자가 말없이 죄수들을 사형대 위로 이끌었고, 거기에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수의를 지급했다.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에 십자가를 든 성직자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죄수 한 명 한 명에게 차례로 다가갔다. 죄수들은 성직자가 내미는 십자가에 입을 맞췄다. 확고한 무신론자인 도스토옙스키도 그 절차에 동참했다. 

맨 앞의 세 명이 가까운 말뚝에 묶였다. 두 명은 무언가를 뒤집어썼지만, 나머지 한 명은 사격 자세를 취한 군인들을 노려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다음으로 처형될 세 명 중 하나였다. 그가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할 때, 북소리가 들렸다. 도스토옙스키는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 북소리가 후퇴를 의미하고 자신이 죽지 않을 것임을 즉시 알아챘다. 실제로 그러했다. 차르의 부관이 말을 타고 광장에 들어와 차르의 판결을 전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가짜 처형식 도중 사격 자세를 취한 군인들 앞의 말뚝에 묶였던 한 남자는 도스토옙스키가 '신경 붕괴'라고 묘사한 증상을 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수감 생활로 인해 정신상태가 허약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했다고 썼는데, 나는 그 남자가 실신하기 직전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는 그 때의 정서적인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듯하다.

반면 죽음을 직면한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는 영적으로 각성했다. 그는 감옥으로 돌아오자마자 당국이 그를 시베리아로 내치기 전에 서둘러 형에게 편지를 썼다. 죽음을 대면했기 때문에 삶의 의욕을 새롭게 얻었다고 썼다. 그는 불현듯 황홀한 깨달음에 휩싸이면서 삶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며 우리는 각자 매 순간을 '영원한 행복'으로 만들 힘을 자기 안에 지녔다는 찬란한 진실에 이르렀다. 사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죽음에 직면한 도스토옙스키에게 무조건의 사랑과 용서로 타인을 보듬는 일은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 되었다. 이후 이 확신을 늘 간직한 그는 여러해 뒤에 아내에게 이렇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내 기억에 그날처럼 행복했던 때는 없소."

도스토옙스키는 영적인 부활을 통해 굳게 단련되었다. 시베리아 수감생활을 목전에 둔 그는 '나는 새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썼다. 이후 종교적 신앙은 도스토옙스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의 남은 작가경력 내내 문학적 소재와 예술적 에너지를 제공했다. 가짜 처형을 겪은 지 20년 뒤에 쓴 마지막 소설 [백치]에서 원숙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세메노프스키 광장에서 겪은 시련과 거듭남을 예수를 닮은 주인공 미슈킨 왕자의 눈을 통해 묘사했다. 미슈킨은 비슷한 일을 겪은 한 사내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5분 후면 죽을 운명이었다. 그 5분이 무한한 시간처럼, 엄청난 재산처럼 느껴졌다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 5분 안에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아직 마지막 순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시간을 쪼개면 쪼갤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진다고 그는 느꼈다. 그는 동지들과 작별할 시간 2분을 떼어놓았다. 또 다른 2분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데 할애하기로 했다. 나머지 1분은 주변을 둘러보는 데 쓰기로 했다. 그는 시간을 그런 식으로 쪼갰던 것을 아주 잘 기억했다. 

 

그는 27세의 힘세고 건강한 청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동지들과 작별하다가 한 동지에게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그는 기억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자 홀로 생각하기 위해 준비한 2분이 시작되었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지금 살아있는 자신이 3분 뒤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를 최대한 신속하고 명확하게 깨닫고 싶었다. 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는 이 모든 질문에 2분 내로 답할 작정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의 금박입힌 지붕에서 밝은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그 빛을 분리할 수 없었다. 그 빛살이 자신의 새로운 본성인 듯 했고, 3분 뒤면 자신이 그 빛살 속으로 녹아들 것 같았다."

 


<224쪽>
다른 동물의 안와 앞이마엽orbital prefrontal region 구역이 주로 음식의 쾌락에 반응하는 반면, 현대인의 안와 앞이마엽 구역은 사실상 모든 유형의 쾌락(또는 보상)에 반응한다. 보상시스템은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지녔다. 보상시스템은 초콜릿 중독 뿐 아니라 헤로인, 코카인, 도박 중독의 토대이기도 하다. 

신경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천국에 가거나 깨달음에 이를 때 얻을 보상을 영적 경험 중에 어렴풋이 대면하는 것은 안와 앞이마엽 구역 덕분인 것이 분명하다. 그 구역은 임사체험을, 아니 모든 영적 경험을 가장 중요한 보상으로 만든다. 도스토옙스키는 안와 앞이마엽 구역을 포함한 영적 통로를 통과하여 초월을 경험했고, 그 경험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311쪽>
오래전부터 신경학자들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소설과 자서전적인 글에서 묘사한 그의 황홀경ecstatic 간질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정말로 신과 접촉했다. 그가 내 안으로 왔다. 그래, 신은 존재한다, 라고 나는 외쳤다. 그밖에 기억나는 것은 없다. 당신들, 그가 말한 건강한 사람들은 우리 간질환자들이 발작을 앞둔 순간에 느끼는 행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행복이 몇 초, 몇 시간, 또는 몇 달 동안 지속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를 믿으라. 나는 그 행복을 평생 누릴 기쁨 전부와도 바꾸지 않겠다. 그 행복은 평생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듯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느낀 영적 황홀경이 병에 의해 촉발되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그것이 병이라면 어떨까? 그 결과가, 그 느낌의 순간이, 나중에 건강할 때 기억해내고 분석해보니, 조화와 아름다움의 극치이고, 그때까지 알거나 추측해보지 못한 완전함, 균형, 화해의 느낌과 더불어 생명의 최고 통합에 황홀하고 독실하게 흡수되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이 비정상적인 강렬함이라는 점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2015/04/20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2. 23:40 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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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발을 맞춰 행진하지 않는 것은 다른 북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박자건 얼마나 멀리서 들려오건 자신이 들은 음악에 발을 맞춰라."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57쪽>
절약가로 가장 악명높은 사례로는 버몬트와 뉴욕에서 살았던 여성사업가 헤티 그린(Hetty Green)이 있다. 1916년 세상을 떴을 때, 그녀의 재산은 거의 2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3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 여성은 난방도 하지 않았고 온수도 사용하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검은색 옷만 입었고 속옷은 완전해 해질 때까지 입었다. 오트밀을 먹고 2센트짜리 우표를 찾으려고 밤을 새운 적도 있다. 아들 네드가 어려서 다리가 부러지자 병원 자선병동에 넣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병원에서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리고 아들의 입원을 거부하자 그녀는 분노에 차서 자신이 아들을 직접 치료하겠다고 고함쳤다. 의료처치가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네드는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207쪽>
미국의 대중교통이 항상 무시된 것은 아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경전철과 철도 서비스가 있었다. 대중교통은 값싸고 편리했다.
하지만 1936년에서 1950년 사이에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서글픈 사건인 '미국 최대 전차스캔들'이 일어났다. 제너럴모터스, 파이어스톤타이어, 스탠더드오일, 필립스석유 같은 대기업 이름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비밀리에 조용히 움직이며 디트로이트, 뉴욕, 오클랜드, 필라델피아, 피닉스, 세인트루이스, 솔트레이크시티, 털사, 볼티모어, 시카고, 미니아폴리스,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45개 도시의 전차운영업체를 사들이는 데에 공모했다. 이 컨소시엄은 노면전차인 트롤리의 붕괴에도 적극 나서서 철로를 뜯어내고 전선을 걷어버렸다.
제너럴 모터스와 다른 기업의 연합은 1947년 반트러스트 연방법에 따라 기소되었다. 2년동안 이 공모의 전모와 감춰진 의도는 연방법원에서 완전히 공개되었다. 결국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고 변호사들이 동원되었지만 피고들은 연방법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놀랍게도 미국의 경전철망 붕괴를 비밀스럽게 모의하고 시도한 중역들은 각각 1달러밖에 벌금을 내지 않았다.

<318쪽>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네 행복을 따라가라(follow your bliss)'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20년이 지난 뒤 평생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미국 PBS에서 만든 가장 인기있는 TV시리즈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에 출연해 빌 모이어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이 문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뷰 중 모이어가 캠벨에게 물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도와준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캠벨은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그렇게 느낍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요.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을 정도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길에서 기다리는 행복을 따라간다면 지금의 삶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이 됩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행복이라는 영역에 자리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고 그들은 당신을 위해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따라가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던 새로운 문이 열릴 테니까요."


<2015/03/21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2. 21:37 낙서장

 

 

 

[스코트니어링 자서전]  <124쪽>

 ...... 갈런드기금에서 일한 경험은 개인차원의 자선행위가 얼마나 헛된 행위이며, 더 심하게 말한다면 죄악에 가까운 행위인지를 깨닫게 해준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만일 누군가 배고픔에 시달린다면, 푸짐한 식사 한 끼로 그를 만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행위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또 수혜자는 기생적 생활습관을 얻어 재차, 삼차 구걸의 손을 벌리게 되어 있다. 구걸이 제도화되고, 빈곤에 익숙해지는 악습을 낳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자선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경제적 불공정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눈앞에 닥친 긴급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무조건적인 재정 보조는 수혜자를 그것에 길들게 만들어 결국은 자생 의지를 꺾는 부정적 효과를 기져올 뿐이다. 갈런드기금은 급진적 단체들에게 '자생력'을 부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기금보조는 그 단체들을 영원한 구걸꾼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딸아이 학교에서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비를 모금한다며, CD와 편지지 그리고 돈봉투 달린 홍보지를 가져왔다. CD 화면 속의, 불편한 몸으로 동생들을 부양하는 고아소년에게 편지를 써서 제출하면, 특별히 잘 쓴 사람을 선발하여 봉사의 기회를 준다고 씌여있다. 엄마도 편지를 쓰라고 한다. 작년에는 'OO야, 힘내'하는 식으로 나도 편지를 썼지만 올해는 또 뭐라고 쓰나. 그 아이는 우리의 편지를 읽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작년에도 학교를 통해서 똑같은 단체에 똑같은 식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서 지방으로 전학을 왔어도 다르지 않다.^^ 싫은 티를 내자니 아이로부터 오해를 살까 염려되고, 기꺼이 취지에 따르자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소액을 보내지만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갹출이므로 늘 달갑지 않다. 전국의 초등학교를 동원한 저인망식 모금이어서 더 거슬린다. 표면상 어른들의 참여를 강제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방법보다 강제적이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가 동정심과 협력, 십시일반의 교훈을 배우는 과정을 훼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본다. '전국의 초등학생X2000원=?'. 대충 계산해 보니, 굿네이버스의 구호활동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줘야겠지. 
 
모금 권하는 사회다. 일본의 지진피해자를 돕자고 방송3사가 한달내내 돈을 거둬들인다. 특별생방송도 한다. ARS를 이용한 모금의 경우, 상당 퍼센티지가 통신사 등의 업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론은 없다. 모두가 선량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지만 얼마가 걷혔는지, 어디에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알리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 연말연시에만 나타나는 구세군 역시, 매스컴의 지원을 업고 방방곡곡에서 모금활동을 펼치지만 봄여름가을동안엔 구세군제복을 본 적이 없다. 기독교의 한 종파일 뿐인 구세군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공적인 자선단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오늘도 아고라에서는 유명연예인들을 앞세워서 모금청원이 진행중이다. 그 연예인들은 좋은 뜻에서 무료로 나서줬겠지만, 그들을 내세워 수월하게 모금을 진행하는 측이 원하는 모금액수에 상한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는 각종 성금의 불투명한 집행과정을 추적할 수 없지만, 모금주체가 되는 기관, 단체들의 과도한 열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마더 테레사가 인생을 바친 인도 콜카타의 가난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듯이, 우리나라 빈민들의 가난도, 불우이웃도, 결식아동도, 독거노인의 쓸쓸한 죽음도 별 개선없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들이 소득증대의 수단이니 말이다.

 

 


<2011/04/07에 쓰고 2018/03/22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