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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3. 00:24 영화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영광이고, 이 영화가 나에게까지 도달한 행운에 감사한다.


영화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첫문장으로 시작된다.
"잘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력을 되찾은 후 처음으로 하는 면도. 

아무래도 눈을 뜨고는 잘 할 자신이 없다. 눈을 가린다. 더 잘 할 수 있다. 잘 되어간다. 마리가 면도를 도와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의 각별한 느낌이 떠오른다. 그 느낌이 현재를 채색한다. 창백했던 화면이 따뜻한 색깔로 물든다. 지나간 기억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갈대밭 속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루벤. 
어떻게 보일까. 보이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라보는 이의 지난 경험과 기억이다. 루벤은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고 시력을 되찾자마자 가장 소중한 두사람을 잃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흔한 사람들이 흔하게 보는 '빛'과는 다른 무엇을 보고 있겠지.

 

루벤이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던 이가, 이제 1년이 넘는 혼자만의 여행을 마쳤다.
늘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이가, 이제 다른 사람을 돕고 있다.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었던 이가, 능숙하게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안경을 쓰고 떠나서, 안경을 벗고 돌아왔다.

 

보고 또 보고 또 봤던 도서관 씬.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는 여자와, 세상을 볼 수 없었던 남자. 책으로 살고 책으로 만난 두 사람. 그들의 삶처럼 고즈넉한 도서관에서 책으로 둘러쌓여 다시 만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주옥같은 이 7분여의 클라이막스 어느 부분에선가 나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는 당연히 마리에게 이입되어 가슴이 아팠지만, 루벤의 절절한 그리움 역시 내 것처럼 느껴져서 잠시 감당이 안되었던 것 같다. 이보다 더 섬세하고 완벽할 수 있을까.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뒤늦게 마리의 편지를 읽은 루벤의 한 마디. 마리는 루벤이 자신의 외모를 보는(아는) 것을 원치 않았고, 눈을 뜬 루벤과 함께하는 자신을 세상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루벤은 점차 마리가 '주관적으로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세상은 '루벤이 아깝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테니까.

 

루벤은 기억 속에 각인된 상상의 마리를 현실의 마리로 교체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루벤은 뭔가 깨달은 것 같고 편안해 보인다. 언제나 겨울이던 그들의 배경이 드디어 봄으로, 거의 흑백에 가깝던 화면이 천연색으로 바뀌어 있다. 루벤은 '빨간색은 입술'이라던 그의 말 만큼이나 붉은 입술로 미소짓는다. 아름답다. 누군들 괴로운 경험을 하고싶겠나마는 그것을 통과함으로써 뭔가를 배우고 나면 경험은 값진 것이 된다. '고난은 불행이 아니다.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라는 말처럼.

 

나는 루벤이 다시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랬다면 굳이 눈을 가릴 필요도 없었겠지). 시력은 그렇게 쉽게(고드름 따위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리와의 좋았던 시간들을 재현하고 싶었던 철없는! 청년의 충동이었다고 믿고 싶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해피엔딩을 보고 싶었지만... 마리의 말처럼 삶은 '동화'가 아니다. 각자의 진도에 따라 자기만의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루벤은 스스로 책을 읽을 것이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삶의 봄과 여름을 수놓아 가겠지. 

'진실한 사랑은 영원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마리의 편지 글귀는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같다. 그것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어떤 순간에 그저 '느껴질' 뿐이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나 온세상에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난 에모토 마사루의 작업을 알게 된 후 함박눈을 볼 때마다 '저건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사랑이야'라고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용감한 왕자가 목숨을 건 모험 끝에 공주를 구한다거나, 소년이 기나긴 여정 끝에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반대의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눈의 여왕]이 성별이 바뀐 성장소설이라는 걸 알았다. 소년들을 부추기는 '용맹한 모험'과 '돌아온 영웅'의 이미지는 '구출을 기다리는 예쁘고 불쌍한 소녀'의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불필요한 손실과 고통을 생각하면 [눈의 여왕]은 정말로 특별하다. 카이를 위해 멀고 험한 길을 떠나서(가는 곳마다 친구를 만들며) 결국 구출에 성공한 게르다는 '그와 결혼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그저 이전의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온다. 일면 허황되고 폭력적인 영웅신화와는 대조적으로 게르다는 카이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따뜻한 감수성을 되살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회복시켰을 뿐이다. 아, 안데르센은 천재다.

 


"영원히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 괴테

 

 

 

 

<2016/05/14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3. 00:21 영화

 

 

누구의 추천도 없이 그냥 어쩌다가 보게 된 영화. 이래저래 '지루한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영화인데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봤다. 내가 나이먹고 생각이 많아져서 '지루함'을 잘 못느끼는 경지로 가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ㅋ
 
영화 참 별나다. 영국북부의 언덕에 자리잡은 주유소가 배경의 전부이고, 등장인물은 총9명에 사슴 몇마리. 발랄한 캐릭터도 없지만 악역도 없다. OST도 없다. 음악이라고는 셸이 요리하고 샤워할 때 불렀던 노래와 엔딩에서의 라디오 곡이 전부다. 모든 장면이 롱테이크처럼 느껴지고 줄거리 역시 한줄요약 가능할 정도지만 그렇게 연출한 의도를 알 것도 같다. 

 

 

황량한 고지대 길가에 서있는 주유소. 밤과 낮이 교차할 뿐 매일같이 바람만 부는 그 곳에 말없고 우울한 아빠와 성년을 앞둔 셸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집나간' 셸의 엄마를 찾고싶어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것 같다.
 
셸은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곧이어 떠나는 그들을 지켜본다. 필요에 이끌려 멈춰섰다가 필요가 충족되면 곧 떠나는 사람들, 간혹 아는 사람이 주유를 하러오면 몇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손님은 떠나간다. 그렇게 볼일 끝나면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당연한 모습이 매정하게 보인다. 떠나가서는 13년째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설정 때문인가. 바라보는 나마저 '분리불안'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느려터진 전개 덕분이었을 것이다. 
 
장성한 딸과 외로운 아버지 사이의 복잡미묘한 감정들, 아빠는 상실감과 책임감과 외로움이 범벅이 된 가엾은 캐릭터에, 간질까지 있어서 원래는 딸의 '보호자'였겠으나 점차 딸에게 부담이 되어가고 있다. 서로에게 '보호자'인 부녀. 셸에게 있어서도 아빠는 유일하게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단 한사람이다. 애써 밝게 살아보려고, 사람들과 어울려보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 
 
이 영화는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같다. 딸이 떠났을(?) 때의 아빠의 고통, 아빠가 떠났을 때(!) 셸이 느꼈던 고통이 전해져와서 나도 아팠다. 셸의 아빠는 딸 없이 살아갈 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앞서 세상을 떠나버린다. 셸 역시 혼자 남겨지느니 아무데로나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짐가방을 챙길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 떠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먼 길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안그렇다. 어디로 가서 누구와 지내든 셸은 분리가 두려워 해맑게 웃기 어려울 것이고, 헤어지지 않으려고 (아빠에게 그랬듯) 제손을 타인의 입에 물려줄 것이다. 두려움의 기억은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낯선 배우들 뿐이라서, 영화가 아닌 누군가의 진짜 현실을 본 것만 같다. 세상의 '셸'들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한다. 아픈 날들을 딛고 해맑게 웃으며 살 수있기를 기원한다.

 

 

 

 

 

<2014/04/15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
2018. 3. 23. 00:17 책에서 발췌

- 데이비드 R. 로이, 2008

 
<60쪽>
20세기 들어 유명한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대중매체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폭넓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우리의 집단신경체계로서 작동하고 있는 잡다한 전자매체에 연결된 채로 보내고 있는데, 그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명성에 대한 욕망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사실을 더 이상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중략....... 
 
이제는 대중매체가 무엇이 실재하고 무엇이 실재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문화에서, 익명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아무런 존재도 아님을 의미한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우리가 아무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결핍된 존재감이, 실재하는 사람들 곧 자기들의 얼굴로 스크린을 도배하고 신문과 잡지에 계속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레오 브로디는 자신의 책 [명성의 광기]에서 그 점을 잘 요약하고있다. "유명인들이 갖고 있는 매력의 본질은 이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우리보다 더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텅 빈 물리적 실재는 그 불멸의 실체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최선의 길, 아니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스스로 정당화하는 명성이 더 실재가 되는 길이라면,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실재가 되는 한가지 방법이다. "내 이름이 신문에 나거나 국민적인 관심을 받자면 도대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한 연쇄살인범은 이런 내용으로 경찰서에 편지를 보냈다. 여섯번째 살인을 범하자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매스컴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고 그는 불평했다. 최근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잡이 조승희는 쉽게 잊히지 않을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다. 브로디에 따르면 그런 명성은 "그가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것을 보장해 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마침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 덕분에 당신은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living death)인 무명(無名)에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기술이 덜 발전한 중세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인 무명'은 문제가 아니었다. 명성이 아주 드물었던 데다, 소수의 지배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유명해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성은 결핍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시인 롱펠로는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떻게 그가 죽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멸의 존재로 살아있는데". 프로이트는 불멸을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71쪽>
한 사내가 죽어서, 눈을 떠보니 온갖 편의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흰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당신은 뭐든지 선택할 수 있소. 여기에는 온갖 먹을거리, 갖가지 즐거움과 놀이가 있소." 
사내는 기뻤다. 그는 여러 날 동안 갖가지 산해진미를 맛보고 이승에서는 꿈만 꾸던 것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모든 일에 물린 사내는 안내원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지쳤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요. 혹시 할 일을 줄 수 있나요?" 안내원은 슬프게도 머리를 가로젓고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가 해드릴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당신이 할 일은 없습니다."
이에 사내는 대답했다. "그럼 좋습니다.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종업원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38쪽>
20세기에 적게는 1억5백만명, 많게는 1억7천만명이 전쟁에서 살해당했는데, 피해자의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다. 2005년에는 무기거래를 포함한 범지구적 군사비가 1조달러를 상회하면서 사상최고액을 기록했다. 그 중 절반 정도는 미국 한 나라가 지출했다. 
........중략........
우리나라(미국)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135개국에 적어도 737개의 해외 군사기지를 유지해야 한다(2005년 공식통계)는 주장은 기이하게 들린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머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우리는 다른나라에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의 비축량을 유지하고,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매년  180억달러를 들인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비축한 핵무기는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15만개를 합친 것에 해당한다고 한다.(1997년 이후 미국은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23차례의 미임계 핵실험을 실시했다) 그 핵무기의 2~3%만 사용해도 우리가 아는 이 문명은 끝장이 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무기를 보유해도, 우리는 결코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마치 GNP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148쪽>
불교 수행은 주의(attention)가 최소한도로 분산된 명상이미지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그런데 IT혁명은 PC, 인터넷, 이메일, 휴대전화, 태블릿PC 등을 통한 끊임없는 연결을 권장하고 있고, 이런 연결은 우리를 명상의 반대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과 언제든 연결 가능한 수많은 기회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정작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는 주의를 적게 기울이는 게 아닐까?
MP3플레이어가 우리의 음악감상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각해보라. 1세기 전, 당신은 현장의 청중 가운데 일부였다. 그리고 일단 그곳에 갔다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차분히 앉아서, 연주되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팟을 들고 돌아다니는 오늘날에는 어떤 곡을 감상하기로 결정했더라도 그 곡을 끝까지 들으리란 보장은 없다.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마음대로 버튼을 눌러 플레이되고 있는 음악을 즉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대부분에게 가장 위험한 '의식의 덫(awareness trap)'은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정교한 광고를 필요로 하는데, 광고는 우리의 의식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한다. 오늘날 경제가 해결해야 하는 중요과제는 생산이 아니라, 상품을 사고 또 사면 고(苦)가 해결되리라는 확신을 우리가 계속 품도록 하는 것이다. 광고계의 선구자적인 중역 레오 버넷은 좋은 광고는 정보를 유통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고 말한다. "광고는 대중의 마음에 욕망과 신념을 심어준다" 그 결과는 광고주가 돈을 벌어들이는 것 말고 하나 더 있다.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비사회에는 필연적으로 두 부류의 노예가 존재한다. 중독의 죄수와 선망의 죄수이다" 즉, 욕망하는 상품을 가질 수 있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은 사로잡혀 있다.
 
최근에는 주의(attention)가 팔아먹어야 할 기본 상품이 되었다는 점이 더 분명해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오래된 격언은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주의가 돈이다". 조나단 로우의 글 [두뇌를 잡아라(Carpe Callosum)]에 따르면, 신경제의 핵심자원은 그들이 아닌 우리가 제공한다. 이를 표현하는 신조어가 '마인드셰어(mindshare,마음점유율)'이다. 
 
16~18세기 영국의 인클로저(사유화) 운동은 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지주들은 양을 키우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을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에서 쫒아냈다. 로우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궁극적인 사유화는 인지적 공유지(cognitive commons), 곧 일상을 둘러싼 정신적 분위기의 사유화"인데, 신속하게 전개된 이 사유화는 이제 너무 확산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 전에는 텔레비전 쇼에서 광고주의 후원을 받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상품 진열이 쇼 전체(그리고 많은 영화)를 광고로 만든다. 보석회사 불가리에서 후원한 페이 웰든(Fay Weldon)의 소설에는 불가리 상품에 대한 언급이 30차례 이상 나온다. 4세 아동 절반이 자기 이름을 모르는데, 3세 아동 2/3가 맥도날드의 황금빛 아치를 알아본다.
 
"주의경제(attention economy)가 우리를 채굴하는 방식은, 산업경제가 지구를 채굴하는 방식과 대체로 비슷하다. 처음에는 무능과 수요를 캐간다. 상호작용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오락에 대한 수요로 변해야 한다.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능력은 슬픔을 덜어주는 상담이나 프로작(Prozac)에 대한 수요로 변질된다. 소비경제의 진보는 우리 자신의 줄어듦을 의미하게 되었다."
 
<223쪽>
나는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 수년동안 가르친 적이 있다. 좋은 동료들을 몇 만났지만,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일본의 교육제도를 혐오하게 되었다. 일본의 교육제도는 차라리 시험제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시험이 모든 교육과정의 유일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배우는 것은 공부를 미워하는 일이다. 일본에서 공부란 주로 선다형 문제를 풀기위한 암기이다. 시험에는 대개 작문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학생들은 애써서 글쓰기를 배울 필요가 없으며, 이는 학생들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에 갈 때 쯤이면 학생들 대다수는 기능적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기진맥진해 있다. 그리고 대학생활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새롭게 성장하는 계기가 아니라 느긋하게 쉬면서 즐기는 시간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사기준은 상당히 낮아서 낙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낙제는 대학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한 제도가 수백만의 똑똑한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일본사회 전체에 주는 결과는 비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바꾸기가 쉬울 수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대학입시에 모여있고, 각 대학은 제각각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모든사람이 받아들이는 엄격한 대학서열도 있다. 도쿄대학이 맨 앞에 있고 그 다음이 교토대학이며, 다른 대학들도 이런 식으로 다 정해진 순서가 있다. 그래서 10여개의 최고대학들이 입시정책을 바꾸면 다른 대학들도 곧 할 수 없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 교육제도를 감독하고 있는 정치가와 관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의 제도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단기 입시학원에서는 현행 제도가 큰 돈이 된다고 여긴다. (한국과 많이 비슷한 듯^^)

 

 

<2016/01/19에 쓰고 2018/03/23에 옮겨 옴>

posted by moo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