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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2. 01:20 낙서장

 

 

 

드디어 완경에 도달했다. 35년 이상 나를 구속했던 불편, 걱정, 통증 그리고 악몽과 임신의 두려움에서 놓여났다. 생리月經를 '마법에 걸렸다'고 표현하는 건 좀 의아하지만 그게 저주의 마법이라면 맞는 말이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생기 넘쳐야 할 시절을 시들시들한 몸으로 살았다. 저혈압과 탈모, 잇몸병, 피부질환, 변비, 입병...과 30여년을 함께 했다.

 

내 헤모글로빈 수치는 8g/dL 정도를 유지했는데 더 안좋을 때는 시력과 청력이 희미해지면서 의식을 잃곤 했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한동안' 다녀온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가끔 안전한 곳에서 일부러 어지러움을 유도하기도 했었다.  

 

혈압이 85/45까지 떨어져도 정신줄을 잡을 수 있다는 것, 70일 동안 피를 흘려도 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빈혈의 이해]라는 책에서 '매달 월경기간에 흘리는 혈액은 평균 40ml 정도'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 당장 생리대를 가져다가 물 40ml를 부어보고 웃었다. 장난하나.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에서 '한달에 약 5일, 큰 숟가락으로 3개 분량(25ml), 1년으로 치면 300ml...'라는 말을 들을 때는 울었다. 화면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려가던 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철결핍성 빈혈은 단지 과다출혈에 따른 '기력 저하'이고 이제 그것과 작별이다.


언젠가 생리컵을 떨어뜨려 타일 위로 쏟아진 피를 본 적이 있다. 그 강렬한 색감과 피로 그려진 그림의 크기에 놀랐고 '덱스터' 생각이 났다. 여자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쉬쉬하며 피묻은 손을 닦고 피묻은 옷을 빨면서 덱스터처럼 산다. 흔히 '피'는 섬뜩한 폭력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숨기고 감춰야 하는 게 되었겠지만, 본래 피는 선하고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나는 시골에서 "예전에 며느리들은 애 낳은 다음날에도 밭에 나와 일을 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나는 그 이야기의 의미를 아이를 낳고서야 알았다. 그 여자는 밑이 빠질듯한 통증과 현기증을 견디며 발 아래 흙을 피로 적셨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여성의 피'에 대한 우리사회의 터부와 무지가 개선되기를 소원한다. 


인간여성이 임신능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길게는 30년 이상까지 생존한다는 사실이 진화생물학계의 미스터리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남성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동물에게 생식능력의 상실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인간여성은 예외다. 그러니 남성적 사회가 '폐경한 여성은 더이상 여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건 뉘앙스에 상관없이 옳은 말이다. 지구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동물은 가본 적도 없는 낯설은 존재상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으니 말이다. 어쩌면 인간여성은 생식력 없이도 잘 살 수 있는지를 실험중인 특별한 종이거나, 번식 말고도 뭔가 세상에 보탤 게 있는 희귀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만화성경을 읽다가 '수염이 북실북실한 할아버지'로 그려진 야훼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엄마, 하나님이 남자였어요? 이상해요." 그 말은 내 정신을 환기시켜 주었다. 우리가 신을 남성으로 여기게 된 것은 물리적 힘을 우월성으로 보는 편견 즉, 마사 스타우트의 말처럼 '두려움을 존경으로 착각'하는 인간적 취약성 때문일 수 있다. 신은 여자도 남자도 아닐테지만, 굳이 인간성을 투사하고 싶었다면 '잉태하여 낳고 보살피는' 여성성과, '개척하고 건설하는' 남성성이 조화된 이상적인 신을 상상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들면서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남자는 여성적으로, 여자는 남성적으로 변해간다고 한다.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우리는 지상에서 번성하면서 남녀라는 차별성으로부터 인간이라는 동질성으로 향하는 존재, 그리고 영겁永劫의 세월을 통과하며 인간성에서 신성으로의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인 걸까. 그런 것 같다.

 

출혈이 사라지니 기운이 살아나는 것 같다. 거짓말처럼 피부트러블이 사라지고, 늘 흐릿했던 입술에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며 '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고 혼잣말을 해본다. 혈압도 정상치에 근접했고, 입병도 안생긴다. 샤워 후에 주울 머리카락 뭉치가 없다는 게 제일로 좋다. 아, 저주의 마법이 풀렸구나. 하지만 인생을 1년에 빗댄다면 나는 철모르던 1, 2월을 제외하고 봄과 여름을 어리버리하며 보냈다. '어리바리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정신이 또렷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어 몸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다'라고 나온다. 뭔가 적절하다.ㅋ 나는 하루 중 저녁을 좋아하고, 깊은 밤에 혼자 깨어있기를 좋아하고, 봄보다 가을을, 새해보다 연말을 좋아한다. 이 삶에서도 남은 늦여름과 가을 겨울이 유복했으면 한다. 

 

돌아보면 사실 축복의 마법이기도 했다. 체력이 좋았다면 땡볕에서 뛰어노는 친구들과 떨어져 빈 교실에서 '책이나 읽으며' 어린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혈 덕분에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다닐 에너지가 부족해서 다행이었다. 안그랬으면 뭔가에 잘 꽂히고 잘 미치는 나의 감정적 특성으로 인해 훨씬 더 높은 풍파에 휩쓸려 왔을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속 노인의 아들처럼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면서 '읽고 쓰고 감상하고 궁리하는' 차분한 취미를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한다. 모든 것이 다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한결 가뿐한 몸으로, 한결 쉬운 방식으로 이제는 좀더 '관찰자'로 살아보고 싶다. 반신半神demigoddess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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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레시아스의 역사]  - 주경철, 2002

 

<5쪽>

 

어느 날 올림포스 산정에 있는 신들의 궁전에서 제우스와 헤라는 흥미 있는 논쟁을 했다. 사랑을 할 때 남자가 더 행복한가, 여자가 더 행복한가? 남성신인 제우스는 사랑을 할 때 여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여성신인 헤라는 남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두 신이 아무리 오래 논쟁을 해도 끝내 결판이 나지 않자 제우스는 이런 제안을 했다. 지상에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도 살아본 테이레시아스라는 인간이 있으니 그를 불러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

 

테이레시아스는 원래 평범한 남자였다. 어느 날 그는 산길을 가다가 굵은 뱀 두 마리가 서로 엉켜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들고 있는 막대기로 뱀들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러자 뱀들은 신통력을 발휘해서 테이레시아스를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몸과 마음 모두 완벽한 여자가 된 테이레시아스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7년을 살았다.

어느 날 다시 산길을 가던 테이레시아스는 또 뱀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도 그(녀)는 막대기로 그 뱀들을 억지로 떼어놓았고 그러자 이번에는 뱀들이 그를 다시 남자로 만들어 버렸다. 테이레시아스는 인간 중에 유일하게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본 사람이 된 것이다.

신들 앞에 불려온 테이레시아스에게 제우스가 물었다. "그대는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도 살아보았으니 알 것이다.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과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행복했는가?" 이에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이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보다 아홉 배 더 행복했나이다."

 

 

 

"대자연은 형상(몸)에 나를 깃들게 하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 장자

夫大塊 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우리는 젊을 때 배우고 나이들어 이해한다."   - 마리 폰 에브너 에셴바흐

 

 

 

posted by mooncle
2023. 1. 24. 16:41 책에서 발췌

 

 

<34쪽>

인류의 고통을 사탄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사탄 또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라서, 그의 능력은 하나님이 암묵적으로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아담의 원죄'라는 설명으로써 인류의 고통을 인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같은 처지이다. 하나님께서 정성껏 빚은 창조물이 괘씸하게도 그 첫 번째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연히 하나님도 이 문제에 관여되어 있다고 봐야 합당하다.

 

 

<75쪽>

스티븐슨은 추적 조사를 통해서 (전생을 기억하는) 이 아이들의 향후 인간관계, 학업, 직업적 능력, 행복도가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했다. 대체로 보아, 자발적인 전생 기억은 당사자에게 짐도 아니고 자산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드물게는 현생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수도 있다. 아동심리요법가들은 '성인이었던 기억'이 아동기를 침범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발달장애와 병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임상심리학자인 헬렌 웜바크는 [전생체험Reliving Past Lives]이란 저서에서 두 가지 사례를 짧게 소개한 바 있다.


극도로 내향적이었던 린다Linda 라는 다섯 살짜리 아이였다. 린다는 모든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거의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의 자폐증을 나타냈다. 흥미롭게도 린다는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높은 수준의 계산과 읽기 능력을 보였다. 그런데 린다는 놀이치료 중에 웜바크 박사에게 반복적으로 젖병을 물림으로써 자신이 현재 자신의 상태 무력하고 수동적인 어린아이의 모습 - 를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린다는 웜바크와 역할을 바꾸어서 마치 웜바크를 무력한 아이처럼 대했다. '어린아이'라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웜바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린다의 치료는 빠른 효과를 보였다. 마침내 린다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평범한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대신 린다는 읽기와 계산 능력을 잃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자기 이름을 쓰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리고 가족이 곧 이사를 가는 바람에 웜바크와 연락이 끊어졌다. 웜바크는 린다가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기의 몸을 가진 현생을 거부하고 전생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린다는 치료를 통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 후로 전생에 대한 집착이 멈춤과 동시에 전생의 능력도 상실했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웜바크는 제멋대로 구는 과잉행동을 보이던 피터Peter라는 아이도 만났다. 피터는 웜바크에게 야단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경찰관이었던 전생에 대해 털어놓았다. 피터는 흡연이나 야구처럼 전생에 좋아했던 일들을 즐길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당황한 부모가 피터로 하여금 전생 이야기를 떠들지 못하도록 억압해왔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피터의 상태는 린다와 달리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도록 호전의 기미가 없자 부모는 치료를 중단해버렸다.

심리학 분야에서 이런 사례들이 보고되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윤회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계속 쏟아져나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윤회의 증거가 충분히 발견된 만큼, 심리적 장애증세를 보이는 아이들 중 일부가 전생과 현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발적으로 떠오른 전생의 기억이 아이들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그것을 억누르거나 비웃지 말아야 한다. 어떤 문제든 공론화될수록 더 쉽게 풀리는 법이다.

 

 

<91쪽>
다음은 1985년에 발간된 스타니슬라브 그로프 박사의 [뇌를 넘어서Beyond the Brain]에 소개된 사례이다. 그로프의 환자 타냐는 34세의 교사이자 두 아이를 혼자 기르는 이혼녀였다. 타냐는 우울감, 불안, 극심한 피로 탓에 정신요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신체적인 문제라고만 여겨졌던 그 증세들에 대한 예상치 못한 해결책이 세션 중에 발견되었다. 

"타냐는 지난 12년간 만성 축농증으로 고생해왔다. 결혼 직후부터 시작된 콧속 문제는 그녀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혀왔다. 머리가 아프고, 뺨과 입가가 쓰리고, 열이 나고, 콧물이 쏟아지고, 재채기가 터지고, 숨이 막혔다. 그녀는 요란한 기침과 함께 잠을 깨기가 다반사였고, 어떨 때는 그 증세가 서너 시간씩 지속되기도 했다. 그녀는 알레르기 검사를 수차례 받았고, 전문의로부터 항히스타민제, 항생제, 멸균수 코세척 등의 처방을 받았다. 그 모든 치료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 의사는 수술을 권했고, 타냐는 그것을 거부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탄생과정을 재체험하는 세션 도중에 머리가 짓눌리고 조여오고 숨이 막히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 느낌이 자신의 축농증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그 느낌은 더욱 증폭되었고, 출생과정의 경험임이 분명한 여러 단계를 통과한 끝에 그녀는 전생으로 여겨지는 기억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압박감, 짓눌림과 숨 막힘이 물속에 빠진 상황으로 변모되었다. 타냐는 자신의 몸이 널판에 묶여 있고,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물속으로 서서히 밀어넣고 있다고 느꼈다. 울부짖고, 헉헉거리고, 콜록대고, 엄청난 양의 콧물을 쏟는 등의 격렬한 반응을 보인 후에야 비로소 타냐는 전생의 상황과 장소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살던 어린 소녀였는데, 비범한 영적 경험을 많이 한 탓에 이웃들로부터 마녀로 낙인이 찍혔다. 어느 날 밤 마을사람들은 그녀를 근처 자작나무숲으로 끌고 가서 널판에 묶어 차가운 연못에 거꾸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밝은 달빛에 비친 가해자들의 얼굴들 속에 현생의 아버지와 남편이 끼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현생의 많은 요소들이 바로 이 장면의 충실한 재현임을 깨달았다. 아버지, 그리고 남편과의 유별난 관계를 비롯한 현생의 여러 측면들이, 아주 깊은 부분까지 홀연히 이해가 되었다."

그로프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그녀만의 주관적 경험인 만큼 윤회의 증거로 여겨지거나 축농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를 알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이 경험 후에, 그녀를 12년간 괴롭혀왔고 의사들도 심각한 난치병으로 인정했던 그녀의 축농증이 씻은 듯 나아버렸기 때문이다." 타냐의 사례는 전생퇴행 요법들이 밝혀낸 공통된 패턴, 어떤 문제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신체적 상처, 감정적 상처, 특정한 사람들, 특정한 장소 등이 마치 매듭처럼 엮인 채로 전생으로부터 현생으로 넘어온다. 따라서 가장 깊숙한 차원에서 치유가 이뤄질 때는 당사자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인간관계까지 함께 치유된다.


'환기' 전생 기억들은 대부분 검증하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례가 검증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로프 박사는 [나를 발견하는 모험The Adventure of Self-Discovery]에서 전생 기억의 세부내용들이 나중에, 그것도 매우 특별한 계기로 실제사건으로 확인된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이 사례는 전문을 소개할 가치가 충분하다.

당시에 칼은 프라이멀Primal 요법을 통해 출생과정의 여러 측면들을 재체험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시대의 외국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극적인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강렬한 감정과 육체적 감각이 포함되었고, 그것들이 자신의 인생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장면도 이번 생의 것은 아니었다. 터널과 지하창고, 병영, 두꺼운 벽, 성벽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이 모든 것이 바다가 보이는 바위 위의 요새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에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거기에 뒤섞였다. 병사들은 스페인 출신 같은데 장소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같아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요법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좀더 극적이고 복잡해졌으니, 격렬한 전투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장면들이 자주 나타났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칼 자신은 사제였는데, 어느 시점에서 성서와 십자가에 관련된 가슴 뭉클한 심상이 떠올랐다. 이때 그는 자신의 손에서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보았고 거기에 나타난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림에 솜씨가 있었던 칼은 이런 장면들을 회화로 표현해 나갔다. 그리하여 일련의 스케치와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인 지두화(指頭畵:손 끝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요새의 경관과 살육 장면들, 그리고 칼 자신이 영국병사의 칼에 찔려 성벽 밖으로 떨어진 뒤 바닷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이 중에는 반지를 낀 그의 손을 그린 것도 있었는데 그 반지에는 사제 이름의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단편적인 장면들을 연결하여 이야기를 채워나가면서, 칼은 그것들과 현생의 삶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감정적, 심리적 문제와 대인관계의 갈등이 이 기이한 전생의 기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칼은 아일랜드에 가서 휴가를 보내고 싶어졌고, 이것이 의문 해결의 전환점이 되었다. 돌아온 뒤에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관찰하다가 똑같은 경관을 11번이나 찍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일랜드 서쪽 바닷가의 그 경관에 특별히 관심이 끌렸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칼은 지도를 보고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었는지를 계산해본 결과 그의 주의를 끈 장소가 '둔 안 오르'(황금 요새)라 불리는 옛날 요새의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프라이멀 요법 중에 겪은 체험들과 이 장소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칼은 '둔 안 오르’의 내력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했다. 놀랍게도 그는 월터 롤리(Walter Raleigh/1552-1618, 영국의 군인, 탐험가이자 작가) 시대에, 스페인군이 그 요새를 점령했다가 곧 영국군에게 포위당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터 롤리는 스페인군에게 성문을 열고 영국에 항복한다면 요새 밖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페인군은 이 조건을 받아들여 항복했지만 영국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요새 안으로 들어온 영국군은 스페인군을 무자비하게 죽여 성벽 밖의 바닷가나 바닷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칼은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서 힘겹게 끄집어낸 장면들의 사연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서관의 장서들을 뒤적이던 그는 '둔 안 오르 전투'에 관한 특수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스페인 병사들과 함께 온 사제가 있었는데 그도 병사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들은 칼이 자신의 심상 속에서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보고 스케치했던 글자와 같았다. 


환기된 전생기억에 대한 논의에서 헬렌 웜바크 박사의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연구는 개별적 사례 중심의 연구들과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전생체험Reliving Past Lives]이라는 책에서, 수년에 걸쳐 무려 750여 명의 내담자에게 최면퇴행을 반복 시행하여 얻어진 두 가지 장기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그녀는 최면퇴행을 통해 한 개인이 여러 전생을 기억해내는 동안 드러나는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대신,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세부정보를 풍부하게 수집하고자 했다. 

 

그녀는 피험자들의 체험이 자신의 암시에 의해 특정 시대나 장소로 유도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면서, 열 명에서 열두 명 사이로 구성된 집단을 대상으로 전생퇴행 최면을 실시했다. 그리고 최면이 끝나면 곧바로 질문지를 주어 최면 상태에서 떠올린 전생의 자기 모습과 그 시대상에 대해 답하도록 했다. 

 

당신은 남성이었습니까, 여성이었습니까? 당신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당신의 사회적 신분은 어땠습니까? 당신은 어느 나라에 살았고, 그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당신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그 옷은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습니까? 당신은 어떤 음식을 먹었습니까? 당신은 어떤 도구들을 사용했습니까? 당시에는 어떤 돈이 통용되었습니까? 당시에 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고, 또 사제들의 행태는 어떠했습니까? 당시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신앙생활 등은 어떠했습니까?......

 

이렇게 수만 건의 정보를 수집한 후에, 그녀는 피험자들이 보고한 내용과 실제 역사가들이 추적해낸 내용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억'이 정말로 역사적 사실과 꼭 들어맞을까? 틀림없이 그 시기에 그곳에서 살았다는 그들의 주관적 확신은 일리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일까?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조사했지만, 헬렌의 피험자들이 보고한 기억은 정말로 역사가들의 추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들은 당시의 옷차림, 화폐, 그릇, 식생활, 사회생활 등을 세부사항까지 맞췄을 뿐 아니라 통계적으로 봤을 때 당시의 상중하 신분 계급의 인구수 비례와도 맞아떨어졌다. 헬렌의 피험자들은 과거 시대를 정확히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이 밝혀낸 정보들을 더욱 흥미롭게 채색하기까지 했다.


헬렌이 비교분석한 수많은 역사적 패턴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가장 단순한 정보, 즉 각 시대의 남녀 인구비율이었다. 놀랍게도, 어떤 시대를 대상으로 하든, 험자들이 기억해낸 전생의 성별계치는 오차 1퍼센트 이내의 50:50이었다. 다시 말해서 전생 기억속의 남녀 비율은 어떤 시대에서든 기이할 만큼 균등하게 나타났고, 그것은 피험자들의 실제 남녀 비율과는 무관했다. 특정 시대의 전생을 기억해낸 '피험자들의 남녀 비율'이 때론 70:30까지 기울어져도, '그 전생에서의 남녀 비율'은 거의 정확한 반반이었다. 오직 전쟁 중인 시대와 장소에 해당하는 전생들만이 예외였고, 이 또한 당시엔 남성보다 여성의 인구가 더 많았다는 역사가들의 주장과 일치했다.

헬렌의 연구는, 최면을 통한 전생퇴행은 나폴레옹이나 클레오파트라처럼 유명한 인물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기 일쑤라는 세간의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사람들은 최면상태에서 떠올린 '전생'이란 대개 텔레비전이나 책으로 접해온 공주, 기사, 장군, 혁명가로서의 삶 또는 어떤 낭만적인 장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렌의 피험자들이 떠올린 전생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팍팍한 삶,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피험자들 중에는 자신의 전생을 역사적 유명인사로 보고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윤회를 믿는 데 대해 지성인들이 찜찜한 기분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   - 이안 스티븐슨

 

 

posted by mooncle
2023. 1. 14. 22:07 영화

 

 

 

주인공 샘은 여러 번 죽는다. 죽을 때마다 '의식意識Consciousness'은 몸에서 빠져나와 방금까지 입고있던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 본다.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처럼, 몸이 없는데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의식은 주변을 살피며 헬륨풍선처럼 둥둥 떠오르다가 허공에 나타난 '빛의 통로'로 향한다. 천천히 그 눈부신 빛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방향을 틀어 아래로 내려간다. 어떤 미련이 매 번 그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미련을 해소하려면 지상의 삶으로 복귀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 새로운 몸에 안착하면 이전 몸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뜻한 만큼 잘 풀리지 않고 결국엔 업데이트된 미련을 안고 죽는다. 다시 또 다시 '끝내기 위해' 복귀한다. 이것은 첩보영화를 연상시킨다.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으니 [미션: 임파서블]같은 시리즈일까. 훈련된 요원이 '임무 수행'을 위해 현장에 투입된다. 아무리 죽을 고생을 하며 뛰어다녀도 지구의 평화는 요원하며 악당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재충전을 위한 짧은 휴식이 끝나면 다음 임무를 위해 하강!한다. ...... 이 영화는 기나긴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세월, 아니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01:16:22 

"이 사진 기억 나. 사라가 찍은 유일한 사진이야. 사라가 (죽기전에)물 속에서 뭔가 봤지. 빛이랬어. 나도 오늘 빛을 봤어. 타일러가 날 죽이고 제이를 죽였을 때... 내가 죽을 때마다!Every time I die"

01:17:42   

"난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샘은 갑자기 닥친 죽음 이후, 뭔가를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면서 몇번 더 죽음을 경험한다. 죽을 때마다 '할 일이 더 있다'는 집착이 그를 몸이라는 속박 속으로 밀어넣고, 이 반복이 그를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그는 알아낸다. 자신이 죽을 때마다 '빛'을 본다는 사실! 그리고 몸은 죽지만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임을!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막바지에 그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여동생 사라를 마주하게 된다.  

 

00:14:27

[나는 사라의 오빠다. 사라를 영원히 지켜주기로 약속한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사라가 무섭거나 외로울 때면 여기에 오면 된다. 나는 항상 사라를 보호하겠다.](샘이 어릴 때 사라에게 써준 쪽지)

 

사라는 6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뒤,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처럼 '부서진 집'을 버리고 형제의 집으로 (들어)갔다. 너무 어렸던 탓에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더이상 사라일 수 없는지, 왜 엄마 아빠가 자신의 옷과 인형을 불태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와 사회는 '샘'이 되라고 강요하면서 글과 셈을 가르치고 원래의 정체성을 다 버리게 했다. '너는 누구니?'라는 물음에 '나는 9살 샘이고, 샘은 사라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대답하도록 거의 세뇌했다. 의사는 '넌 결코 사라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라는 깊이 상처받은 채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이른바 '내면아이inner child'가 되었다.

 

샘은 시간을 거슬러 사라의 경험을 경험한다. 그 앞선 경험이 이후의 경험에 미친 영향을 통찰하게 된다. 구하지 못한 인명, 치유되지 않은 슬픔과 죄책감, 지키지 못한 약속, 거절당한 사랑... 그리고 떨쳐낼 수 없었던 사진꾸러미, 그를 괴롭혀 온 간헐적 기억상실과 두통... 그 모든 고통의 인과因果를 이해!하게 된다. 바로잡을 잘못 같은 건 없었고 그저 자신을 용서 아니, 이해할 필요만 있었다. 환생의 사이클은 단지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과정일 수 있다. 사실 샘도 아니고 사라도 아니었던 그 '의식'은 마침내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빛을 향해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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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면에서 샘은 '사라가 샘의 몸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깬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반사된 제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비로 살다가 사람으로 깨어나 어리둥절했던 장자莊子같다. 꿈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소년에서 성인으로, 나비에서 사람으로 바뀌는 겉모습을 줄곧 지켜보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전체화면 위로 눈꺼풀이 깜빡인다. 그 눈꺼풀 뒤에서 거울을 '바라보던' 그 존재가 더 뒤로 물러선다. 사람눈의 테두리가 드러난다. 

 

 

"옛날에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워서 자신이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있었다. 알 수가 없다. 장주의 꿈에서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서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질화'다."   - 장자

昔者莊周夢為蝴蝶, 棚棚然蝴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 則蓬蓬然周也,不知周之夢蝴蝶, 蝴蝶之夢為周與? 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꿈 속에서 술을 마시던 이가 아침이 되면 슬피 울기도 하고, 꿈속에서 슬피 울던 이가 아침이 되면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꿈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꿈임을 알지 못하므로, 꿈 속에서 꾼 꿈에 대해 또 점을 쳐본다. 꿈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큰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이것!이 큰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장자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 又占其夢焉. 覺而後 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 知此其大夢也.

 

 

 

샘은 TV로 연가시를 본다. 이 기생충은 곤충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다가 번식기가 되면 곤충을 조종하여 맑은 물로 이동한다. 숙주는 죽고 연가시는 빠져나와 번식한다. 이것은 샘의 몸을 점유(또는 공유)하고 있는 사라와, 목적을 위해 계속 몸을 옮겨가는 샘에 대한 비유일테지만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샘이 운전할 때 차 열쇠에 달린 세마리 동물그림이 달랑거린다. 이것은 티베트불교의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또는 '생명바퀴The Wheel of Life' 또는 바바카크라Bhavacakra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림이다. 탐, 진, 치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냥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날지 못하는 새, 땅바닥에 붙어사는 뱀, 욕구에 눈먼 돼지! 아브락사스도 다리는 뱀이고 머리는 닭이다. 인간은 식욕, 성욕, 물욕, 권력욕에 끌려다니느라 지상에 붙들려 살면서, 구속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바깥쪽 원에도 상징적인 그림이 있다. 어둠無知속에서 동물적 자아에 쫓기고 끌려다니던 인간이, 밝음智慧속에서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 그러나 서로의 꼬리를 물고 결합한 닭-뱀-돼지가 바퀴를 굴리기 때문에 이 과정은 무한반복된다. 가혹하게도 한바퀴 돌 때마다 기억은 (거의) 초기화된다. 그래서 몇백번을 굴러도 언제나 처음이자 유일한 삶인 줄 안다. 바퀴를 잡고 있는 죽음의 신은 스핑크스처럼 '스스로 답을 찾기 전에는 못빠져 나간다'고 경고하는 듯 하다. 

 

샘은 동료 제이와의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난 자살 충동은 없어요. 아끼는 것들에 집착하는 편이라서요." 이 말은 우리 대다수의 상태를 대변한다. 우리가 삶을 지속하는 이유는 사실 행복해서가 아니다. '아끼는 것들' 속에서 안정을 찾음으로써,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완화하는 과정 자체가 삶이 된다. 익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 튜브에 집착하느라 물 밖으로 못나가는 바보처럼, 아끼는 것들(가족, 연인, 친구, 집, 재산, 돈, 인기, 명예...)을 내려놓지 못한다. 

 

제이 왈, "살면서 자기자신에 대해 웬만큼 알게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유지만 잘 하면 돼. 수평을 맞추듯이 (감정적)균형을 유지하는 거야." 잘 유지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에 어떻게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이는 'FUCK THE COLOR BLIND'라고 쓰여진 옷을 입고 있다. 이 옷은 잊을만 하면 한번씩 나타나서 마치 샘의 모든 괴로움과 사건사고의 원인이 '망할넘의 컬러 블라인드'라고 훈수하는 것 같다. 색맹color blind테스트용 그림을 흉내낸 이 프린트는 다분히 중의적인 말장난이다. 눈은 '총천연색 세상을 투사하는 프로젝션'으로서, 이 출중한! 시력을 끄기 전에는 텅 빈 '하얀 벽'을 결코 볼 수 없다. 일반 블라인드는 그저 빛을 가리지만, 컬러 블라인드는 그게 블라인드라는 사실마저 가린다.

 

'Reflections of My Life(The Marmalade, 1969)'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멜로디는 익숙한데 노랫말은 낯설다. reflection을 '반성, 성찰, 돌아봄' 등으로 의역하는 기존의 방식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읽으면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된다. reflection은 (물이나 거울에) 반사된 모습反影, 또는 영상映像(원본의)그림자, 반사된 빛을 뜻한다. 이 노래는 '컬러 블라인드'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각작용과 환영의 정교함에 대한 감탄,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벗어나 본향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소망,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걸 바꾸겠다고... 서구의 1960년대는 여러모로 놀랍다.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고 있어. 내 삶의 반영들.

아, 그 빛들이 어떻게 내 눈을 채울까.
힘겨운 이들이 건네는 인사들. 내 삶의 반영들.

아, 그들이 어떻게 내 눈을 채우는 걸까. 


이 모든 아픔, 다가올 슬픔. 나를 집으로 데려다줘.
내 모든 눈물, 울음들. 죽을 것만 같아.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집으로.
난 변하고 있어. 정리하고, 바꾸고 있어.

모든 걸 바꿔가고 있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세상은 나쁘고 험한 곳이야. 살아가기엔 끔찍한 곳이지.

아,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아.
이 모든 아픔, 앞으로의 슬픔.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집으로.
내 모든 눈물, 울음들. 죽을 것만 같아.

나를 돌려보내줘. 나의 고향으로.

 

 

"그대가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육체인가? 그 육체는 어머니의 자궁 속 작은 점에 불과했었다. 생각해보라. 무엇이 수태된 한 점의 물질 속에 잠복해서,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육체로 성장시켰는가? 세상에 태어나 존재해 왔으며 지금은 진리를 찾고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대의 정체는 바뀌어가는 겉모습 너머에 있는, 바뀌지 않는 '의식'이다."   -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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